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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의 지혜 <상권> 제2장 방편품 /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마음 - 현실변혁을 향한 끝없는 도전

혜광리 2017. 2. 17. 14:19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마음 - 현실변혁을 향한 끝없는 도전


[사이토] 초창기 어느 대선배에게서 '비화(秘話)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이케다 선생님이 <선시초강의(選時抄講義)>를 집필하셨을 때의 이야기(1964년)입니다. 선생님은 교학부 최고간부에게도 의견을 물으시면서, 대성인 말씀의 일문일구(一文一句)에 모든 혼을 기울여 집필하셨습니다. 이 선배는 그 굉장한 모습을 옆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엔도] '선시초'는 '세계광선유포의 미래기(未來記)'라고 일컫는 중서(重書)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광선유포의 때에는 만민(萬民)이 일동으로 남묘호렌게쿄를 부를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이토] 바로 그 부분에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투쟁(大鬪爭)이 일염부제(一閻浮提)에 일어나리라."(어서 259쪽)라는 대성인의 말씀이 있습니다.

 정법에 눈을 뜨지 않는 사람들이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고, 방법(謗法)을 더욱 계속한다면 전대미문의 대투쟁이 전세계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곳에 있던 교학부 간부들은 이 말을 듣고,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라고 해석했다고 합니다. 사실 당시는 동서냉전, 핵군비 확대경쟁이라는 와중이었으므로, 그렇게 염려하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이케다 선생님이 엄연히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정말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원수폭 등에 의해 인류는 멸망하고 만다. 이전의 세계대전 이상의 비참함과 고뇌를 인류는 또다시 맛보아야만 한다. 그래서는 불법자(佛法者)로서 너무 무지비하지 않은가.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대미문의 대투쟁'이라고 결정하자. '어떤 일이 있어도, 제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게 하지 않겠다.' - 이렇게 어본존에게 강하게 기원하고, 사신홍법(師身弘法)을 서원하지 않겠는가. 광선유포라는 세계의 항구평화, 인류의 행복을 반드시 달성하지 않겠는가."

 그 이야기를 들은 선배는 참으로 감동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온갖 종말론을 주장하는 종교가 있습니다. 무책임하게 사람들의 불안을 부채질하고, 그중에는 종말을 기다리고 바라는 사람들조차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니치렌 대성인은 불법은 그것들과 완전히 정반대'라는 사실을 단호히 가르쳐주셨습니다."


[SGI 회장] 그렇습니다. 대성인의 불법은 어디까지나 평화의 불법입니다. '전 세계를 평화로!' - 이것이야말로 대성인이 지향하신 점입니다. 그러기 위해 '입정(立正)'을, 그러기 위해 '법화경'을 호소하셨습니다.

 '전쟁위기를 비롯해, 어떠한 고뇌의 현실도 반드시 변혁할 수 있다. 변혁해야만 한다.' - 이것이 대성인의 확신입니다. '입정안국(立正安國)'의 일념입니다.

 이 대성인의 마음을 이어받아, 학회는 전 인류의 행복을 위해 일어섰습니다.

 50년 전(1945년) - 도다 선생님은 제2차 대전 뒤의 초토(焦土)에 홀로 서서 외치셨습니다.

 "일본민족을 더 이상 참혹한 밑바닥으로 떨어뜨리지 않겠다." "누가 괴로움의 세계를 구제하고, 누가 도울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광선유포의 때이다."

 지금 대화하는 방편품에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실 이 '제법실상'이야말로 '현실변혁'의 원리입니다. 이 점을 노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엔도] 예. 꼭 부탁드립니다.


 '제법실상'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사색하고자 합니다.


현실의 제법에서 뗄 수 없는 실상


[사이토] 먼저 처음에 '제법실상'이 방편품에 어떻게 씌어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스다] 우리가 날마다 근행할 때 독송하는 부분입니다.

 "부처가 성취하신 바는, 제일 희유(稀有)하고 난해(難解)한 법이니라.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곧 능히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구진하셨느니라. 이른바 모든 법은, 이와 같은 상(相)*이와 같은 성(性)*이와 같은 체(體)*이와 같은 역(力)*이와 같은 작(作)*이와 같은 인(因)*이와 같은 연(緣)*이와 같은 과(果)*이와 같은 보(報)*이와 같은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이니라."(법화경 108쪽)


[사이토] 이 글의 앞뒤에는 "부처의 지혜가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가."라고 되풀이하여 나옵니다. 

 그 부처의 지혜에 대해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제법실상을 깊이 연구한 지혜'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실상이란 무엇인가?'가 '여시상, 여시성… 여시본말구경등'으로 이어지는 '십여시(십여실상)'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스다] 앞서 '개삼현일(開三顯一: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의 삼승을 열어 일불승을 나타냄)'에 대해 논했습니다.


 천태대사는 이 제법실상*십여시 앞뒤 부분이 '약개삼현일(略開三顯一)'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개삼현일이 '약(略)하여' 밝혀져 있다는 뜻입니다.


[SGI 회장] 부처가 출현한 까닭은 모든 사람들을 부처로 하고 위해서 입니다. 부처가 되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근본목적이고, 그 밖에 목표는 '방편'의 낮은 목표에 불과하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물며 명문명리 따위는 인생의 참된 목적이 아닙니다.

 '개삼현일'은 '부처의 진의를 밝힌 법리'이고, 동시에 '인생의 참된 목적을 밝힌 법리'입니다.

다만 '약개삼현일'이므로 여기서는 어렴풋하게만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대성인은 "잠에 취한 사람이 처음으로 두견새 우는 소리를 딱 한번 들은 것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울었지만,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웃음) '어렴풋하자.'(어서 208쪽, 취의)고 말입니다.

 하지만 부처가 분명히 '진의(眞意)'를 설했습니다. 대성인은 "부처는 약(略)해서 일념삼천*심중(心中)의 본회(本懷)를 말씀하셨느니라."(어서 208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제법실상*십여시의 글입니다.

 또 "일체중생 개성불도(皆成佛道)의 근원이라고 말함도 오직 이 제법실상의 사자(四字) 이외는 전혀 없느니라."(어서 1139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부처로'라고 주정하는 법화경의 뿌리는 바로 제법실상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스다] 고작 네 문자가 왜 일체중생이 성불하는 근원이 되는가. 어려운 곳은 그 부분이군요….


[엔도] 기본적인 의미부처 확인하고자 합니다.

 '제법'이란, 이 현실세계에서 여러 모습과 형태를 갖고 나타나는 '모든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상'이란 문자 그대로 '진실한 상', 다시 말해 '진리'라고 해도 좋겠지요. 천태대사는 실상의 '상(相)'이라는 글자에 대해 '진리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제불(諸佛)이 확실히 각지(覺知)한, 무너뜨릴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낸다."(<법화현의>)고 했습니다.


[SGI 회장] 볼 수는 없지만 엄연히 실재한다는 말이군요.


[사이토] 예. 그리고 '십여시'는 '십여실상'이라고도 하듯,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실상'을 바꾸어 말한 것입니다.

 '여시'는 '이와 같은'이라는 뜻이고, 각각의 현상과 개개의 생명(제법)에 대해 부처는 "이와 같은 상(여시상), 이와 같은 성(여시성), 이와 같은 체(여시체)…"라고 실상을 지견(知見)했다는 것입니다. 


[SGI 회장] 그렇습니다. '제법실상'이라고 씌어 있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진리(실상)에 영지(英智)를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수량품 제16장에도 "여래는 여실(如實)히 삼계의 상(相)을 지견(知見)하건데'(법화경 481쪽)라고 있습니다. 삼계는 현실세계입니다.

 현실세계(제법)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는 결심 - 이것이 부처의 마음입니다.

 동시에 '현실세계(제법)의 표면에 얽매이지 않고, 거기에 간직된 위대한 진실의 모습(실상)을 파악하여 가르치고, 열어간다.' - 이것이 불법의 지혜입니다.


 '제법실상'이라는 말 속에는 불법의 철저한 '현실주의'와 '현실을 뛰어넘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십여실상(十如實相)을 보는 부처의 눈


[스다] 잘 알겠습니다.

 이 십여실상 가운데 '상(相)'은 밖으로 나타나 분별할 수 있는 모습*형태 등, '성(性)'은 안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성질*성분*가능성 등입니다. 천태대사는 여시성의 구극은 불성(佛性)이라고 말했습니다. '체(體)'는 상과 성을 아울러 갖춘 주체입니다. 이 삼여시(三如是)는 제법 - 개개인의 생명 본체를 세가지 각도에서 본 것입니다.


[사이토] 일단 이 세가지에서 개개인의 생명과 통일적으로 파악하므로, 공(空)*가(假)*중(中)의 삼제(三諦)나 법(法)*보(報)*응(應)의 삼신(三身)에 적용되어 여러가지 법의(法義)가 세워집니다.


[스다] 십여시 가운데 '역(力)'은 색심(色心)의 잠재적인 능력입니다. '작(作)'은 그 힘이 색심에 나타난 작용입니다.

 또 인(因) 개개인의 제법 그 자체 속에 있는 변화의 원인, '연(緣)'은 변화로 얻게 되는 직접적 결과이고, '보(報)'는 결과에 의해 초래되는 과보입니다. 인*연*과*보이 네가지 를 총(總)하여 '인과(因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이토] 묘락은 "십여(十如)를 말하지 않으면 인과가 갖추어지지 않는다."(<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고 하면서, 십여시의 특상을 '인과'라고 파악했습니다.


[SGI 회장] 인과는 성불의 인과, 다시 말해 '부처가 되느냐, 안 되느냐.'에 관계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대성인은 십여시를 "색심(色心)의 인과"(어서 239쪽)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 어떤 생명(제법)도 각각의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에 '인과의 이법'이 갖추어지고,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한 실상을 부처는 있는 그대로 본 것입니다.


[엔도] 마지막은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이지만, 이것은 한편으로는 '여시상을 본(本)'으로 하고, 여시보를 말(末)로 하여 시종일관 동등하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지옥계는 지옥계로서, 불계는 불계로서의 통일성을 말합니다. 


[SGI 회장] 그러한 실상을 보는 것이 불안(佛眼)입니다.

 '감추어진 가능성(성<性>*역<力>)과 변화할 수 있는 개방성(인*연*과*보)을 지나면서, 더구나 통일성을 갖는다.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열리면서 통일성을 갖고 성립한다.' - 이것이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실상)입니다. 상세히 말하지는 않겠지만, 연기관(緣起觀)이나 삼제론(三諦論)에 통하는 관점입니다.


[스다] 대성인은 '제법실상초(諸法實相抄)'에서 "지옥은 지옥의 상(相)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실(實)의 상이요, 아귀로 변하면 지옥의 실의 상은 아니로다."(어서 1359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SGI 회장] '본말구경등'에 대해서는 더욱 높은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처가 깨달은 실상에서는 부처의 생명(본<本>)도, 구계의 중생의 생명(말<末>)도 결국(구경<究竟>하여) 묘법의 당체로서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중생도 자신이 묘법의 당체라는 실상을 깨달으면 부처가 됩니다. '자기 생명의 실상(묘법의 당체임)을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 이것만이 부처와 중생의 차이입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이라 함은 불성(佛性)*말이라 함은 미현(未顯)의 부처*구계의 이름이니라. 구경등이라고 함은 묘각구경(妙覺究竟)의 여래와 이즉(理卽)의 범부인 우리들과 차별이 없음을 구경등이라고도 평등대혜(平等大慧)의 법화경이라고도 하느니라."(어서 413쪽)


제법에 즉(卽)하여 실상이 발휘


[엔도] 제법실상의 네 글자가 '일체중생 개성불도의 근원'이라고 대성인이 말씀하신 의미를 조금 알겠습니다. 제법실상은 '제법에는 여러 차별(차이)이 있지만, 그 실상은 평등하게 묘법의 당체이다.'라는 뜻이군요.


[SGI 회장] 그렇습니다. 실상이란 무명(無明)을 극복한 부처의 깨달음에서 바라본 '생명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거기서는 일체가 평등합니다. 그리고 주체와 객체, 자신과 타인, 마음과 신체, 마음과 물질 등 일체의 차이와 차별을 초월합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십계의 차별도 초월합니다. 광대하게 펼쳐진 '영원한 생명'의 세계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약동이고, 지혜이고, 자비이고, 자비입니다. 또 불이(不二)의 생사(生死)이고, 법칙입니다. 대우주로 넓혀져도 대우주가 너무 넓다는 것도 아닙니다. 소립자에 머물러도 소립자가 좁아 곤란하다는 것도(웃음) 아닙니다.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고(思考)도 뛰어넘는, 그야말로 불가사의하여 '묘법(妙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세계입니다.

 부처는 이러한 생명의 세계야말로 십계의 중생(제법)이 갖고 있는 생명의 정당한 모습(실상)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요컨대 '제법(십계)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제법실상… 본말구경등"의 경문의 의의를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하지옥(下地獄)으로부터 상불계(上佛界)까지의 십계의 의정(依正)의 당체가 모두 일법(一法)도 남김없이 묘호렌게쿄의 상(相)이라고 하는 경문이니라."(어서 1358쪽)

 지옥계부터 불계까지의 중생(정보<正報>)도, 그 중생이 사는 세계(의보<依報>)도 실은 모두 '묘호렌게쿄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제법'은 무수하지만, 모두 '십계의 의보와 정보'에 포함됩니다. 그것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묘호렌게쿄의 모습'으로서 동등하다(본말구경등)고 보는 것이 '실상(實相)'을 보는 것입니다.

 십여시도 이것을 설명하고자 한 법리입니다.

 대성인은 "십여시라 함은 묘호렌게쿄이니라."(어서 415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법계(法界)의 상(相)이 묘호렌게쿄의 오자(五字)와 다름이 없느니라."(어서 1358쪽)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우주 전체가 '묘호렌게쿄의 모습'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우주생명 그 자체가 남묘호렌게쿄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법실상을 보면 인간도, 초목도, 태양도, 달도 '묘호렌게쿄'의 모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삼라만상은 '묘호렌게쿄'의 율동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알기 쉽게 정리해서 말하면 '제법은 개개인의 생명'이고, 그 제법의 실상은 '하나의 커다란 우주 생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무수한 많은 개개인 생명은 각각의 '색심의 인과'에 준하고, 천차만별한 다채로운 생명의 곡을 연주합니다. 그 곡은 표면적으로는 각자 멋대로 연주하는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분관(部分觀)입니다.

 그 실상은, 모든 곡이 정리되어 묘법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교향악(교향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각각 완전하면서도 게다가 모든 곡들은 묘법이라는 우주생명의 교향곡에 없어서는 안 될 곡입니다. 물론 이것은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예를 들면 "지옥계라면 지옥계의 중생도 자신의 진실한 모습(실상) 다시 말해 '그대 자신'을 알면, 실은 빛나는 우주생명과 일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그 우주생명은 다름아닌 지옥계라는, 자신의 현실에 즉(卽)해서 개현(開顯)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상'이라는 영원한 생명세계는 언제, 어디에 있는가. '지금' '여기에' 있다. - 이것이 깨달으면 부처, 깨닫지 못하면 구계입니다. 그러므로 보살계는 불계에 가까운 것도 아니며, 지옥계가 불계에서 먼 것도 아닙니다. 평등하게 자신에게 즉해서 불계를 열 수 있습니다.

 '개개인의 생명(제법)'은 즉 '우주생명(실상)'입니다. 게다가 '우주생명(실상)'이라 해도 '개개인의 생명(제법)'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제법실상의 생명의 세계'를 대성인은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마음은 즉 대지(大地)*대지 즉 초목(草木)이니라."('백미일표어서, 어서 1597쪽)

 '마음'은 우주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화경 이전의 경전에서는 아직 철학이 얕기 때문에, '마음(우주생명)에서 만법(개개인의 생명)이 출생한다.'는 식으로 성명했습니다. 마음은 대지와 같고, 만법은 초목과 같다고 말입니다. 마음과 만법이 별개입니다. 하지만 법화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곧 대지이고, 대지는 곧 초목입니다. 실상과 제법은 일체입니다. 나눌 수 없습니다. 달도, 꽃도 하나하나가 우주생명의 전체와 하나입니다.


 "달이야말로 마음이며, 꽃이야말로 마음"(어서 1597쪽)입니다.


[사이토] 대부분의 철학이 '현상(現象)의 오저(奧底)'에서 진리를 보려고 하거나, '현실의 근저'에서 근원의 *일자(一者)를 세우거나 했습니다. 하지만 법화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백미일표어서'에는 "진실의 길은 세간(世間)의 사법(事法)입니다."(어서 1597쪽)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세간의 사법'이라는 현실(제법)에 즉해야만 '참된 길', 다시 말해 '실상의 지혜'가 발휘됩니다.


[엔도] 법화경 법사공덕품 제19장에는,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에게는 육근(六根: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이 청정해지는 공덕이 있다고 씌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의근(意根)이 이렇게 나옵니다.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이 설하는 것은 모두 실상과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세간의 책이나 세상을 다스리는 언어, 경제활동을 설해도 모두 정법에 들어맞는다."(법화경 549쪽, 요지)

 이를 받아 천태대사는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치생산업(治生産業)은 모두 실상(實相)과 서로 위배하지 않는다."(<법화현의><마하지관>)고 말했습니다.



[SGI 회장] 법화경의 위대한 공덕입니다. 또한 법화경을 믿는 사람이 본래 지녀야 할 모습입니다. 법화경을 믿는 사람은 선은 선, 악은 악으로서 올바른 것을 설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실상과 어긋나지 않게 됩니다.


현상(現象)을 통해 본질을 알다


[엔도] 차원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중국의 고전에 "일엽낙지천하추(一葉落知天下秋: 잎 하나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법실상으로 굳이 바꿔놓으면, '잎 하나가 떨어지는 모습'은 제법, '가을'은 실상이 아닐까 합니다.


[SGI 회장] 보이지 않는 '가을(실상)'은, 보이는 '잎 하나(제법)'에 자신을 비춥니다. 제법이 실상으로 나타납니다. 또 제법으로 나타나지 않는 실상은 없습니다.


[스다] 제법을 보고 실상을 아는 지혜는 학자나 예술가, 장사에 능숙한 사람, 가정을 꾸려 나가는 총명한 어머니 등, 각자 부분적으로는 갖고 있지 않을까요.


[SGI 회장] 당연히 그렇습니다. 법안(法眼)*불안(佛眼)에 이르지는 못해도, 혜안(慧眼)*천안(天眼)이 있습니다.

 뭐라고 해도 도다 선생님은 예리하셨습니다. 현상을 통해 본질을 간파하는 천재이셨습니다. 선생님과 같은 지도자는 달리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 화제가 되었던 '일본의 패전과 황폐한 모습' - 이것은 제법이다. 그 모습을 보고 선생님은 '대불법홍통의 때'라고 외치셨습니다. 이야말로 제법실상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정치*노동*문화*경제*교육 등 각계가 모두 자계반역(自界叛逆)의 모습을 보이고, 오탁악세(五濁惡世)라는 이름대로 진흙탕에서 꿈틀거리는 듯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일국방법(一國謗法)의 총벌(總罰)이라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엔도]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셨을까요?


[SGI 회장] 정계에서는 조각(組閣)이나 장관자리를 둘러싼 내부분열, 노동계에서는 일반조합원에서 유리된 지도자층, 문화면에서는 건전한 문화육성을 가로막는 학벌다툼 - 등을 꼽으셨습니다.


[스다] 그런 경향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문제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점입니다.


[SGI 회장] 그렇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원래 모든 기구(機構)는 서로 다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인류의 복지를 위해 생각되고 채용된 것이다."


[사이토] 전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SGI 회장]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전혀 반대의 기능을 하는 장(場)이 되고 만 까닭은, 온 나라가 정법을 반대하고, 정법을 설하는 자를 박해하여 모조리 비방정법(誹訪正法)의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니치렌 대성인의 입정안국(立正安國)이라는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엔도] 대성인은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에서 '인간의 근본인 사상과 종교가 어지러워지고, 그것을 방임한 채 정법에 눈뜨지 않는다면 그 혼란은 반드시 국토와 사회에 반영될 것이다.'라고 경문에 비추어 경고하셨습니다.


[SGI 회장] 사상과 종교의 혼란이란, '제법실상'을 볼 수 없는 지혜의 혼란입니다. 나아가서 생명의 혼란입니다. 의정불이(依正不二)가 실상이므로, 그 '정보'의 혼란이 '의보'인 사회와 국토에도 부조화를 일으킵니다.


[스다] 삼재칠난(三災七難)이군요.


[SGI 회장] 대성인은 당시는 가벼운 난에서 무거운 난으로 차례차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천변지요(天變地夭). 권력다툼에 따라 내란이 발생하는 자계반역난(自界叛逆難). 그리고 마지막은 몽고가 침략해온 '타국침핍난(他國侵逼難)'이라는 최대의 난이었습니다.

 때는 바뀌어, 도다 선생님은 "지금 광선유포의 때를 맞이해 난이 나오는 방식이 대성인 재세(在世) 때와는 반대순서로 나오고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요컨대 처음에는 미증유의 대패전이인 '타국침핍난', 그리고 각계의 분열과 다툼에서 볼 수 있는 '자계반역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묘법을 위배한 죄 때문에 나오는 병은, 묘법에 귀의해야만 치유됩니다. 그러므로 전 민중의 행복을 위해서는 묘법의 광선유포밖에 없다고 외치셨습니다.


[스다] 도다 선생님은 경전과 대성인의 말씀에 비추어 민중의 앞날을 걱정하고, '전쟁 후 사회'라는 제법실상을 통찰하셨습니다. 


[SGI 회장] 그렇습니다. 가깝게는 광선유포의 대전진이 틀림없다는 하나의 증거(제법)로서, '교통수단'의 발달을 자주 예로 드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씀대로였습니다.


 어쨌든, 제법실상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변혁'하는 철리입니다. 고뇌가 가득한 현실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달아나지 않습니다. 그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불계 생명을 개발하고, 세계의 안온을 실현하는 지혜입니다.


'제법실상'과 '일생성불'


[엔도] '제법실상'을 실현화는 일은 개인으로서는 '일생성불'을, 사회에서는 '입정안국'을 실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SGI 회장] 그렇습니다. '일생성불'이란 이 현실의 금세(今世)에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성불이라고 해도 무엇인가 고정적인 도달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한복판에서 고투하는 그 모습 그대로, 부처의 경애를 여는 것입니다.

 고뇌하는 경애에서 부처의 경애로, 그리고 부처의 경애에서 현실의 변혁으로, 이렇게 언제나 출발하는 '강한 신심', 계속 투쟁하는 '강한 신심' - 거기에만 불계가 있습니다.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에는 "말대(末代)의 범부가 출생하여 법화경을 믿음은 인계에 불계를 구족(具足)하기 때문이니라."(어서 2412족)라고 있습니다.



[스다] 니치칸 상인도 "법화경을 믿는 마음이 강함을 이름하여 불계라고 한다."('삼중비전초<三重秘傳抄>')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심'으로 '제법실상'이 실현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태대사와는 크게 다릅니다.


[SGI 회장] 그렇습니다. 천태대사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고 하여, 제법실상의 심리(心理)를 사색하고 분명히 실감하는 수행방법을 취했습니다. 명상이 중심적인 실천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어렵기 때문에, 누구나 올바르게 수득(修得)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확실한 지도(地圖)와 나침반 없이 밀림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대부분 길을 잃습니다.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적겠지요.

 이에 비해 대성인 불법의 수행은 어떠한가.

 "일념삼천의 관념(觀念)도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관법(觀法)도 묘호렌게쿄의 오자(五字)에 포함되었으며, 묘호렌게쿄의 오자는 또 우리들의 일심(一心)에 포함돼 있느니라."(어서 414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일념삼천의 법문(法門)을 흔들어 헹궈 세운 것이 대만다라(大曼陀羅)이니라."(어서 1339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념삼천의 '일념'은 실상, '삼천'은 제법입니다. 어본존은 제법실상의 어본존이고, 일체중생의 제법실상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중앙에 '남묘호렌게쿄 니치렌'은 실상을 나타내고, 좌우의 십계는 제법을 대표합니다.

이 제법실상의 어본존을 향해 부르는 묘법의 음성은 자기 몸의 불성을 부릅니다. 불린 불성은 밖으로 나타나려고 합니다. 그러면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흉중에 '불계의 십여시'라는 태양이 떠오릅니다. 본유(本有)의 파란 하늘이 엄연히 자기 가슴에 펼쳐집니다.

 어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제법)이 묘법의 당체(실상)으로 빛납니다. 그야말로 만인에게 열린 '일생성불'의 수행법입니다.


 밖에 있는 어본존도 '묘호렌게쿄'. 내재하는 나의 일심(一心) '묘호렌게쿄'. 어본존을 '믿는' 것이 동시에 자신의 제법실상을 깨닫는 '지혜'가 됩니다. 이신대혜(以信代慧: 신<信>으로써 지혜를 대신하다.)


[스다] '일생성불초(一生成佛抄)'에는 "묘법(妙法)이라고 부르고 연화(蓮華)라고 읽을 때에는 나의 일념을 가리켜서 묘호렌게쿄라고 이름한다고 깊이 신심(信心)을 일으켜야 하느니라.'(어서 383쪽)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제법)이 묘호렌게쿄(실상) 그 자체라는 말씀입니다.


[사이토)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나의 몸의 체성(體性)을 묘호렌게쿄라고 말한 것이므로 경(經)의 이름이 아니고 이미 나 자신의 체(體)라고 알았기에 자신이 그대로 법화경이며 법화경은 나 자신의 체(體)를 불러 나타내시는 부처의 말씀이시므로 다름아닌 나의 몸이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인 것이니라."(어서 411쪽)

 '묘호렌게쿄란 경전의 이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기자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묘호렌게쿄는 본래의 자신(자신의 실상)을 불러 나타내는 부처의 말씀이다.'라는 뜻입니다.


[스다] 그것을 마음의 오저에서 알면 어떻게 변하는가. 대성인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깨닫는다면 무시(無始)로부터 이래 지금까지 항상 생각해온 그릇된 망상은 어제의 꿈을 생각하듯이 형적(形迹)도 없이 되어버리는 것이니라."(어서 411쪽) - '지금까지 줄곧 자신은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믿고 있던 착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마치 어제의 꿈처럼.'


[엔도] 그 모습은 마치 달을 덮고 있던 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달이 빛나기 시작하는 모습과도 같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어서 414쪽). 제법실상을 알면, 실은 부처도 중생도 '하나'이고,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모르면 제법실상이라고 해도 관념론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SGI 회장] 도다 선생님은 알기 쉽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병 등으로 괴로워하던 사람도 어본존님을 수지함으로써, 결국 근본적으로 아주 안심하는 생명으로 변한다. 근저가 안심하게 되고, 비로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워진다. 살아 있는 자신이 즐겁다고 해도 구계를 갖추고 있으므로, 때로는 괴로워하는 일도 있고 괴로움이 바뀌는 일도 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일로 괴로워했지만, 남의 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절대적으로 즐거운 것이 부처가 아니겠는가."

 인생에는 고(苦)도 있는가 하면 낙(樂)도 있습니다. 신심이 깊으면 그들 제법(모든 현상)이 모두 불계의 십여시를 강하게 하도록 작용합니다. '고락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경애가 됩니다. 대성인이 제법실상의 어본존을 도현하신 일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 전대미문의 일이신가. 감사의 마음에 가슴이 벅찹니다.


[스다] 그러고 보니 대성인은 제법실상에 대해 나타낸 주요 어서에서, 어본존에 대한 신심을 반드시 '실천'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SGI 회장] 참으로 중요한 점을 깨달았군요.


[스다] 예를 들면 '제법실상초(諸法實相抄)'에는 "일염부제(一閻浮提) 제일의 어본존을 믿으실지어다." "행학(行學)의 이도(二道)를 힘쓸지어다."(어서 1361쪽)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니치뇨부인답서(日女夫人答書)'에는 "남묘호렌게쿄라고만 봉창(奉唱)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라. 신심의 후박(厚薄)에 달려 있으며, 불법의 근본은 신(信)으로써 근원으로 하느니라."(어서 1244쪽)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SGI 회장] 대성인의 불법의 근본은 '신심'입니다. 신(信)을 근본으로 하는 '여설수행(如說修行)'입니다.


제법실상의 본의(本義)와 실천


[사이토] 대성인 당시의 천태종은, 같은 법화경을 믿으면서도 이 '수행'을 간과했습니다.

 "중생은 본래 부처이다. 그대로 부처이므로 어떠한 욕망도, 어떠한 현실도 그대로 긍정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SGI 회장] 제법실상의 곡해(曲解)입니다. 

 수행포기이고, 현실추종입니다.

 제법실상은 단조로운 '제법=실상'이 아닙니다.

 제법즉실상, 실상즉제법. 그 즉(卽)은 '같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대성인은 '즉(卽)의 일자(一字)는 남묘호렌쿄이니라."(어서 732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순간도 정체하지 않고, 현현(顯現)하고, 명복(冥伏)하고, 창조하고, 확대해 마지않는 생명의 역동성이 '즉'이라는 한 글자에 담겨 있습니다.

 제법즉실상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부처가 바라보는 구극의 진리입니다. 미혹의 범부가 보는 현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진리'의 실현을 향해 끊임없이 '현실'을 뛰어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변혁'입니다.

이 도전을 잊으면 사람은 제법실상이라는 훌륭한 법리를 방패막이로 삼아 현실에 매몰되어, 무기력해져 버립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무기력은 권력자를 제멋대로 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자 쪽에서 보면 이렇게 지배하기 쉬운 존재도 없습니다. 그 어떤 비참한 현실이 있어도 그 현실을 민중이 긍정하고 받아주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그 반대로, 생명의 길을 위배하는 권력자를 책하는 것이 제법실상의 지혜입니다. 그 점은 대성인의 실천을 보면 분명합니다.


[엔도] 천태종은 법화경의 '개회(開會)' 법문을 곡해한 나머지, '무엇인가 공덕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떠한 가르침도 진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염불(念佛)도, 진언(眞言)도, 선(禪)도 모두 법화경이다. 그렇게 믿는 것이 수행이다."라고 말입니다.

 대성인은 "당세(當世)*천태종(天台宗)이 개회(開會)의 법문(法門)을 말함도 이 경문(經文)을 그릇되게 이해하여 사의(邪義)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외다."(어서 1139*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다] 이른바 '본각사상(本覺思想)'이군요. 대성인은 이러한 사의(邪義)와 엄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이라 함은 제승(諸乘) 일불승(一佛乘)이라고 개회하고 나면 어느 법도 모두 법화경으로서 승렬천심(勝劣淺深)이 있을 수 없느니라. 염불을 부름도 진언을 갖는 것도 선을 수행함도*통틀어 일체(一切)의 제경(諸經) 및, 불보살의 명호(名號)를 수지하고 부름도 모두 법화경이라고 믿는 것이 여설수행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어서 502쪽)라고 그들의 주장을 예로 든 다음, "그렇지 않노라."(어서 502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SGI 회장]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어떠한 가르침도 다 똑같다.' - 이러한 종교자의 교만과 태만이 지금 일본의 정신풍토를 만들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이토]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사(正邪)의 엄한 구별을 꺼리고, 안이한 화(和)에 녹아 듦으로써 보신을 꾀합니다. 그런 '공모(共謀)'를 '관용'이라고 착각합니다.


 강력한 현실에는 언제나 추종하고 굴복합니다. 그 때문에 권력자와 맞서 싸우는 민중에 대해서는 권력자의 앞잡이가 되어 봉쇄하려고 합니다. 또는 방관하고 정의를 묵살함으로써 악에 가담합니다. 본인들은 잘 살아남으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권력의 마수에 혼까지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스다] 이러한 '이상이 없는 현실주의'만큼 인간을 하찮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엔도] 또 본각사상과 반대의 의미에서 극단적인 것이 염불사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닌, 죽어서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나 행복해진다고 주장합니다.

 현세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면, 내세에 행복해진다는 보증이 어디에 있다고 말는지 모르겠습니다. 염불을 추구할수록 현세에서 노력하기보다는 빨리 내세로 가는 쪽이 좋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현실도피, 현실부정의 종교입니다.


[사이토] 또 선종 등은 사회현실과 자신을 분단시키고, 자기만의 작은 세계에 틀어박히는 경향이 강합니다.

 

[SGI 회장] 이들에 대해 '제법실상'을 깨달은 부처는 어떤 부처인가. 대성인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말구경(本末究竟)이라고 함은, 본이란 악의 근본*선(善)의 근본, 말이라 함은 악의 종말*선의 종말이로다. 선악의 근본 지엽(枝葉)을 깨달아 구명(究明)함을 부처라고 하느니라."(어서 1466쪽)

 현실인 이 세상의 선과 악을 간파하여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제법실상의 지혜로운 실천입니다. 이 말씀 바로 다음에 대성인은 "지자(智者)란 세간(世間)의 법(法)이외에 불법(佛法)을 행하지 않는다."(어서 1466쪽)고 하시고, 불법 이전의 사람일지라도 민중의 괴로움을 구제한 사람은 '교주석존의 사자(使者)로서' '내심(內心)에는 불법의 지혜를 간직하고' 행동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1466쪽).

 교조적(敎條的)이 아닌 넓디넓은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매몰하는' 현실추종.

 '이 세상을 외면되는' 현실거부.

 '저 세상으로 도망치는 '현실도피-.

 법화경은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대성인은 예로부터 내려온 천태종을, 또 선종과 염불종을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제법실상에 어긋납니다.

 법화경의 제법실상은 "현실을 변혁하는' 철학입니다.


 운명론에는 따르지 않습니다. 체념에도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런 무력감들을 떨쳐버리는 '발판'을 개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꾸는 것이다.'라고 투지를 세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계속 자문하는 책임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제법실상은 '도전하는 마음'


[엔도] 그 말씀을 들으니.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혁명은, 이윽고 한 나라의 숙명(宿命)도 전환하고 나아가 전 인류의 숙명전환도 가능케 한다."는 이케다 선생님의 소설<인간혁명>의 테마가 생각납니다. 이것은 법화경의 지혜 자체이고, 대성인 불법의 근본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SGI 회장] 나는 '도다 선생님의 제자'입니다. 거기에 나의 근본적인 긍지가 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옥중에서 법화경을 신독(身讀)하셨습니다. '법화경을 알았다.'고 주장만 하는 종교자라면 그 외에도 있었겠지요. 교조(敎祖)까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다 선생님은 다릅니다. 신문기자들이 "당신은 부처님입니까?"라고 묻자, "훌륭한 범부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좌절과 소생의 드라마를 연기하는 민중의 무리를 껴안으면서, 폭풍우의 한복판에서 엄연히 일어서 계셨습니다.

 인간혁명 - 선생님의 인생 자체입니다.

 인간혁명 - 선생님은 이 한마디로서, 종교가 빠지기 쉬운 독선의 함정을 타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불법의 최고지혜와 인간의 최고 삶, 사회의 최선의 길을 훌륭하게 합치시켰습니다.



[스다] '일생성불'과 '입정안국'을, 한마디 말로서 현대의 언어로 나타내셨다고 생각합니다.


[SGI 회장] 인간혁명은 결국 사회혁명*환경혁명이 됩니다.

 '제법실상초에서 대성인은 묘략의 <법화문구기>에 나오는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항상 묘경(妙境)을 말함이라."(어서 1358쪽)라는 석(釋)을 예로 드시고, "의보(환경세계)도, 정보(주체가 되는 생명)도 언제나 묘호렌게쿄를 나타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태도 "국토에도 십여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의보다, 정보도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불이(不二)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변혁이 국토*사회의 변혁에 통한다는 원리가 생겨납니다.

 제법실상이라는 불안(佛眼)으로 보게 되면 삼라만상은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정보만의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의보만의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만의 행복도 없고, 타인의 불행도 없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준 만큼 자신도 행복해진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한, 나 자신의 행복도 완전하지 않다.' - 이러게 보는 것이 제법실상입니다.

 그러므로 '현실변혁을 향한 한없는 도전'이 제법실상의 마음입니다.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을 쓰신 심경을 "다만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법을 위하며 사람을 위해서이지 자신을 위해 이를 말함이 아니로다."(어서 35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대난의 폭풍우도 이 민중구제를 위한 불꽃을 꺼뜨리지는 못합니다.

 이 정신을 이어받아 '입정안국'의 깃발을 드높이 내거신 마키구치 선생님은 옥중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패전의 황야에서 홀로 일어서셨습니다.

 "법화(法華)의 심(心)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니라."(어서 773쪽)

 민중의 고뇌에서 구제하기 위해 불법이있습니다. 창가학회가 있습니다. 인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창가학회는 투쟁합니다. 이것 이외에 존재 의의는 없습니다.

 그 학회와 함께 전진하는 인생은 얼마나 위대한가. 얼마나 존귀한가.

 제법실상의 눈으로 보면 '지금' '여기'가 본유(本有)의 무대입니다. 본무대입니다. "이곳을 떠나서 저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니라."(어서 781쪽)입니다.

 '숙명'이라고도 생각되는 듯한 곤란한 무대도 모두 본래의 자기 '사명'을 완수해야 할, 둘도 없는 장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법실상의 지혜를 안 사람의 인생은 그 어떤 숙명도 빛나는 사명으로 전환합니다.'


 그렇게 확신하면 희망이 솟아납니다. 만나는 사람들, 접하게 되는 경험 모두가 더없이 소중한 '보물'이 됩니다.

타고르는 노래했습니다.

"이 세상은 맛이 깊고, 대지의 먼지까지 아름답다."

타고르는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렇게 썼습니다. 

 "얘야, 네게 예쁜 빛깔의 장난감을 가지고 올 때, 어머니는 알고 있단다. - 구름과 물에 왜 저토록 아름다운 색채의 유희가 있는지, 왜 꽃들이 가지각색으로 물들어 있는지를, 얘야, 네게 예쁜 빛깔의 장난감을 줄 때.

 너를 춤추게 하려고 노래할 때, 어머니는 정말 알고 있단다 - 왜 나뭇잎 속에 음악이 있는지, 왜 파도들이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는 대지의 심장에 온갖 소리의 합창을 보내는지를, 너를 춤추게 하려고 노래할 때."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에는 선명한 색깔의 세계가 빛납니다. 생기발랄 한 생명의 음률이 올립니다. 사랑은 생명의 개별성을 초월해, '불이'라는 생명의 실상을 향해 마음을 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 인류를 자애로 감싸려는 우리의 인생에는 얼마나 훌륭한 생명의 광채와 음악이 가득 넘치겠는가.

 '제법실상'이라고 확신하면, 지금 있는 이 장소가 '상적광토(常寂光土)'입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절대적으로 즐겁다."


 도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 대환희의 세계를 현실의 대지에서 만들어 넓혀간다.' - 법화경은 그 화려한 '도전하는 인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법화경의 지혜 <상권> 제2장 방편품 218-2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