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도다 선생님과 이케다 선생님(上)
이케다 선생님 지도선집(指導選集)
제26장 창가 삼대(三代)의 사제
②도다 선생님과 이케다 선생님(上)
(26-9) 도다 선생님의 인물상을 말하다
일찍이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스승 도다(戶田) 선생님의 탁월한 인물상을 여러 각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이케다 선생님 가슴에 끊임없이 약동하는 스승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도쿄 제3, 제4 총합본부 합동대표자회의 스피치에서(1986년 12월 25일, 도쿄)
인생의 스승인 도다 제2대 회장은 위대한 인격자였습니다. 나는 미래부와 대학부 멤버들에게서 ‘도다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하고 묻는 편지를 많이 받습니다.
조금 전에 스승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생각나는 대로 단문 형태로 적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도다 선생님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하겠습니다.
엄한 선생님이었다.
인생의 다정한 스승이었다.
예리하고도 강직한 선생님이었다.
관대한 스승이었다.
정열적인 선생님이었다.
지성이 넘치는 스승이었다.
사악과 오만에 격노하는 선생님이었다.
눈물이 많은 스승이었다.
모든 현상의 본질을 간파하는 선생님이었다.
수학의 천재인 스승이었다.
바위와 같은 신심, 신념을 소유한 선생님이었다.
대법(大法) 외호를 위해 충성하는 스승이었다.
추상(秋霜)같이 엄한 성격의 선생님이었다.
늘 봄바람처럼 웃음을 머금은 스승이었다.
‘자네도 술 한잔 하게’ 하고 웃음 짓는 선생님이었다.
왕자(王者)의 풍격을 갖춘 스승이었다.
늘 일류의 차원 높은 풍격을 풍기는 선생님이었다.
늘 서민의 편에 서는 스승이었다.
‘괴로움’과 ‘죽음’으로 고뇌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는 선생님이었다.
늘 고뇌를 함께하는 스승이었다.
낙관과 비관의 양면을 겸비한 선생님이었다.
사악(邪惡)에는 사력을 다해 맞서는 스승이었다.
상대의 본질을 간파하는 선생님이었다.
상대의 본질을 승화시키는 달인의 스승이었다.
입정(立正)과 안국(安國)을 외치는 선생님이었다.
가난한 가정을 보고 눈물짓는 스승이었다.
어떤 면에서 끊임없이 고투하는 선생님이었다.
사람들의 기쁨과 즐거움을 기뻐하는 스승이었다.
교조(敎祖)라고 부르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선생님이었다.
범부와 위대한 신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스승이었다.
늘 대중을 사랑하는 선생님이었다.
한 사람의 심원한 생명을 간파하는 스승이었다.
치밀하고 틈이 없는 선생님이었다.
늘 호탕하고 대범한 스승이었다.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준엄한 선생님이었다.
제자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스승이었다.
불타오르는 정열을 소유한 선생님이었다.
늘 지성 그 자체인 인생을 사는 스승이었다.
(26-10) 도다 선생님과 이케다 선생님의 만남
1947년 8월 14일, 전쟁이 끝나 황폐한 시대에 인생의 나침반을 찾아 헤매던 열아홉 살 이케다 선생님이 도다 선생님과 만난 엄숙한 장면을 그립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수필 신·인간혁명’ 〈내 원점 8월 14일〉에서(2002년 8월 14일)
그날 저녁은 조용했다. 집들도 저마다 저녁식사가 끝났는지 조용했다.
1947년 8월 14일.
몇 사람이 한 집을 향해 어둑어둑한 길을 서둘러 씩씩하게 걸어갔다. 오타의 고지야에서 여는 좌담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날은 내 인생의 ‘운명적인 하루’가 되었다. 그날은 내가 도다 조세이 선생님께 창가학회에 입회할 것을 서원하고 약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흘 뒤인 8월 24일, 나는 입신했다. 좌담회에 참석한 날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스승인 도다 선생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삼세(三世)에 흐르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도다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광선유포를 위해 이 몸을 바치겠다고 제자의 ‘서원’을 결심한 날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만 2년이 지난 무더운 한여름 저녁 하늘을 수놓은 생생하고도 희망이 넘치는 서민의 인생 드라마였다.
가로등이 없는 길은 어두웠다. 가마타 여기저기에는 불에 탄 황량한 들판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잔혹한 전쟁으로 무참히 짓밟힌 선량한 시민들의 괴로움은 더욱 깊어만 갔다.
젊은 나도 이 전쟁의 책임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고 하루하루 엄하게 자신에게 물었다.
당시 십대이던 나는 폐병으로 늘 열이 나서 초저녁이 되면 나른해지고 힘들었다.
희망 찬 인생을 꿋꿋이 사는 샛별 같은 나침반을 찾아 헤매던 나는 ‘생명철학’을 배우는 모임이라는 친구의 말에 아무것도 모른 채 좌담회로 향했다.
좌담회 장소에 도착한 시간은 사방이 모두 어둑어둑해진 저녁 8시 무렵이었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자 안에서 조금 쉰듯하면서 활달한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도다 조세이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선생님은 <입정안국론>을 강의하고 계셨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이 평화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위대한 철학을 수립하겠다고 선언하신 어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안국론강의’는 그 전해부터 ‘법화경강의’에 이어서 새롭게 시작해 한 달에 한번 실시하고 있었다. 강의는 도다 선생님이 세상을 향해 경고하는 정열 그 자체였다. 니치렌불법(日蓮佛法)의 진수를 외치는 사자후였다.
결코 낡고 죽은 불교가 아니었다. 강의를 듣고 있으면 생생한 확신과 약동감이 넘치는 빛나는 미래가 열렸다.
◇ ◇ ◇
<입정안국론> 강의가 끝나자 간담이 이어졌다. 은단을 씹고 있는 도다 선생님은 전혀 꾸밈이 없는 소탈한 모습이었다. 격식만 따지는 종교가나 정치가처럼 권위적이고 사람들을 깔보는 오만함과는 차원이 다른 소탈함이었다.
처음 뵙는 나도 젊은 마음 그대로 질문을 드렸다.
“선생님, 올바른 인생이란 도대체 어떤 인생을 말합니까.”
조금 고심에 찬 목소리였는지도 모른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나는 열세 살이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는 열일곱 살이었다. 인생에서 감수성이 가장 풍부한 시기에 전쟁이라는 먹구름이 완전히 드리우고 있었다.
게다가 결핵도 앓았다.
‘세상은 전쟁’ ‘나는 결핵’ 내 뒤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그리고 패전으로 그때까지 고수한 국가관이나 인생관은 모조리 무너지고 말았다.
도대체 진실한 인생은 무엇인가! 이 생명을 어디에 사용하면 좋은가!
도다 선생님의 확신에 찬 명쾌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이론의 유희나 초점에서 벗어나 애매하게 얼버무리는 기만은 조금도 없었다.
청년을 우롱하는 어른에게 실망에 빠져 있던 나는 감동했다. 전쟁을 찬미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손바닥 뒤집듯 평화주의자로 탈바꿈한 정치가나 지식인에게도 진저리가 난 상태였다.
도다 선생님이 군부 정부의 탄압으로 2년 동안 투옥된 사실은 내가 도다 선생님을 스승으로 섬기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만약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감옥에 들어가서라도 저항할 각오가 된 인간이 되고 싶었다. 어떠한 권력의 횡포에도 굴하지 않는 용사로 살고 싶었다. 그럴 수 있는 실천 철학을 찾고 있었다.
나는 인생의 길을 모색하는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사제의 길을 철저히 걸었기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장 ‘정의로운 인생’을 꿋꿋이 살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1996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교육대학원 강연에서 나는 도다 선생님께 외치듯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제 98퍼센트는 모두 은사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인간에게만 사제가 있다. 사제의 길을 걸으면 자신을 북돋울 수 있다. 여기에 인간의 궁극(究極)이 있다. 후계의 청년들에게는 남길 수 있는 한 내 모든 것을 전해 남기고 싶다. 뒷일을 모두 의탁하고 싶다. 이런 내 마음을 제자인 여러분은 깊이 알아주기 바란다.
(26-11) ‘도다대학’의 훈도
1949년 1월부터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이 경영하는 출판사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혼란한 시대의 영향으로 도다 선생님의 사업이 암초에 부딪힌 가운데 온몸으로 사업을 지탱한 이케다 선생님은 다니던 야간학교도 단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고투의 나날 속에서 도다 선생님께 직접 만반에 걸친 교육을 받은 사제의 드라마를 그립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수필 신·인간혁명’ <‘도다대학’의 명강의>에서(1999년 12월 7일)
1950년, 찬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도다 선생님이 엄숙한 얼굴로 내게 말씀하셨다.
“일본 경제도 혼란하고 내 사업도 점점 더 바빠질 텐데 자네가 학교를 단념해주지 않겠나?”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예.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엄한 눈빛에서 따뜻한 빛을 띠며 “대신 내가 책임지고 자네의 개인교수를 해주겠네.” 하고 말씀하셨다.
이윽고 도다 선생님은 매주 일요일 나를 집으로 불러 일대일 개인 교습을 해주셨다. 혼과 혼이 빛나는 ‘도다대학’ 강의는 오전에 시작해 오후까지 이어져 저녁식사까지 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잦았다.
점점 일요일만으로는 시간이 부족해 도다 선생님은 회사에서도 매일 아침 반드시 강의를 해주셨다.
선생님 회사에서 하는 강의는 1952년 5월 8일 목요일부터 1957년까지 이어졌다. 도다 선생님이 회장에 취임하신 지 1주년이 지난 뒤부터 서거하시기 직전까지의 기간이다.
강의 첫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등교육의 전반을 가르치겠다. 우수한 대학 이상으로 교육하고자 한다.
아무리 대학을 나왔어도 대부분 무엇을 배웠는지 잊어버리는 법이다. 남는 것은 고작 골자 정도다. 나는 지금부터 자네에게 살아 있는 모든 학문을 가르칠 생각이다.”
강의 시간은 원칙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 아침 8시가 지나 9시경까지로, 한 시간이 안 되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출근 시간에 매우 엄격하셨다. 나는 선생님보다 일찍 출근해 청소나 걸레질 등을 모두 끝내 놓고 선생님을 기다려야 했다.
선생님이 한마디 인사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오시면 곧바로 진지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선생님 바로 맞은편에 내가 앉으면 다른 직원들이 의자를 가져와 그 주위를 둘러쌌다.
강의는 먼저 수강생이 교과서를 순서대로 읽고 나면 도다 선생님이 자유자재로 강의하시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때로는 교과서에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시기도 했다.
“이 이론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이 설은 조금 억지가 있다.”
“이것은 깊이 사색하지 않은 논설이다.”
“이 학자는 원리의 일부분을 모든 것에 대입시키려고 한다.” 등이라고 하시는 그 예리한 천재성에 놀랄 정도였다.
강의 중에는 필기를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한마디 한마디를 생명에 새기기를 바라신 것 같다.
왜 필기를 하면 안 되는가. 선생님은 이런 일화를 소개해주셨다.
어느 난학자(蘭學者, 에도 시대 중기 이후 네덜란드인이나 네덜란드어를 통해서 일본에 들어간 서양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가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의학을 공부했다. 학자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었고, 그 노트는 고리짝에 꽉 찰 정도로 양이 방대했다. 그런데 돌아가려고 바다를 건널 때 배가 침몰되어 노트를 모조리 분실하고 말았다. 열심히 필기를 하느라 학자의 머릿속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님은 ‘자네들은 모두 머릿속에 넣어라, 필기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한번 한번이 진검승부였다. 훗날 동료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도다 선생님은 내가 없는 곳에서 ‘다이사쿠는 스펀지처럼 잘 흡수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과목은 먼저 ‘경제학’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법학’을 비롯해 ‘화학’ ‘천문학’ ‘생명론’ 등 과학의 만반을 배웠다. 또 ‘일본사’ ‘세계사’ 및 ‘한문’ 그리고 ‘정치’라는 커다란 흐름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교재도 대체로 그때 막 새로 나온 책이었다. 예를 들어 과학에서는 《신과학대계》라는 시리즈를 교재로 사용했는데 신간이 나오자 며칠 뒤에 이미 그것을 아침강의에서 사용하신 적도 있다. 거기에는 ‘시대에 앞서야 한다’는 도다 선생님의 훈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젊은 날의 일기》를 펼치자 곳곳에 선생님의 강의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런 구절도 있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제자를 육성하시는 선생님의 은혜에 나는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아직은 힘, 힘, 힘을 기를 때이다. 후대를 준비하기 위해 온갖 힘을 기르자.”
1953년 12월 22일에 쓴 일기다.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26-12) 어려움을 이겨낸 사제의 투쟁
사업이 어려워져 이사장을 사임한 도다 선생님을 젊은 이케다 선생님이 엄연히 끝까지 지켜 제2대 회장 취임의 길을 연 역사를 말합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본부간부회, 전국부인부간부회 스피치에서(2006년 1월 6일, 도쿄)
1951년 1월, 도다 선생님의 사업은 최대의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미 그 전해 여름에는 당국으로부터 영업정지 명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선생님께 수없이 신세를 진 사람들이 일단 상황이 안 좋아지자 한 사람 또 한 사람 선생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 중에는 ‘도다 이 멍청한 놈!’이라고 하면서 배은망덕한 욕설을 퍼붓고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실질적으로 나 혼자였습니다.
젊은 나는 욕을 먹고 비난을 받으면서 선생님의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급여는 몇 개월이나 받지 못했습니다. 식사도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하다못해 몸이라도 좀 건강하면 좋았을 텐데. 괴로워하고 번민하고 바둥거리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 진지하게 창제를 거듭했습니다. 밤마다 어서를 배독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여러모로 심사숙고한 끝에 이사장을 사임하셨습니다.(도다 선생님이 이사장을 사임하겠다고 발표한 날은 1950년 8월 24일이다.)
나는 고심 끝에 도다 선생님께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이사장을 그만두시면 새로운 이사장이 제 스승이 되는 것입니까?”
도다 선생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고생만 시키지만 자네의 스승은 나다.”
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입니다.
내가 직접 내 이야기를 하기는 좀 그렇지만 다음 학회를 짊어질 청년부는 모두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굳이 진실된 역사를 일부분 말하겠습니다.
(그 한달 뒤인 9월 21일, 이케다 선생님은 오로지 홀로 스승을 끝까지 섬기겠다는 마음을 시로 읊어 ‘먼 옛날/ 불가사의한 인연으로/ 섬기는 일은/ 다른 사람은 변해도/ 나는 변치 않으리’라는 시를 지어 도다 선생님께 드렸다.
도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몇 번인가/ 전쟁터에/ 서는 몸/ 버리지 않고 지키는 것은/ 자네라는 칼이로다’ ‘색은 바래고/ 힘은 빠져도/ 나는 왕자〈王者〉/ 죽어서도 남기는 것은/ 자네라는 관〈冠〉’이라는 시 두 수(首)로 화답하셨다. 준엄한 사제의 드라마다.)
1951년 1월 6일, 정오가 다 된 시간에 집으로 오라는 도다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자택을 찾은 나는 선생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막 스물세 살이 된 때였습니다.
강직하고 위대한 도다 선생님이 그때만큼은 몹시 초췌한 모습이었습니다.
사업은 상황이 점점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방에는 선생님과 사모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오늘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학회도 사업도 모두 자네가 맡아 주었으면 하는데 모두 맡아주겠나.”
선생님은 더욱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와 자네가 사명을 위해 끝까지 산다면 반드시 대성인의 유명(遺命)을 달성할 때가 올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강하게 더 강하게 자네는 학회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이 말을 도다 선생님의 유언으로 엄숙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날의 서원을 ‘다이난코(大楠公)’의 정신에 빗대어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선생님은 마사시게(正成: 천황을 도와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무장)와 같고, 나는 마사쓰라(正行: 마사시게의 아들)와 같노라. 사모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이날의 감동, 엄숙, 감루, 사명, 인연, 삶의 보람은 한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후계자는 ‘나’로 결정되었다.
격렬해질 이 한해도 점점 밝아온다. 어떠한 고뇌에도 싸워 이기고 남자답게, 청년답게, 젊은이답게 올해도 최후까지 싸우자.”(《젊은 날의 일기》)
그날 그때의 ‘사제(師弟) 서원’ 그대로 나는 죽을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광선유포의 위대한 스승이신 도다 선생님을 홀로 섬기고 오로지 홀로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것이 학회의 역사입니다. 참된 사제의 모습입니다. 이 점에 학회의 혼이 있고 원점이 있습니다.
간부라고 해도 도다 선생님과 고충을 함께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사장을 한 인간마저 도다 선생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어떻든 나는 결심했습니다.
“반드시 도다 선생님을 다음 회장으로 모시겠다. 그리고 도다 선생님이 종횡무진으로 광선유포를 지휘하실 수 있도록 만들겠다.”
나는 기원했습니다. 선생님을 위해, 학회를 위해 격투 속에서 끝까지 기원했습니다. 자나 깨나 제목, 걸으면서도 제목, 차 안에서도 전철에서도 시간만 있으면 계속 제목을 불렀습니다.
오로지 제목을 부둥켜 안고 이 세상의 잔혹한 고난을 물리쳐 도다 선생님이 제2대 회장에 취임하시는 길을 목숨 걸고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맞이한 1951년 5월 3일, 격동의 고뇌를 참고 견뎌 마침내 도다 선생님은 당당히 제2대 회장에 취임하셨습니다.
그 성대한 추대식 날, 도다 선생님은 조용히 내게 “자네 덕분이다. 정말로 고맙네.” 하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또 만년에는 내 장인, 장모와 몇몇 학회 간부가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 인생은 훌륭한 제자를 두어 정말로 행복했다.”라고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초대 회장 마키구치(牧口) 선생님이 군부 권력에 맞서다 감옥에 들어가셨을 때 감옥까지 함께 가 끝까지 싸우신 분은 오로지 도다 선생님 한 분이었습니다. 이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나는 그런 도다 선생님께 인생을 다 바쳐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내가 제3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사제불이(師弟不二)’라는 궁극의 위대한 투쟁에 오늘날 학회가 크게 발전한 근본 인(因)이 있습니다. 이 점을 결코 잊지 말기 바랍니다.
(26-13) 불법의 생명은 사제불이에 있다
사제불이의 경지에 서야 비로소 스승의 진실이 제자에게 맥맥이 전해져 불법의 생명이 유통된다고 말합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간사이총회, 효고현총회 스피치에서(1991년 10월 16일, 효고)
도다 선생님의 ‘진실’은 무엇인가.
결론지어 말하면 ‘오로지 광선유포’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광선유포’를 추진하기 위해 ‘창가학회’를 구축해 끝까지 지키는 외에 없습니다.
여기에 선생님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불자(佛子)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일념, 다시 말해 선생님의 생각과 행동은 모두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여느 때는 아수라와 같이 악을 책하고 어느 때는 드넓은 바다와 같은 자애로 동지를 감싸셨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을 떠받드는 거인 아틀라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광포의 전진을 추진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나는 열아홉 살 여름에 선생님과 만났습니다. 1년 수개월이 지난 스물한 살때부터는 직접 선생님을 모시고 일했습니다. 1년 365일 아침부터 밤중까지 열심히 선생님을 섬겼습니다.
어느 때는 새벽 4시에 갑자기 부름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지금과 달리 차가 금방 잡히던 시절도 아닙니다. 그래도 불가사의하게 택시가 있어 선생님 댁으로 달려갔습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날마다 정말로 엄격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인물의 진가는 궁지에 몰렸을 때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선생님을 여러 면에서 아주 상세히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진실’을 혼의 오저에 새겼습니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 간다, 선생님과 함께 살고 선생님의 목적을 위해 죽자’고 정했습니다. 제자로서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광선유포의 모든 책임을 지자고 정했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의 심정, 생각이 선명하게 마음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스승의 참된 위대함, 훌륭함을 가슴속 깊이 새길 수 있었습니다. 또 손을 쓰는 것 하나하나 스승의 리듬에 합치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 하는 행동은 모두 선생님의 마음을 받아서 하는 말과 행동입니다. 사제의 마음은 어디까지나 ‘불이(不二)’가 아니면 불법의 생명은 없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지켜내야 제자입니다. ‘사제’입니다.
(26-14) 스승에게 승리의 보고를!
도다 선생님이 제2대 회장에 취임했을 때 회원은 실질적으로 3천 명 정도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도다 선생님은 75만 세대 절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그 대원을 불과 6년 반 만에 멋지게 이루어낸 이면에는 스승의 구상을 단연코 실현하겠다는 이케다 선생님의 불이(不二)의 격투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5·3기념 대표자회의 스피치에서(2009년 5월 3일, 도쿄)
도다 선생님은 제2대 회장 취임식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75만 세대 절복은 내 손으로 하겠습니다.” “만약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소원을 달성하지 못하면 내 장례를 치르지 마시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스승이 인생의 대원을 말씀하신 이 중대한 발표를 꿈같은 이야기로 흘려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이쿄신문에도 싣지 않았습니다. 잔재주를 부리는 교만한 간부들이 가당치도 않은 목표를 후세에 남기지 않겠다고 기사로도 다루지 않았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회장에 취임하신 5월에는 A급 지부조차 한달 절복 목표가 50세대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승의 구상을 실현하는 것이 제자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도다 선생님의 원업은 그대로 제자인 내 서원이 되었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할 내 사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회는 좀처럼 홍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모두 마음속으로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고참 간부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벽 앞에서 탄식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마타지부 간사로서 광선유포의 무대에 힘차게 뛰어들었습니다.
때는 1952년 몹시 추운 2월, 도다 선생님이 쉰두살이 되시는 달이었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마음을 끝까지 외쳤습니다. 사제의 길을 계속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스승의 광선유포 정신과 마음이 융합할 때 지용보살의 지혜롭고 용기 있는 생명이 우리 가슴속에서도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지는 나와 함께 선생님에게 보답하고자 심기일전해 용감하게 뛰어다녔습니다.
그곳에는 환희가 있었습니다. 희망이 있었습니다. 로망이 있었습니다. 기세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마타지부는 단숨에 ‘201세대’라는 전대미문의 확대를 달성했습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75만 세대 절복이라는 서원을 실현하는 돌파구를 결연히 열었습니다. 가마타는 승리했습니다! 내 고향 도쿄에서 승리를 향해 대행진을 시작했습니다.
법화경에는 ‘지도(知道)’ ‘개도(開道)’ ‘설도(說道)’라는 부처의 역용(力用)이 씌어 있습니다. 묘법을 수지한 우리는 ‘길을 알고’ ‘길을 열고’ ‘길을 설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나는 도다 선생님의 직제자로서 조토를 비롯해 분쿄, 삿포로, 오사카, 간사이, 야마구치, 주고쿠, 아라카와, 가쓰시카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가는 곳마다 향하는 곳마다 새롭게 빛나는 광선유포의 길을 개척하고 늘 단호히 사제승리의 깃발을 세웠습니다.
하루하루 모든 것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힘든 투쟁이었습니다. 쉬운 투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설마가 실현’이 된 투쟁이었습니다.
승리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언제 어떠한 때에도 내 마음이 스승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스승께 보고하고 지도 받았습니다. 선생님 집 근처인 메구로역에 내려 빠른 걸음으로 선생님 집으로 향한 일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늘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 지금 나를 보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당당히 보여드릴 수 있는 자신이냐 아니냐’ 나는 늘 그렇게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꿋꿋이 싸우는 내 마음에는 ‘장하다!’ 하고 웃으며 흐뭇해하시는 선생님의 얼굴이 빛났습니다. 동시에 ‘아직 멀었다!’ 하는 스승의 엄한 질타가 늘 천둥소리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나는 날이면 날마다 나 자신에게 강하게 말했습니다.
‘불법은 승부다. 그러므로 패배는 죄(罪)다. 지면 선생님이 구상하신 광선유포가 좌절되고 만다. 절대로 지면 안 된다. 반드시 승리를 보고드려야 한다.’
그 일심불란한 ‘기원’이 힘이 되고 지혜가 되었습니다. 그 용맹정진하는 ‘행동’이 활로를 열고 제천선신을 움직였습니다.
‘오로지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 그 서원의 일념 하나로 해마다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전진! 전진! 전진!
승리! 승리! 승리!
나는 영원히 후회를 남기지 않을 제자의 진심 어린 정성을 관철했습니다.
사제 공전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승리해 1957년 12월, 학회는 마침내 75만 세대를 달성했습니다. 선생님의 대원을 완벽히 성취했습니다.
스승의 도전은 제자의 도전입니다.
제자의 승리는 스승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사제’의 영광은 ‘영원’한 영광입니다.
불법의 근간은 ‘사제’입니다. 특히 ‘사제불이의 기원’입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스승이 똑같은 마음으로 기원하지 않으면 물 위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아 이루어질 리 없다.”(어서 1151쪽, 통해) 아무리 기원해도 사제의 마음이 맞지 않으면 기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사제의 기원이 불이(不二)이면 기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법의 방정식입니다.
(26-15) 홀로 서는 제자의 길
이케다 선생님이 도다 선생님 슬하에서 청년부의 중핵으로서 스승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모든 투쟁에 앞장서 광선유포의 길을 연 역사를 그립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수필 인간세기의 빛’ 〈새로운 한해를 출발〉에서(2004년 1월 6일)
1954년, 춘삼월 때의 일이다.
도다 선생님은 “다이사쿠가 일어설 때가 왔다. 다이사쿠, 청년부 실장이 되어라. 나도 조금 지쳤구나. 일체를 부탁한다.”라고 하시며 직접 나를 임명하셨다.
어쨌든 도다 선생님이 동지 약 3천 명과 함께 제2대 회장으로 일어서 광선유포의 대진격을 시작한 지 만 3년을 앞둔 때였다. 광선유포의 구상은 모두 선생님 가슴속에서 나와 절복 홍교의 파동도 마침내 10만이라는 거대한 물이 되었다. 그러나 대약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시 학회는 모든 것이 도다 선생님의 양어깨에 달려 있었다. 개인지도도 어서강의도 청년들을 훈련하고 육성하는 일도 또 지방에서 광포를 추진하는 일도 모두 선생님의 진두지휘 아래 진행되었다. 학회를 ‘배’라고 한다면 선생님 혼자서 배의 스크루 역할과 조타수를 겸하는 것과 같았다.
어본존을 근본으로 한 동지들의 신심으로 엔진은 더욱더 힘차게 회전되고 있었다. 그 기세가 확실히 스크루에 연동하고 올바르게 키를 잡아야 비로소 배는 파도를 헤치고 나아간다.
선생님은 새로운 스크루를 만들려고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광선유포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역직을 주고 훈련시키셨다.
임명을 받은 3월 30일, 나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한계단 한계단 학회의 중핵으로서 광포를 추진해야 한다. 이것이 내 사명이다. 화초가 있어야 꽃이 피는 법. 이것이 사명이리라. 나 자신이 있어 묘법을 유포한다. 이것이 사명이리라.”(《젊은 날의 일기》)
그리고 부처와 마의 대투쟁을 위해 일어서겠다는 결의를 담아 “결국은 승부를 결정해 버리는 이외는 이 재난이 그치기 어려우리라.”(어서 998쪽) 하고 썼다. 불법은 어디까지나 승부다. 내 사명은 이기는 것이라고 나는 생명에 새겼다.
그해(1954년) 도다 선생님은 연초부터 청년부 간부의 회합에 참석해 “다음 학회는 청년에게 의탁하겠다!”고 열렬한 기백으로 외치셨다.
매일 아침마다 강의도 계속해주셨다. ‘공부하라, 공부하라’는 선생님 목소리에는 유언과 같은 울림마저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청년부 실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청년부 실장은 창가의 중핵 중의 중핵이다.
나는 ‘내 성장이 청년부의 성장이다, 아니 학회의 전진이다.’ 하고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를 악물고 한 걸음이라도 두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날마다 일분일초를 아껴 어서를 배독했다. 독서에도 도전했다. 일도 학회활동도 모든 책임을 지고 투쟁하면서 뛰어다녔다. 하루하루가 격전이고 승부였다.
하루하루 너무나도 바빠 약한 내 몸은 피로 누적으로 미열이 도통 내려가지 않아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생명 상태였다.
선생님은 마를 잘라 내듯 엄하게 말씀하셨다.
“삼장사마와 벌이는 싸움이다. 이기려면 울면서 어본존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다.”
단연코 강해져라!
강하게 일어서라!
강하게 살아야 한다!
나는 색심(色心)의 숙명을 혁명하는 마음으로 맹렬한 기세로 노도에 맞섰다.
실장이 되었다고 해서 도다 선생님께 이런저런 지시를 받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먼저 모든 것을 너희들이 책임지고 생각해라’ 이것이 선생님의 훈련이었다.
현장 제일이다. 그리고 동지가 괴로워하지 않도록 쉽게 싸울 수 있도록 또 먼 광포의 앞날을 전망하여 전광석화와 같이 모든 과제에 손썼다.
그저 책상에 앉아 얕은 계책을 짜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제일선에 뛰어들어 누구보다 고생하고 지혜를 짜내 활로를 열어야 한다.
도다 선생님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엄격하고 사람들을 크게 포용하는 데에 늘 마음을 쓰지 않으면 강력한 추진력이 될 수 없다.’고 장군학을 가르치셨다.
그때는 정말 선생님께 자주 혼났다. 정보가 늦다고 혼나고, 뭔가의 대응에 대해 또 혼났다. 직접 관계없는 일도 어떻게 되었느냐고 질책하셨다.
‘청년부가 모두 광선유포의 책임을 짊어지라’는 엄격한 애정이 어린 감사한 지도자였다.
‘홀로 선다’ 스승의 깊은 기대에 보답하는 길은 이렇게 일념을 정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청년부 전우(戰友)도 또한 자신이 있는 곳에서 승리하기 위해 단호히 모든 책임을 지고 일어서라!
광선유포의 격전이 펼쳐지면 어디라도 달려가 대역전을 펼치는 돌파구를 열어라! 나는 그 모범을 보이는 개척자가 되어 싸우며 나아갔다. 그리고 새로운 승리와 확대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임명받고 한달 정도 지난 5월에는 ‘청년부 5천 명 결집’을 했다. 그리고 불과 반년 뒤에는 그 두 배인 ‘1만명 대결집’도 실현했다.
이듬해(1955년), 일련종(미노부파)과 벌인 ‘오타루문답’에서도 승리했다. ‘삿포로 여름투쟁’에서도 일본 최고의 홍교를 감행했다. 1956년에 펼친 ‘오사카 대법전’에서는 한 지부에서 한달 만에 11,111세대 절복 이라는 불멸의 금자탑을 세웠다. 이어지는 ‘야마구치개척지도’에서도 승리했다. 학회원을 못살게 굴고 신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세력과 싸운 ‘유바리탄광노조 사건’에서도 나는 승리했다.
게다가 제3대 회장에 취임하고 이듬해인 1961년에는 국립경기장을 가득 메운 ‘정예 10만 대결집’을 달성했다. 여기에 일본 전국이 놀라고 수많은 언론이 달려들었다.
나는 이 대결집을 청년부 실장으로서 펼친 마지막 투쟁이라고 정하고 있었다. 나는 만천하에 완승의 깃발을 유유히 내걸었다고 생각한다.
쉬운 투쟁은 하나도 없었다. 누구나가 ‘어렵다’ ‘무리다’ 하고 뒷걸음질 치는 격전뿐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스승의 제자로서 결코 질 수 없었다.
하나하나 ‘벽을 부수는’ 투쟁이었다. ‘사악을 물리치는’ 투쟁이자 ‘정의를 확립하는’ 투쟁이었다. ‘창가의 사명과 위력을 당당히 보여주는’ 투쟁이었다.
이번에는 우리 본문의 제자인 청년부 여러분이 자랑스럽게 일어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