佛法 .SGI

SGI 역대 회장의 생애

혜광리 2018. 11. 30. 10:45




제 1대 마키구치 선생님의 발자취

 

사신홍법으로 입정안국을

“내가 한탄하는 것은 한 종파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일국이 눈앞에서 망해 가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국가간효의 때가 아닌가.”

마키구치 선생님이 입신한 것은 창가교육학회가 발족하기 2년 전인 1928년의 일입니다.

 그 때 마키구치 선생님의 제자였던 도다 선생님도 함께 입신합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젊은 시절부터 노력파였으며, 고학으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의 교사를 거쳐 교장으로 재직하게 됩니다.

《인생지리학》 《향토과연구》 등을 저작하여 교육 분야에도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독자적인 교육방법을 고안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창가교육학’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으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치를 창조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 귀의한 마키구치 선생님은 오랜 세월 동안 추구해 온

교육이론의 근본이 불법 속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윽고 《창가교육학체계》

제1권을 발간하며 1930년 11월 18일 대성인의 불법을 기반으로

한 교육단체를 설립하는데, 이것이 바로 ‘창가교육학회’인 것입니다.

1931년 발행한 창가교육학회 최초의 기관지인 《신교(新敎)》에는

“정치와 경제 등 세간적인 생활을 개선하는 것은 지엽이다. 교육혁명과

종교혁명이라는 뿌리를 배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936년에는 회원이 증가하여 처음으로 하계강습회를 개최합니다.

이듬해에는 정식으로 발회식(發會式)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합니다.

1941년에는 기관지 《가치창조》를 발간하였고, 회원수도 2천 명에 달합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며

자비의 행동인 절복의 중요성을 호소했습니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점차 패색이 짙어지자 군국주의 정부는 불리한
전쟁상황을

반전하고자 전 국민에게 국가신도(國家神道)를 강요하며 사상통일을 꾀하기 시작합니다.

창가교육학회에도 탄압의 손길이 뻗쳐 왔습니다. 《가치창조》는 폐간되고,

전원이 신찰(神札)을 받도록 강요받습니다. 그러나 마치구치 선생님은

 단호하게 불법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신찰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정부의

탄압을 두려워하여 신찰을 받았던 총본산에 대하여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렇게 개탄하셨습니다.

“내가 한탄하는 것은 한 종파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일국이 눈앞에서

망해 가는 것이다. 종조(宗祖) 대성인의 슬픔을 나는 오로지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국가간효의 때가 아닌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결국 1943년 7월 6일, 홍교중이던 마키구치 선생님이 체포되고 도다

선생님도 도쿄의 자택에서 ‘치안유지법’‘불경죄’라는 혐의로 부당하게 체포됩니다.

도다 선생님은 독방 속에서도 오직 스승을 위해 기원합니다. “나는 아직 젊다.

선생님은 75세이시다. 아무쪼록 죄는 나 혼자 받고, 선생님은 하루 빨리 풀려나시기를….”

고령의 마키구치 선생님은 취조담당 검사에게 대성인 불법의 위대함을 호소하고

간수를 절복하는 등 끝까지 숭고한 신념을 관철합니다. 그리고 1944년 기이하게도

학회창립의 날인 11월 18일, 73세의 존귀한 순교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제 2대 도다 조세이 선생님의 발자취

 

스승의 정의를 몸으로 증명

“당신의 광대무변한 자비(慈悲)는 저를 감옥까지 데려가 주셨습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마키구치 선생님의 죽음을 안 것은 1945년 1월이었습니다.

 “1945년 1월 8일, 판사에게서 영산(靈山)에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슬픔.

 지팡이를 잃고, 등불을 잃은 쓸쓸한 마음…. 이 불초의 제자도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이 한 몸 광선유포에 바치겠다고 결심했습니다”라고

그 때의 심정을 회고했습니다.

마키구치, 도다 선생님과 함께 감옥에 들어갔던 21명의 간부들은 대부분

당국과 타협하거나 퇴전해 버립니다. 3천여 명의 회원들도 대부분

마키구치 선생님을 원망하며 퇴전해 갔습니다. 그러나 도다 선생님은

마키구치 선생님을 생각하며 “당신의 광대무변한 자비(慈悲)는

저를 감옥까지 데려가 주셨습니다.

그 덕분으로 ‘재재제불토(在在諸佛土) 상여사구생(常與師俱生)’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한 구절을 몸으로 읽고, 그 공덕으로

지용의 보살의 본사(本事)를 알아 법화경의 뜻을 조금이나마

신독(身讀)할 수 있었습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결의합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은 다쓰노구치 법난,

사도유죄 등 갖가지 대난을 받으셨습니다. 즉 입정안국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난을 받는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키구치, 도다 선생님도 입정안국을 실현하기 위해 법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퇴전의 신심을 관철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옥중에서 법화경의 깊은 뜻을 탐구하며 창제에 이은 창제를

거듭한 끝에 불가사의한 생명의 오달을 하게 됩니다.
“저 육만항하사 중 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틀림없이 상수(上首)는

 니치렌 대성인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장엄하고 선명한 구원(久遠)의 의식이었던가.

 그렇다면 나는 확실히 지용의 보살이었던 것이다! 좋다. 이것으로

나의 일생을 결정했다. 이 존귀한 대법을 유포하며 나의 생애를 끝마치는 것이다.”

이윽고 1945년 7월 3일 출옥하여 오직 홀로 학회를 재건하기 위해

분골쇄신합니다. 도다 선생님의 흉중에는 고뇌에 빠진 민중을 구제하겠다는

대정열과 스승 마키구치 선생님의 정의를 증명해 내고야 말겠다는

불굴의 신념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제자만 있다면

모든 것은 영원히 계승되어 가는 법입니다.

1946년 원단, 도다 선생님은 광포의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 간신히

남아 있던 회원을 대상으로 법화경 강의를 시작합니다. 전쟁 중에

많은 사람들이 퇴전해 간 이유 중의 하나가 신심의 확신과 교학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처음에는 수강자가 적었지만

갈수록 청년들도 모이기 시작하면서 회합은 활기를 띠게 됩니다.

교학을 근본으로 한 도다 선생님의 신심의 확신이 학회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해지면서 학회재건의 원동력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3월에는 창가교육학회의 이름을 ‘창가학회’로 바꿉니다.

이것은 학회의 목적과 활동은 교육계뿐만 아니라 불법을 바탕으로 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전반적인 사회에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는 뜻에서였습니다.


창가학회는 종교계의 왕자

“내가 살아 있는 동안 75만 세대 절복은 나의 손으로 하겠습니다.

만약 나의 이 원(願)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달성되지 않는다면 나의

장례식은 하지 마십시오.”

1947년 8월 14일, 19세의 이케다 선생님은 친구를 따라 도쿄 가마타의

좌담회에 참석하여 처음으로 도다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의 자세를

사색하고 있던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에게 세 가지를 질문합니다.

“올바른 인생이란?” “진정한 애국자란?” “천황제도에 대해서” 도다 선생님은

어떤 질문에도 명쾌하고 성실하게 답변해 줍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믿을 수 있는 스승을 만난 기쁨을 즉흥시로 표현했고, 이윽고 8월 24일

창가학회에 입신합니다.

1949년에는 기관지 《대백연화》, 1951년에는 《세이쿄신문》을 창간합니다.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는 광선유포의 활기찬 숨결이 맥동칩니다.

본격적인 언론전으로 비약적인 광포 전진의 토대를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1951년 5월 3일, 모든 회원들의 추대로 도다 선생님은 창가학회 제2대 회장에 취임합니다.

그 때 도다 선생님은 열렬한 기백으로 그 유명한 ‘75만 세대 절복’을 선언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75만 세대 절복은 나의 손으로 하겠습니다. 만약 나의

이 원(願)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달성되지 않는다면 나의 장례식은 하지 마십시오.

유해(遺骸)는 시나가와 앞바다에 던져 버리시오!”

회장 취임 후 도다 선생님은 곧바로 각부 조직을 결성, 부인부에 이어 남녀

청년부를 결성하고 ‘수호회’ ‘화양회’ 등 인재그룹을 만들어 청년을

육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특히 1952년 가마타 지부의 간사로 임명받은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의 결의를 절대로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제자인

나의 책임으로 75만 세대 홍교를 달성하겠다’고 굳게 맹세합니다.

그리고 혼신을 다한 활동으로 2월 가마타 지부는 201세대라는 홍교를

달성하며 75만 세대 달성을 향해 홍교의 파동을 일으켜 갑니다.

한편 1952년 창가학회는 독자적인 종교법인으로 출발,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을 발간하여 교학의 중요성을 배우고 더욱 신심을 심화시켜 갑니다.

1957년 9월 8일, 도다 선생님은 요코하마 미쓰자와 육상경기장에서 열린

동일본 체육대회에서 “원수폭은 세계민중의 생존권을 빼앗는 마(魔)이며

사탄이다”라는 역사적인 ‘원수폭금지선언’을 합니다.
도다 선생님이 회장에 취임하신 지 6년째가 되는 1957년 12월, 학회의

총 세대수는 76만 5천 세대가 되어 도다 선생님의 원업(願業)인

75만 세대 홍교를 마침내 달성해 냅니다.

1958년 3월 16일에는 이케다 선생님의 지휘 아래 6천 명이 넘는 남녀

청년부가 모여 ‘광선유포 기념의 날’ 의식을 거행합니다. 병든 몸으로

식전에 참석하신 도다 선생님은 “창가학회는 종교계의 왕자다.

우리들에게는 광선유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이 있다. 미래는

제군에게 맡긴다”라고 청년들에게 미래의 광선유포를 호소합니다.

그리고 4월 2일, 도다 선생님은 이케다 선생님에게 일체의 광선유포를

의탁하고 파란만장한 58세의 생애를 마쳤던 것입니다.



제 3대 이케다 사이사쿠 선생님의 발자취

 

평화의 연대를 세계로!

“인류 사회에 민중의 선(善)의 연대를 넓혀 가는 일이야말로

창가의 사명임을 명심하고, 21세기를 향해 새로운 도전을 개시해 가겠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서거한 후 세간에서는 “학회는 공중분해할 것이다”라는 등의

소문이 잇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판을 씻어버리기라도 하듯 스승의

구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일어선 이케다 선생님이 일체의 지휘를 잡은 후,

광포는 더욱 맹렬한 속도로 전진하게 됩니다.

은사 서거 직후인 5월 3일, 춘계총회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그 유명한

‘일곱개의 종’이라는 구상을 발표합니다. 이 구상에 맞춰 창가학회는

1930년을 시작으로 7년마다 크나큰 광선유포의 마디를 새겨 왔습니다.

이윽고 1960년 5월 3일, 이케다 선생님은 창가학회 제3대 회장에 취임,

 “오늘부터 도다 문하생을 대표해서 화의(化儀)의 광선유포를 향해

일보 전진의 지휘를 해 가겠습니다”라고 일성을 울립니다.

제3대회장으로서 사명의 횃불을 이어받은 이케다 선생님은 스승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평화의 길’ ‘희망의 길’을 열어 가기 위해,

민중의 대지에 행복의 꽃을 피우겠다는 일념으로 40년 동안 세계

각지를 방문하며 불멸의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1960년 10월, 은사의 유훈(遺訓)을 가슴에 안고 이케다 선생님은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로 광포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1961년에는

닛타쓰 상인을 안내하여 불교 발상지인 인도를 방문, ‘동양광포’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 후 이케다 선생님은 유럽, 아시아, 북·남미, 소련, 중국 등

50여 나라를 방문, 지도자와 식자들과 만나 대화를 거듭하며 21세기를 향한

평화의 조류를 구축해 왔습니다. 1975년 1월 26일에는 괌에서 세계

51개국의 대표가 모여 제1회 세계평화회의를 열고 ‘SGI’를 발족하게 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해마다 1월 26일 ‘SGI의 날’ 기념제언을 통해 핵폐기,

자원문제, 난민문제, 환경문제 등 인류가 직면한 지구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다각도로 제시해 왔습니다. 유엔은 이러한 이케다 선생님의

신념과 행동을 높이 기려 1983년에는 ‘유엔평화상’을 수여하기에 이릅니다.

바야흐로 세계 163개국·지역으로 넓혀진 SGI의 운동은 불법을 기조로 한

‘인간주의’를 내건 평화·문화·교육을 통한 ‘민중의 연대’ 운동이었습니다.

민족과 이데올로기를 떠나 문명간의 대화를 끊임없이 전개해 온

이케다 선생님의 이념과 행동은 ‘분단과 대립’을 ‘신뢰와 공생’의

지평으로 여는 수맥이 되었던 것입니다.

창립 100주년을 향해 이케다 선생님은 청년들의 성장과 육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세계에 우정의 다리를 놓는 일은 청년의 교류와 활약에

달려 있으며, 인류가 직면한 위기와 과제도 지금의 청년들의 손에

달렸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말합니다.

“‘전쟁의 세기’에서 ‘평화의 세기’ ‘인도(人道)의 세기’를 향해 세기의

분수령에 서 있는 지금, 더한층 전 세계에 우정의 다리를 구축하면서

인류 사회에 민중의 선(善)의 연대를 넓혀 가는 일이야말로 창가의

사명임을 명심하고, 21세기를 향해 새로운 도전을 개시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