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선집(指導選集)-2016.1월호
이케다 SGI 회장 지도선집(指導選集)
행복과 평화를 창조하는 지혜
- 제2부 인간혁명의 실천-
제16장 하루하루를 소중히
이 장을 읽기 전에
이케다(池田) SGI 회장은 <젊은 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1954년 8월 6일, 스물여섯 살 때 쓴 일기입니다.
"(도다<戶田>)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갔다. 선생님은 사색에 잠긴 유유한 모습이셨다. 존귀한 모습이다.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에 성스러움을 느낀다. '다이사쿠, 지금이 임종의 순간이라면 침착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말씀하셨다."
훗날 SGI, 회장은 스승과 나눈 그날의 대화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의 예리한 그 한마디는 아직도 내 귓가에 떠나지 않습니다. 나는 스승에게 늘 가슴을 펴고 보답하고 싶다고 청춘 시절에 맹세한 대로 진지하게 꿋꿋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만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오늘이라는 날은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소중히! 하루하루를 정성껏! 하루하루를 진지하게! 이 사람과는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온 힘을 다하자! 그 사람을 최대로 소중히 하자!
'임종(臨終)이 지금'이라고 일념을 정한 사람이야말로 후회하지 않는 황금과 같은 인생을 상쾌하게 장식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용감하게 있는 힘을 다해 꿋꿋이 산다, 이 착실하고 성실한 삶에 인간혁명의 실천이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황금 같은 하루하루를 장식하기 위해 여러 각도에서 불법자의 삶을 조명한 SGI 회장의 지도를 소개합니다.
(16-1) "일생을 헛되이 보내고 만세에 후회하는 일 없을지어다"
불법자의 하루하루는 삼세(三世)의 행복을 결정짓는 영원히 이어지는 소중한 하루하루입니다. 이 절(節)에서는 그 하루하루를 결코 후회 없이 총명하게 꿋꿋이 사는 길을 제시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간사이대표자회의 스피치에서 (1992년 5월 18일)
오늘 아침에 여자부 대표들과 산책하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대화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日蓮大聖人)은 "교주석존(敎主釋尊)의 출세의 본회(本懷)는 사람의 행동에 있었소이다."(어서 1174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한 인생, 현명한 인생을 영위하는 '사람의 행동'은 어떤 것일까요. 대성인은 또 이렇게도 가르치셨습니다. "일생을 헛되이 보내고 만세(萬歲)에 후회하는 일 없을지어다."(어서 970쪽) 이 소중한 '금세(今世)'를 절대로 헛되이 보내면 안 됩니다. '영원히 후회를 남기는 삶을 살면 절대로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락보다 충실'한 인생을 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재미있고 즐겁게 사는 듯해도 '충실'하지 않으면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의욕'이 없고 '허무함'이 남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또 향락보다 향상'을 추구해야 합니다. 향상하는 사람은 깊이가 있습니다. 매력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체념보다 진지' '퇴전보다 용맹'한 사람이 더 상쾌합니다. '만심보다 자비' '두려움보다 용기' 있는 그 행동에 불법이 있습니다. 계속 말하겠습니다. '정체보다 전진' '불화보다 단결' '비관보다 환희' '망설임보다 투쟁' '낙담보다 미소'를.
학회야말로 정법(正法)을 홍통하는 용자(勇者)들의 모임입니다. '사교(邪敎)와 야합하느니 정의를 외치는 대합창을 하자'는 것이 대성인이 가르치신 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는 '우울보다 명랑' '질투보다 격려' '분노보다 정열'을 안고 엄연히 나아갑니다. '권위보다 포용' '비탄보다 희망' '불평보다 행동' '폭력보다 대화'를 의연하게 꿋꿋이 삽니다.
'체념보다 도전' '비난보다 승리' 이렇게 자신과 싸우며 똑바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충실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인지다. 게다가 지금 하는 투쟁이 금세뿐 아니라 자신의 삼세까지 결정합니다.
(16-2) "현재의 과(果)를 보라" "현재의 인(因)을 보라"
SGI 회장은 "지금 자신의 경애를 높이면 과거의 인(因)은 악인(惡因)이 아니라 선인(善因)이 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아니 과거까지도 바꿀 수 있습니다." 하고 가르칩니다. 인간혁명의 실천은 늘 '지금'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데에 있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SGI총회, 사이타마총회 스피치에서(1992년 11월 14일, 도쿄)
대성인은 "삼세각별(三世各別)은 있을 수 없느니라."(어서 1360쪽) 즉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라 해도 각기 다른 것이 아니다.(반드시 인과<因果>의 이법<理法>에 따라 계속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개목초>에서는 "과거의 인을 알려고 하면 그 현재의 과를 보라. 미래의 과를 알려고 하면 그 현재의 인을 보라."(어서 231쪽) 즉 "과거에 자신이 어떠한 인을 만들었는지 알고자 한다면 그 현재의 과를 보라. (마찬가지로)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 과를 알고자 한다면 그 현재의 인을 보라."는 유명한 경문을 인용하셨습니다. 불법에서는 현재, '지금' 이 순간의 생명에 과거의 인과 미래의 과를 갖추었다고 봅니다. 인과구시(因果俱時)라 하여 '순간'의 생명에 '영원'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일념삼천(一念三千)을 설하는 묘법(妙法)의 가르침은 생명과 우주의 불가사의한 법을 명확하게 설합니다.
부처를'여래(如來)'라고 하는데, '여여(如如, 있는 그대로의 모습)로서 온다'의 경우는 순간순간 지혜가 약동하는 생명의 당체(當體)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중요합니다. '언젠가'가 아닙니다. 늘 '지금' 바로 신심을 심화하자, 숙명전환하자는 진지한 신심에 행복의 '인'을 쌓고 '과'를 갖추게 됩니다. 지금 함께 세계광포를 위해 싸우는 불가사의한 '과거의 인행(因行)'과 굉장한 '미래의 과덕(果德)'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16-3) "임종이 지금"
<생사일대사혈맥초>에는 "결국 임종이 지금이라고 알아서 신심을 다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을 '시인명종위천불수수(是人命終爲千佛授手), 영불공포(令不恐怖) 불타악취(不墮惡趣)'라고 설하셨느니라."(어서 1337쪽)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의 궁극적인 자세를 말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생사일대사혈맥초>강의에서 (1977년 4월 '세이쿄신문' 게재)
"임종이 지금이라고 알아서"라는 말은 단순히 각오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알아서'란 사실 그대로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생명의 참된 모습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누구나 자기 인생은 앞날이 창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제 죽음이 덮쳐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잠시 뒤에 이미 죽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참된 모습입니다.
하물며 예를 들어 아직 20년, 30년 혹은 50년을 더 살 수 있다고 해도 영원에서 보면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 또한 '임종이 지금'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지금 이렇게 살아서 불법을 수지한 그 무게를 절실히 느낄 것입니다. 눈앞의 부귀영화나 금생(今生)의 명문명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겁의 미래를 위해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복운을 쌓기 위해 인생의 참된 목적을 응시하며 한결같이 신심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신심의 궁극적인 자세입니다.
그럼 그렇다고 해서 불법자이자 사회인인 우리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광선유포라는 위대한 목적을 향해 신행(信行)에 힘쓰면 모든 것이 묘법(妙法)을 근본으로 살아납니다. 그것이 '임종이 지금'이라고 깨달은 우리 삶입니다.
순간순간 계속 이렇게 결의하면 '천불수수(千佛授手), 영불공포(令不恐怖) 불타악취(不墮惡趣)'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천불이 손을 내밀어준 것과 같이 안심입명(安心立命)한 경지가 되어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등과 같은 악취(惡趣)에 떨어지는 일도 없어집니다.
"시인명종위천불수수(是人命終爲千佛授手)"라는 글월은 먼저 일생의 마지막, 죽는 순간에 이렇게 된다는 말인데 또 살아 있는 동안 순간순간의 경애를 말씀하신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임종이 지금"은 지금 모든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광선유포를 위해 일생성불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연소해 끝까지 투쟁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과 불법대화를 나눌 때도 지금을 놓치면 언제 또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이 사람이 숙명전환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진지하게 대화한다면 그 인생은 이미 임종이 지금이라는 정신에 통하지 않을까요.
어본존에게 창제를 할 때도, 교학을 배울 때도, 격려 편지를 쓸 때도 순간순간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일생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이 쌓여 만들어집니다. 오늘을 알차게 보내지 못하는 사람이 내일 꽃을 피울 수는 없습니다. 순간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리 백년대계를 말한다 해도 그림에 떡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인(因)도 미래의 과(果)도 지금 이순간의 제법실상(諸法實相)에 응축되어 있고, 그 순간의 전환이 구원부터 쌓은 과거의 죄장(罪障)도 소멸하고 미래로 이어질 영겁의 복운도 결정합니다. 그 열쇠가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을 확립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달렸다는 숙명전환의 원리를 가르치는 어서라고 배견됩니다.
(16-4) 매일이 구원원초
<법화경의 지혜>에서는 부처의 영원한 생명을 설한 '구원원초(久遠元初)'라는 법리를 논하며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구원원초'이고 늘 지금이 시작이라는 본인묘(本因妙)의 신심을 가르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법화경의 지혜>에서 (제5권, 1999년 발간, 제6권, 2000년 발간)
'구원원초'란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생명'을 달리 부르는 말입니다. 시간론이 아니라 생명론입니다. 생명 오저의 진실, 무시무종에 걸쳐 계속 활동하는 우주 생명 그 자체를 가리켜 '구원원초'라고 부릅니다.
대성인은 "구원이란 작용하지 않고 꾸며 갖추지 않고 본래 있는 그대로라는 의(義)이니라."(어서 759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용하지 않고'는 도중에 만든 것이 아니라 본디부터 있었다는 말입니다. '꾸며 갖추지 않고'는 32상(相) 80종호(種好)를 구족하지 않은 범부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본유상주(本有常住)이자 '본디 그대로'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남묘호렌게쿄'를 말합니다. 어본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본존을 배알하는 그 순간순간이 '구원원초'입니다.
우리는 매일이 구원원초입니다. 날마다 구원원초의 청정한 생명을 온몸에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날마다 구원원초라는 '생명의 원점'에서 새롭게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가장 중요합니다. '과거'를 뒤돌아보면 안 됩니다. 뒤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미래를 향해 크나큰 희망을 불태우며 '지금' 이 순간 온 힘을 다한다, 그 사람이 바로 인생을 현명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
지금이 '구원원초'입니다. 지금이 '시작'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미래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현재라는 지금 이 순간이 있을 뿐입니다. 그 현재도 눈 깜짝할 사이에 과거가 됩니다.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습니다. 공(空)입니다. 생명은 공의 상태로 순간순간 계속 이어집니다.
'순간'이외에 생명의 실재(實在)는 없습니다. 순간에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순간의 생명을 과거부터 쌓은 인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본과묘(本果妙)'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되었기에 지금 이렇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희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본인묘는 이 순간의 생명이 미래의 결과를 만드는 '원인'이라고 봅니다. 그 원인도 생명 오저에 도달한 '본인(本因)'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원인이 아닙니다.
종(縱)으로는 구원의 생명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횡(橫)으로는 법계(法界)에 투철한 '본인'입니다. 그것이 '남묘호렌게쿄'입니다. 우주의 일체를 움직여 힘차게 끊임없이 향상하는 '영원한 생명'이자 대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어본존을 믿고 묘법을 불러 행하는 그때가 바로 늘 '구원원초'입니다.
"작용하지 않고 꾸며 갖추지 않고 본래 있는 그래도"(어서 759쪽)라는 성훈처럼 구원의 청정하고 위대한 생명력이 솟아납니다. 현재도 미래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됩니다. 니치렌불법은 '희망의 불법'입니다.
신심은 무한한 희망입니다. 비록 상황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모든 것이 진 싸움처럼 보이더라도 그 속에서 '이쯤이야!' 하고 일어나 묘법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증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을 하는 참된 의미가 아닐까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겠다는 생사를 건 투쟁이 없으면 참된 '신심'을 알 수 없습니다. 손해를 이득으로, 악(惡)을 선(善)으로,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가치를 창조하는 장절한 투쟁이 '창가'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신심'입니다.
(16-5) "월월 일일 강성해지시라"
이 절에서는 하루하루 가치 있게 꿋꿋이 생활하려면 자신을 좀먹는 타성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3.16 기념대표자회의 스피치에서(1992년 3월 15일, 도쿄)
신심은 타성과 끊임없이 싸우는 투쟁입니다.
대성인은 "월월(月月) 일일(日日) 강성해지시라. 조금이라도 해이한 마음이 있다면 마(魔)가 틈탈 것이니라."(어서 1190쪽) 즉 "다달이 나날이 강성하게 신심하세요. 조금이라도 게으른 마음이 있으면 거기에 마가 틈탈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신심을 게을리 하지 말고 소원 성취하시라."(어서 1227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진하지 않음은 퇴전'이라고 합니다.
도다 선생님도 타성에 젖는 신심을 늘 훈계하셨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천체(天體)든 한 마리 곤충이든 시시각각으로 바뀐다. 순간이라 해도 그 상태로 있을 수는 없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좋게 바뀌냐 나쁘게 바뀌느냐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타성에 흐르고 만다.
다시 말해 자신이 좋게 바뀌고 있는지 나쁘게 바뀌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해 아무렇지도 않다, 그것이 타성의 무서움이다. 신앙이 타성에 빠졌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퇴전이다. 신심을 빠르게 그리고 좋게 바뀌기 위한 실천하는 활동이다."
'전진하지 않는 것'은 '멈춘 것'이 아닙니다. '물러난 것'과 같습니다.
신심의 도상에서는 '이 정도면 됐다'는 것을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만심이 타성이 되고 퇴전으로 이어집니다.
대성인은 여성의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사도까지 찾아온 니치묘 성인을 훗날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옛날의 신심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보다도 지금 한층 강성히 신심을 가지시라. 그때는 더욱더 십라찰녀(十羅刹女)의 수호도 강해지리라고 생각하시라."(어서 1220쪽) "예전부터 관철한 신심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보다 더한층 강성한 신심을 하세요. 그때는 더욱더 (제천선신인) 십라찰녀의 수호도 강할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과거에 아무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신심을 했어도 현재의 일념이 타성에 젖으면 제천의 수호는 약해집니다. 애써 쌓은 복운까지 없앨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더한층 강한 신심을 결의하라고 촉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어서에는 전편에 걸쳐 '더욱더' '더한층' 등 하고 신심을 격려하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다쓰노구치 형장에서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신심을 나타낸 시조 깅고에게도 "더욱더 강성한 신력(信力)을 다하실지어다."(어서 1186쪽) 하고 지도하셨습니다.
앞서 말한 "월월 일일 강성해지시라."는 글월도 시조 깅고를 비롯해 문하를 격려하신 글월입니다.
그러나 타성이라 해도 자신은 좀처럼 알아채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니까 타성이라고 하겠지요. 어떤 사람이 '타성에 젖은 증상'(웃음)으로 '결의와 목표가 애매할 때' '근행은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기원이 없을 때' '근행이나 활동이 수동적이고 의무적일 때' '푸념이나 불평을 할 때' '환희나 감사, 감동을 느낄 수 없을 때' '구도심이 약해졌을 때' '일을 소홀히 하고 신심즉생활의 리듬이 무너졌을 때' 등을 들었습니다.
누구나 짚이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범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지만 대성인은 "신심이 약해서 성불이 늦어진다고 나(대성인)를 원망하면 안 됩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심은 '의무'가 아닙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권리'입니다. 자신이 결의하고 행동한 만큼 자신이 이득을 봅니다.
(16-6) 아침의 출발이 바로 인생을 승리하는 요체
이 절에서는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인생을 승리하려면 아침의 출발과 규칙적인 생활이 중요하다고 자신의 체험을 섞어 SGI 회장이 말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주부기념간부회 스피치에서(1988년 3월 28일, 아이치)
오늘은 앞으로 청년이 성장하고 대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해두겠습니다. '아침을 상쾌하게 출발하는 것이 바로 인생을 승리하는 핵심'입니다. 19733년, 나는 영국을 방문해 토인비 박사와 오랜 시간에 걸쳐 대화했습니다. 박사는 그때 여든네 살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마보레무스'(라틴어로 '자, 오늘도 일을 계속하자'는 의미)를 외치며 날마다 정력적으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박사가 한 말이 아직도 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아침 6시 45분에 일어나 아내와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침대를 정돈하고 오전 9시에 일을 시작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합니다."
박사가 무심코 한 이 한마디에서 '하루하루를 소중히 하자, 날마다 배우고 향상하자'는 젊고 활기찬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과연 일류의 인물은 몇살이 되어도 어떤 처지가 되어도 끊임없이 연찬하고 단련하는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루를 알차게 보내려면 아침의 출발과 규칙적인 생활이 중요하다, 인류의 인물로 크게 성장하는 사람은 이런 생활의 기본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지금 니치렌의 동류(同類)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여여래공숙(與如來共宿)의 자이니라. 부대사(傅大士)의 석에 가로되 '조조(朝朝) 부처와 함께 일어나며 석석(夕夕) 부처와 함께 눕고"(어서 737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말법에 남묘호렌게쿄를 봉창하는 대성인과 그 문하는 '여래와 함께 머무는' 사람이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후신(後身)이라고 하는 중국의 부대사의 석에는 '매일 아침 부처와 함께 일어나고 매일 밤 부처와 함께 잠든다.'고 있다."
우리는 대성인의 문하로서 날마다 묘법을 불러 실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부처(어본존)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잠드는' 한사람 한사람입니다.
삼세 영원한 법리에 따라 올바른 인생행로를 나아가고 더욱더 의의 있는 일생을 보내려면 먼저 조석근행이 근본입니다. 특히 "조조 부처와 함께 일어나며"라는 말씀과 같이 상쾌한 아침근행이 중요합니다.
아침의 패배는 하루의 패배로 이어진다. 하루의 패배는 드디어 일생의 패배가 되겠지요. 반대로 아침을 상쾌하게 출발하면 알찬 하루, 견실한 전진하는 나날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만족하고 승리하는 인생으로 결실을 거듭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승리해 하루하루를 상쾌하게 출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청년의 특권이자 모든 것에 승리하고 성장하는 원천입니다.
은사 도다 선생님은 아침 출근에 참으로 엄격하셨습니다. 또 보기 드문 사업가로서 엄격한 생활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계셨습니다. 자주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그립습니다.
"활기차고 상쾌한 기분과 넘치는 결의로 하루를 출발하는 직장은 발전한다." "직장 '상사'는 자진해서 더 일찍 출근해야 한다. 그래야 부하도 책임을 느끼고 직장의 '귀신'이 된다. 일이라는 투쟁도 승리하는 방향으로 정해진다." "책임자가 지각하거나 사원들이 한심하게 지각을 반복하는 직장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켜 망한다."
오랫동안 제일선에서 사업을 경영한 도다 선생님이 주시는 엄하고도 정확한 교훈이겠지요.
도다 선생님은 절대 지각 같은 것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출장이나 특별한 경우를 빼면 쉬시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 사원이 지각하는 것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매일 아침이 '전쟁'처럼 정신없고 또 필사적이었습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마음속으로 '선생님이 늦게 오셨으면' 하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웃음) 그러나 그 바람은 늘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웃음) 그때는 정말 괴로웠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고마운 훈련이었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약 10년 동안 도다 선생님을 섬기며 일했습니다. 그 사이에 건강 문제로 두세 번 지각을 했습니다. 그때는 초창기이기도 해서 회합도 귀가 시간도 지금보다 늦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도다 선생님은 학회활동 때문에 지각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신심 이용'이라고 갈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역직이 높을수록 책임이 있다.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남들 앞에서 아무리 그럴싸한 말을 해도 자신이 실천하지 않으면 간부로서 형편없는 모습이자 독선적이 모습'이라고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간부가 먼저 자진해서 모범이 되어 아침에 승리하고 하루를 상쾌하게 출발해야 합니다. '신심'은 즉 '생활'이고 '불법'은 즉 '사회'입니다. 신심을 하면서 생활 리듬이 흐트러지고 직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불법자로서 있을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신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나 불신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불법의 훌륭함을 증명하고 신뢰를 넓히는 한사람 한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과연 신심하는 사람은 다르구나, 훌륭하다'고 무한히 '신뢰받는 사람'이 되었을 때 참된 신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아침 출근이 흐트러졌다면 신심이 흐트러진 것이다. 늘 변명만 하다가 점점 더 심해져 거짓말쟁이가 되거나 비겁해져 사람들의 신뢰를 잃는다. 그리고 나쁜 것에 손을 대 마침내는 퇴전한다."
작은 일이 중요합니다. 좋든 나쁘든 작은 것이 쌓여 마침내 큰 차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장래의 큰 목표를 위해 먼저 발밑의 과제부터 도전해 승리해야 합니다. 어서에는 "일장(一丈)의 도랑을 건너지 못하는 자가 어찌 삽장, 이십장의 도랑을 건널 수 있을소냐."(어서 912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작은 도전, 작은 승리의 반복이 위대한 승리, 위대한 개가(凱歌)의 인생을 꽃피운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16-7) 건강을 위한 네가지 모토
가치 있는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보내려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려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SGI 회장은 건강을 지키는 네가지 모토로 '활기찬 근행' '무리하지 않는 가치적인 생활' '헌신적인 행동' '올바른 식생활'을 들었습니다. 인간혁명은 건강혁명, 생활혁명으로 이어집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구마모토, 오이타 합동 기념회합 스피치에서 (1990년 9월 28일, 구마모토)
건강에 관해 조금 말하겠습니다.
예전에 간사이에서 닥터부, 여자부 백화그룹과 간담할 때 일입니다.
나는 인생을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살기 위한 네가지 모토를 제안했습니다.
불법의 관점, 신심의 관점에서 나름대로 알기 쉽게 말했는데 '의학, 간호학에서도 수긍할 수 있다'고 지지를 받았습니다. 즉 ①활기찬 근행 ②무리하지 않는 가치적인 생활 ③헌신적인 행동 ④올바른 식생활, 이렇게 네가지입니다. 의학에서는 건강의 기본요소를 '식생활' '운동' '수면' '스트레스 해소' 등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제가지 모토 속에 모두 포함됩니다.
①활기찬 근행
첫째, '활기찬 근행'입니다. 근행에 활기가 없으면 몸 상태도 안 좋아집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실감하는 것입니다.
진지하게 창제하는 복덕(福德)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몸도 마음도 두뇌도 숨어 있는 힘을 한없이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허리를 곧게 펴고 깊이 호흡하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올바른 호흡법입니다. 그리고 호흡기능이 활발해지면 심장이나 혈관의 순환기능도 높아집니다.
또 어느 닥터부 멤버가 소리를 내면 몸에도 좋고 스트레스도 해소된다고 말했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으면 빨리 늙고 맙니다.
단정하게 앉아 합장하고 올리는 근행창제는 모든 의미에서 대우주의 법칙에 따른 가장 장엄하고 의의 있는 의식입니다. 소우주인 우리 색심(色心)도 근본 리듬에 합치합니다. 날마다 점고 생기발랄하게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건강'하고 '장수'하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②무리하지 않는 가치적인 생활
둘째, '무리하지 않는 가치적인 생활'입니다. 어쨌든 충분한 '수면'이 바로 건강의 기반입니다. 잠을 자지 않는 것은 자동차에 늘 시동이 걸려 있는 것과 같으므로 아무래도 차질이나 고장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자주 "12시 전에 자는 것이 12시 넘어서 자는 것보다 두 배 깊이 잘 수 있다. 되도록 일찍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듯합니다.
시간을 가치 있게 활용하여 일찍 근행하고 일찍 잔다. 그리고 아침을 상쾌하게 출발한다, 그럴 수 있는 지혜와 자율이 자신을 지킵니다. 그저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아침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아 늦잠을 자고 만다, 이 악순환은 올바른 '신심즉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최근에는 '마이크로 수면'(짧은 수면)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에 5분이나 10분 정도 짧은 잠을 자면 건강을 유지하는 데나 일의 능률을 높이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휴식시간 등을 잘 활용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조절해야 합니다.
③헌신적인 행동
셋째, '현신적인 행동'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본디 더 건강해지기 위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중에서 특히 법을 위해, 남을 위해, 사회를 위해 힘쓰는 행동이 얼마나 생명을 혁신시키고 인생에 활기를 불어넣는 원천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남을 위해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하거나 이기주의, 나쁜 개인주의의 세계에 틀어박혀 남을 위해 행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몸과 마음의 정체로 이어집니다. 거기에 병마도 틈타기 쉬워집니다.
인간을 포함해 동물은 '움직이는 생물'입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나무나 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생명이 약동하는 생물이 '움직이지 않으면' 썩고 맙니다. 시냇물도 똑같습니다. 흐름이 막혀 정체되면 어느새 탁해져 변질됩니다. 묘법의 세계에서도 헌신적인 행동을 꺼리다 퇴전한 인간은 신심이라는 맑은 물이 탁해져 마음이 썩어버린 모습입니다.
그것에 비해 여러분은 법을 홍통하고 동지를 격려하기 위해 또 지역의 발전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존귀한 '헌신적인 행동'을 펼칩니다.
때로는 '오늘은 집에서 느긋하게 텔레비전이나 보면 좋을 텐데'(웃음)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묘법의 벗을 위해, 가뿐한 마음으로 걷고 움직이는 쪽이 얼마나 충실한 나날이 되는지 모릅니다.
더욱이 현대는 '스트레스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스트레스의 원인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일차원에서 말하면 '마음이 외부에서 받는 공격'입니다. 그것과 싸워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 압박에 짓눌려 몸과 마음이 모두 파괴되고 맙니다.
자진해서 밖으로 나아가는 행동, 이것이 스트레스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도 어본존과 연관된 우리 행동은 생명의 법칙에 따라 생명을 소생시키고 활발하게 하는 가장 적합한 행동입니다.
또 '걷는' 의의에 관해서도 지금까지 몇번이나 말했지만, 운동부족이 되지 않으려면 최소한 하루 1만보는 걸어야 합니다. '노화는 발부터'라는 말이 있는데 학회활동으로 걸은 만큼 체력 유지와 건강 증진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어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남을 위해 불을 밝히면 내 앞이 밝아지는 것과 같다."(어서 1598쪽) 즉 "남을 위해 등불을 밝히면 그 빛은 자기 앞도 밝힌다."
벗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는 '헌신적인 행동''은 그대로 자신의 생명을 싱그러운 희망으로 비추고 복덕으로 빛나게 합니다.
④올바른 식생활
넷째, '올바른 식생활'입니다. '과식'은 비만의 원인입니다.
어서에도 "음식이 부절(不節)하므로 병듦"(어서 1009쪽) 즉 "식사를 주의하지 않아서 병에 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주의한 식생활은 어떻게 해야 바로잡고, 어떻게 하면 과식하고 싶은 욕구를 잘 조절할 수 있을까요. 거기서도 교양과 인격이 나타납니다.
특히 닥터부, 백화그룹 분들은 야식을 많이 먹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학회활동을 마친 뒤에 무심결에 야식을 많이 먹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도 자기 3시간 전에는 먹지 않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도저히 배가 고파서 참을 수 없는 경우에는 요령껏 채소 등 칼로리가 낮은 음식으로 해결하기 바랍니다.
어쨌든 여러분은 광선유포를 하는 데도, 각자의 가정에서도 소중한 분들입니다. 비만으로 당뇨병이나 온갖 심각한 질병이 생기면 큰일입니다. 올바른 식생활로 상쾌하고 기분 좋은 나날을 보내기 바랍니다. 자기 몸은 스스로 책임지고 관리해야 합니다. 부디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멋진 생활을 보내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쾌한 신심과 동지애로 이 존귀한 일생을 행복과 승리로 장식하기 바랍니다.
(16-8) 교학은 인간혁명의 원동력
이 절에서는 인생의 올바른 궤도로 똑바로 나아가려면 이서를 몸으로 읽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교학을 연찬하는 이유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투쟁에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수필 인간세기의 빛'<어서를 심간에 새기자>에서
(2004년 10월 20일, '세이쿄시문'게재)
1271년 10월, 다쓰노구치법난의 폭풍우가 니치렌 대성인을 덮치고 지나간 뒤의 일입니다. 대성인은 유배지 사도로 출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진실을 담아 편지를 보냈습니다.
"법화경은 종이에 씌어 있는 대로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어도 그 경문대로 행동하기는 어렵지요."(어서 1001쪽, 통해)
그리고 대성인이 지금 홀로 대난을 받으며 "경천증질(輕賤憎嫉)"(법화경 199쪽) "유다원질(猶多怨嫉) 황멸도후(況滅度後)"(법화경 362쪽) 등의 경문을 여설수행(如說修行)하여 '몸으로 읽고 있다'고 엄연히 드높이 선언하셨습니다.
대성인의 사자후는 사랑하는 제자들의 가슴을 분명 격렬하게 뒤흔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제자여, 너희들은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어서는 '영원의 경전'입니다. 어서는 대성인의 '혼의 외침'입니다.
마성이 뒤덮은 악세(惡世) 말법(末法)에, 법화경을 수행하는 우리들 위해 '용감히 싸워 절대로 퇴전하지 마라!' '인생을 승리로 장식하라!' '단호히 악을 물리쳐라!' 하고 엄연히 남기신, 대성인의 사자후, 정의로운 외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제자 또한 모두 어서를 배독할 때마다 자신에게 깊이 물어야 합니다. 너는 어떻게 살 것이냐, 너는 어떻게 투쟁할 것이냐 하고.
'몸으로 읽는다'는 것은 남의 일처럼 또는 옛날 이야기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로 '현재의 일'로 받아들여 자신 인생의 투쟁에 맞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사제일체'가 되는 엄숙하고 올바른 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구절이라도 좋습니다. 한줄이라도 좋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다!' '이 어서는 지금 내게 주신 것'이라고 생명에 깊이 새기고 엄연한 신심으로 일어서 새로운 광포의 투쟁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것이 "어서를 심간에 새기어"(어서 1618쪽)라고 말씀하신 닛코(日興) 상인의 유계(遺戒)를 지키는 일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전쟁이 한창일 때 군부정부의 탄압으로 2년 동안 힘든 옥중생활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감옥에서 '내 일생의 사명은 광선유포'라고 궁극의 사명을 자각하셨습니다.
원통하게 옥사하신 마키구치 선생님의 제자로서 거만하고 비열한 무리에게 복수하겠노라 맹세하셨습니다. 총살형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출옥과 동시에 광선유포의 대투쟁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법난(法難)을 받은 다른 제자들은 모조리 퇴전했습니다.
<개목초>에는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일을 필요한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어서 234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필요할 때'에 두려워하며 겁을 내 스스로 정의의 보검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한탄하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어째서 감옥에 들어갔다고 퇴전하고 마는가. 가장 영광스럽고 영원에 걸쳐 큰 공덕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어서에는 어디에도 비겁한 신심 따위 씌어 있지 않다.'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반성하셨습니다. 곰곰이 생각하셨습니다. 밤낮으로 계속 생각하셨습니다. '어째서 퇴전하고 말았을까' - 천재인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셨습니다.
'신심의 추진력이 되어야 할, 신심의 무엇인지 밝히는 교학이 없었다. 어서 연찬을 잊었다.
교학 즉 어서만 심간에 새겼더라면 퇴전 따위 할 리가 없다. 겁쟁이가 분기하고 일어나 용감하게 꿋꿋이 투쟁하려면 어서다! 어서밖에 없다!'
그 체험으로 깊은 깨달음을 얻은 도다 선생님의 지도 아래, 학회는 간부도 회원도 어서를 늘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교학이 없는 불법은 없습니다. 신심이 없는 불법은 불법이 아닙니다.
시간만 있으면 어서 연찬에 힘썼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회합에서 어서를 배독하고 논하고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러자 새로운 혼의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원대한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 빛났습니다.
어서 배독은 인간혁명이었습니다. 어서 배독은 신심을 무한대로 심화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학은 관념적인 교학이 아닙니다. 암기하는 교학도 아닙니다. 학자가 되기 위한 교학도 아닙니다. 대성인의 교학은 꿋꿋이 사는 힘, 끝까지 투쟁하는 힘,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데 힘이 되는 교학입니다.
그 교학을 자신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인생의 온갖 현실과 싸워 전진하는, 사회에서 반드시 승리하기 위한 교학이자 대철학이었습니다.
- 법련 2016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