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선집(5-6월호)
제2부 인간혁명의 실천
제9장 불법(佛法)은 승부(勝負)
이 장을 읽기 전에
일찍이 이케다(池田) SGI 회장은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일과 활동에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미국SGI 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발버둥 치면서 기원하고 움직이고 노고할 때 가장 인간혁명할 수 있습니다. 가장 숙명전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초조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은 침착하게 승리의 인(因)을 만들어야 합니다. 씨앗을 제대로 심어야 합니다. 새가 그 씨앗을 물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또 심으면 됩니다. 막 싹이 트기 시작할 때 꺾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또 심으면 됩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 마지막에는 우거진 큰 숲이 됩니다. 이것이 불법의 법칙입니다.
밤은 반드시 아침이 됩니다. 반드시 아침이 온다고 믿는 마음이 우리 불법입니다. 그만두지 않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늘 무언가 행동해야 합니다. 도전하는 한 반드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싸우는 자체가 이미 승리입니다. 지지 않는 것이 승리입니다.”
인간혁명에 도전하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장해가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SGI 회장은 그런 어려움에 맞서 꿋꿋이 도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우리 흉중에 인생을 승리하는 부처의 생명이 찬연히 빛난다고 되풀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은 승부’ 불법에서는 왜 승부를 중히 여기는가. 무엇과 싸워 무엇에 이긴다는 말인가. 인생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SGI 회장의 지침에서 그 중요한 철학을 배웁니다.
(9-1) 불법은 승부, 인생도 승부
이 절(節)에서는 어서를 배독하며 ‘불법은 승부’라는 의의에 관해 말하고, 근본은 부처가 마(魔)와 투쟁하는 흉중의 싸움에서 이기는 데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어서의 세계》에서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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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인(大聖人)의 어서를 보면 표현은 다양하지만 ‘불법은 승부’라는 원리를 전편에서 배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단적인 표현으로 <시조깅고전답서>(별명:세웅어서) 에서 “불법이라고 함은 승부를 우선으로 하고”(어서 1165쪽) 하고 명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키구치(牧口) 선생님도 이 어서를 인용하여 여기에 ‘종교의 생병’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전집》10)
불법은 승부이고 인생도 승부입니다.
불법은 부처와 마가 싸우는 생병 근본의 투쟁에서 모든 사람이 승리하기 위해 설한 법리(法理)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를 물리치고 성불하느냐, 아니면 마에 져서 미혹에 빠진 인생을 보내느냐. 우리가 인생에서 불법을 실천하는 의의는 궁극적으로 이 근본적인 승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불법의 궁극적인 삶의 방식에서 보면 인생은 모든 것이 승부의 연속입니다.
그것이 또한 인생의 실상입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은 설령 세간의 일이라도 이 싸움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모두 불도수행이 됩니다. 다시 말해 ‘불법은 승부’라는 원리에 부합합니다.
대성인은 “부처를 세웅(世雄)이라 칭하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웅’은 현실사회에서 싸우는 ‘용자(勇者)’ 입니다. ‘부처’는 마와 용감하게 싸워 불계(佛界)의 생명력을 나타내고 세간법(世間法) 안에서 올바르게 끝까지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대성인이 재가(在家) 문하의 중신자인 시조 깅고에게 ‘불법은 승부’라고 가르치신 이유는 ‘세웅’이라는 부처의 삶의 방식을 계승하는 사람이 바로 ‘불법자(佛法者)’라는 점을 나타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불법은 승부’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기는가. 그것은 ‘마음’입니다.
어떠한 곤란에도 맞서는 강인한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에서 ‘불법은 승부’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겁쟁이의 마음으로는 흉중의 마(魔)도 사회의 마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겁이 많아서는 불가능하니라.”(어서 1193쪽)입니다.
‘우리 문하여, 결단코 세상의 거센 파도에 지지 마라.’ ‘비열한 마군(魔軍)에게 지지 마라.’는 대성인의 만감이 담긴 격려입니다.
“법화경(法華經)보다 뛰어난 병법(兵法)은 없다.”는 원리도 똑같습니다.
‘법화경의 신심’은 관념론도 추상론도 아닙니다. 현실사회에서 승리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혜를 발휘하는 이론이어야 합니다.
대성인은 사자왕의 마음으로 승리 또 승리하는 대투쟁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렇게 정한 일념에 따라 제천선신(諸天善神)도 움직입니다.
“제천선신 등은 니치렌과 힘을 합하신 고로 다쓰노구치(龍口)까지도 이겼고, 기외(其外)의 대난(大難)도 모면하였으니”(어서 843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승리 선언입니다.
인생도, 생활도, 사회도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리고 변화는 좋게 바뀌느냐 나쁘게 바뀌느냐이지 중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도 승부, 종교도 승부, 승부를 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9-2) 인간혁명은 자신과 벌이는 싸움
인간혁명은 늘 자신과 벌이는 싸움이자 신심을 방해하려는 마의 작용과 벌이는 투쟁입니다. ‘불법은 승부’란 자신과 벌이는 싸움에 승리하는 일이라고 외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남자부청년부간부회 스피치에서
(1990년 6월 26일,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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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은 승부’라는 말해 관해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다(戶田) 선생님은 자주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신심은 인간의 막힘과 또 인류의 막힘과 벌이는 싸움이다. 부처와 마가 벌이는 투쟁이 신심이다. 그것이 불법은 승부라는 말이다.”
전진하면 당연히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더욱더 제목을 부르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경애를 크게 열 수 있습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끊임없는 반복이 신심입니다.
그런 자신과 벌이는 싸움, 막힘과 벌이는 싸움, 마와 벌이는 투쟁에 이기느냐 지느냐 이것이 ‘승부’입니다.
자신과 승패를 겨루는 치열한 투쟁을 잊으면 이미 타락입니다. 유희(遊戱)입니다. 적당히 만족하는 안일에 빠지면 이미 패배한 모습입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저 불법이라고 함은 승부를 제일로 하고 왕법(王法)이라고 함은 상벌(賞罰)을 근본으로 했노라. 그러므로 부처를 세웅이라고 칭하며 왕을 자재(自在)라고 이름했다.”(어서 1165쪽)
즉 “본디 불법은 승부를 제일로 하고, 왕법(정치, 사회)은 상벌을 근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부처를 ‘세웅’이라 칭하고 왕을 ‘자재’라고 이름 붙인다.”
상벌은 순위가 있고 상대적입니다. 100점 중 10점, 60점 또 훈장의 등급, ‘더 좋다’ ‘더 나쁘다’ 하고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승부는 절대적입니다. 승리하느냐 지느냐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부처’란 이 승부에서 ‘이긴 사람’을 말합니다. ‘세웅’이란 인간 세상(세간)에서 가장 강한 용자를 말합니다.
이 외에도 불전(佛典)에서는 ‘부처의 별칭(별명)’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전승(戰勝)’ ‘승도사(勝導師)’ ‘승진(勝陣)’ ‘승타(勝他)” ‘승타당(勝他幢, 당은 창<槍>이라는 의미로 장기에서 궁<宮>을 상징)’ 또 ‘건승파진<健勝破陣>’ 즉 마군(魔軍)의 진영을 부수고 이기는 건자(健者)와 용자(勇者), ‘십력항마군(十力降魔軍)’ 즉 10의 힘으로 마군을 항복시키고 전멸시키는 강자를 말합니다.
이것이 부처입니다.
즉 마와 겨룬 승부에서 ‘이기는 리더’(승도사)가 바로 부처입니다. 이겨야 불법이고 이겨야 신심입니다.
대성인은 마군과 벌이는 싸움에 관해 이렇게 묘사하셨습니다.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은 십군(十軍)의 싸움을 일으켜서 법화경의 행자와 생사해(生死海)의 해중(海中)에서, 동거예토(同居穢土)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빼앗으려고 다투고 있다. 니치렌은 그 당사자가 되어 대병(大兵)을 일으킨 지 이십여년인데, 니치렌은 한번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노라.”(어서 1224쪽)
즉 “제육천 마왕이 십군의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일으켜 법화경 행자의 ‘생사라는 괴로움의 바다’에서 동거예토(사바세계와 같이 육도<六道>의 범부와 사성<四聖(성문, 연각, 보살, 부처)이 동거하는 국토>)를 ‘빼앗기지 않겠다’ ‘빼앗겠다’ 하고 다툰다. 니치렌은 그 당사자가 되어 부처의 대군을 일으킨 지 이십여년이다. 그동안 한번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마의 십군’이란 ‘번뇌의 군대’를 말한다. 《대지도론》(대정신수대장경 25권)에는 열 종류가 이렇게 씌어 있다.
(1)욕(欲): 오욕(五欲)에 사로잡혀 수행을 게을리 한다.
(2)우수(憂愁): 마음이 울적하고 귀찮아진다.
(3)기갈(飢渴):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린다.
(4)갈애(渴愛): 애욕과 집착으로 타락한다. 이성에게 갖는 애착이나 술에 집착하는 등 쾌락에 빠지는 모습도 이것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5)수면(睡眠): 게으르게 계속 잠만 자는 듯한 진지하지 못한 생활이고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전혀 자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잠에 져서 향상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요령을 피우며 사는 인생도 포함된다.
(6)포외(怖畏): 두려움에 져서 겁쟁이가 된다.
(7)의회(疑懷): 수행자를 부추겨 의심을 일으키고 후회를 남긴다.
(8)진에(瞋恚): 노여운 마음이 수행을 방해한다.
(9)이양허칭(利養虛稱): 명리(名利)와 헛된 명성(名聲)에 사로잡혀 성불로 가는 길에서 벗어난다.
(10)자고멸인(自高蔑人): 자기를 높이고 타인을 깔본다.
이것은 지금까지 반역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만한 생명입니다.
또 그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이 마군에 지고 사로잡혀 적진에 넘어가고 만 자들입니다.
이 마군을 쳐부수는 ‘무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신심이라는 이검(利劍)’뿐입니다. 그러므로 광포의 리더는 가장 먼저 ‘신심 강성한 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겉보기에 아무리 우수한 리더처럼 보여도 근본적인 차원에서 마와 벌이는 ‘생명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신심이 강한지 어떤지가 진정한 강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어쨌든 이 어서에 씌어 있는 대로 대성인은 부처와 마가 우주라는 ‘생사의 바다’(괴로움의 바다)를 무대로 장절한 싸움을 벌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주 전체가 ‘승부의 세계’입니다. 예를 들어 창조하는 힘과 파괴하는 힘, ‘혼란(=카오스)’을 일으키는 난기류(亂氣流), ‘연결시키는’ 자애의 힘과 ‘단절시키는’ 증오의 힘, 생과 사, 빛과 어둠, 행복과 불행, 전진과 후퇴, 상승과 하강, 개방과 폐쇄, 희망과 절망, ‘살리는’ 에너지와 ‘죽이는’ 충동(衝動) 등입니다. 즉 행복해지는 법칙을 따르느냐 반대로 어둡고 불행한 세계로 바꾸는 천마(天魔)에게 종속되고 마느냐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행복해지는 법칙에 따라 무너지지 않는 상락(常樂)의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불법자의 사명입니다.
(9-3) 불법은 석존의 ‘마음의 투쟁’에서 시작
소설 《신∙인간혁명》에서는 극단적인 고행(苦行)으로는 득도(得道)할 수 없다고 안 석존이 보리수 아래서 드디어 성도(成道)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무명(無明)이라는 기심(己心)의 마를 물리치는 불법의 승부를 그린 드라마이기도 했습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소설 《신∙인간혁명》 제3권 ‘불타’에서
(1998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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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존은 보리수 아래서 계속 사색했다.
불전(佛傳)①에 따르면 이 때, 악마가 석존을 유혹했다고 한다. 유혹한 방법은 불전에 따라 다르지만 말을 상냥하게 걸었다는 내용이 흥미롭다.
“너는 바싹 마르고 안색도 좋지 않다. 죽음에 직면했다. 이대로 명상을 계속하면 살 가망은 천(千)의 하나밖에 없다∙∙∙.”
악마는 먼저 생명의 위기를 말하고 살아야 한다고 재촉한 뒤, 바라문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공덕을 많이 쌓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석존이 하는 수행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기심(己心)에서 일어난 격렬한 갈등의 드라마라고 해석할 수 있다.
석존은 미혹하여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흐트러졌다. 체력도 떨어져 쇠약한 나머지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엄습했다. 또 그렇게 혹독한 고행을 해도 아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기에 지금 하는 노력도 결국은 소용없는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터이다.
여하튼 욕망에 대한 집착과 굶주림, 졸음, 공포, 의혹이 석존을 덮쳤다.
마(魔)란 정각(正覺)에 대한 구도(求道)의 마음을 뇌란(惱亂)시키려는 번뇌의 작용이다. 그것은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육체적인 굶주림이나 졸음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혹은 불안이나 공포, 의혹이 일어 마음을 괴롭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인간이 그 마에 미혹되면 자신의 좌절을 어떠한 형태로든 반드시 정당화하는 법이다. 더구나 그것만이 이치에 맞는 것처럼 생각해 버린다.
예를 들면 ‘이렇게 해도 깨달음 따위는 얻을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석존의 생각은 그때까지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없기에 언뜻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마는 “어버이와 같은 생각을 갖느니라.”(어서 917쪽)고 하지만 때때로 마는 자신의 나약함이나 감정을 긍정하는 상식론에 의지하는 기분을 일으키게 한다.
하지만 석존은 그것을 ‘마’라고 간파하고 생명력을 분기시켜 잡념을 떨쳐버리고 소리 높이 외쳤다.
“악마여, 겁쟁이는 너에게 패배할지 모르지만 용자(勇者)는 승리한다. 나는 싸우겠다. 패배하고 사느니 싸우다 죽는 편이 낫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주위는 어두운 정적에 감싸인 채 하늘에 가득 찬 별들이 맑은 빛을 지상에 던지고 있었다.
마를 극복한 석존의 마음은 상쾌했다. 정신은 맑게 갠 푸른 하늘과 같이 한 점의 흐림도 없었다.
석존은 생명이 삼세(三世) 영원함을 깨달았다.
그때, 태어난 이래 마음속 깊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모든 불안이나 미혹이 사라졌다. 자기라는 존재의, 미동조차 하지 않는 깊은 뿌리에 간신히 도달한 것이다.
석존은 무명의 어둠이 사라지고 지혜의 광명이 자신의 생명을 비추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산꼭대기에서 사방을 바라보듯 경지를 열었다.
◇
법락(法樂)을 체험한 석존은 잠시 후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것은 새로운 고뇌였다. 그는 나무 그늘에 앉아 며칠이고 생각했다.
‘이 법을 설해야 하는지, 설하지 말아야 하는지∙∙∙.’
석존이 깨달은 법은 지금까지 아무도 들은 적이 없고 설한 적도 없는 무상(無上)의 대법(大法)이다. 광채로 가득 찬 석존의 생명세계와 현실세계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병들고 늙고 죽는 일을 두려워하고 욕망에 몸을 불태워 서로 다투고 고뇌한다. 그것은 ‘생명의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해도 누구 한 사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석존은 고독을 느꼈다. 그것은 미문(未聞)의 법을 얻은 자만이 아는 ‘깨달은 자의 고독’이었다.
어느 불전에 의하면 이때도 악마가 나타나 석존을 괴롭혔다고 한다. 그것은 법을 설하고자 하는 마음을 단념시키려는 기심의 마와 벌인 싸움이라 해석할 수 있다.
석존은 포교를 추진하는 일에 왠지 모르게 솟구치는 망설임과 당혹감을 억제할 수 없었다. 석존은 괴로워하며 망설였다. 마는 불타가 된 석존에게도 마음의 틈을 이용해 계속 나타나서 괴롭혔다.
‘부처’라 해도 결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고뇌도 있고 괴로움도 있다. 병에도 걸린다. 그리고 마의 유혹도 있다. 그러므로 ‘부처’란 이런 마와 끊임없이 싸우고 계속 행동하는 용자를 말한다. 반대로 아무리 경애를 쌓았다고 해도 정진을 잊으면 한 순간에 신앙이 파괴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불전에는 망설이는 석존 앞에 범천(梵天)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널리 법(法)을 설하도록 간청했다고 씌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고 수행하려는 석존의 물러서서 않는 의지의 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석존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나는 가겠다! 가르침을 구하는 자는 들을 것이다. 그래도 때가 덜 묻은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방황하는 중생들 속으로 들어가자!’
마음을 정하자 석존은 생명에 새로운 힘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위대한 사자(獅子) 한 사람이 인류를 위해 일어선 순간이었다.
(9-4) 먼저 오늘 자신에게 승리
여기서는 이케다 SGI 회장이 토인비 박사와 나눈 대담에서 강조한 ‘자기 초극(超克)’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에게 승리하는 일’이 사회를 바꾸고 인류의 역사를 움직인다는 인간혁명의 근본을 말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홍콩∙마카오최고협의회 스피치에서
(2000년 12월 4일,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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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 박사가 이 대담(《21세기를 여는 대화》)에서 강조한 점은 무엇인가.
그 중 하나는 ‘자기 초극’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자신에게 이긴다.’는 의미입니다.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작은 자신을 뛰어넘어 남들의 행복을 위해 힘쓰는 크나큰 자신을 열어야 합니다.
인류의 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라도 이 ‘자기 초극’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 20세기 최대의 역사가 토인비 박사의 통찰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혁명’을 의미한다고 해도 좋겠지요.
박사는 “자신을 초극하는 이 싸움은 한 사람 한 사람 행동에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가 ‘자신에게 이기는 일’이 결국 사회의 커다란 발전으로 이어져 이윽고 인류의 역사도 움직입니다.
21세기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꿋꿋이 승리하려면 무엇이 중요한가. 그 승부는 먼저 오늘 자신에게 이기는 일입니다. 오늘 자신을 혁명하는 데에서 시작한다고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신앙은 무한한 힘의 원천입니다. 종교는 ‘문화의 대지(大地)’입니다. ‘사는 힘’ ‘성장하는 힘’ ‘승리하는 힘’ ‘숙명을 타개하는 힘’을 끓어오르게 합니다.
묘법(妙法)은 ‘행복해지는 원천’입니다.
불법은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용감하게 일어나 자신에게 승리하여 모든 사람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그 정도(正道)를 걷는 단체는 창가학회밖에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도 중요합니다. 경제도 정치도 교육도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근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입니다. 생명변혁이야말로 모든 것의 토대가 됩니다, 석존과 대성인은 이 점을 가르치셨습니다.
대성인은 우주와 생명을 관철하는 법칙을 설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평화롭게 자애에 넘쳐 살 수 있는 길을 남겨주셨습니다.
묘법은 가장 존귀한 대법(大法)이고, 그 법을 수지(受持)한 여러분은 ‘세계의 보배’입니다.
불법의 인과(因果)는 엄합니다. 따라서 묘법을 실천하며 꿋꿋이 사는 사람은 생생세세(生生世世) 건강하고, 아름답고, 유복하고 훌륭한 리더가 됩니다.
그리하여 사회에 공헌하고 사람들에게 찬탄받으며 만족스러운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을 부디 확신하기바랍니다.
(9-5) ‘도전’과 ‘응전(應戰)’
이 절(節)에서는 토인비 박사의 ‘도전’과 ‘응전’이라는 역사관을 언급하며 사회도 개인도 온갖 고난과 끊임없이 싸우는 생명력이 승리의 길을 연다고 말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야마나시부인부간부회 메시지에서
(1997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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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장해를 만날 때마다 더욱 거세진다.(점점 더 강해진다)’는 말은 청춘시절부터 내 좌우명입니다.
실은 이 신조는 토인비 박사의 역사 이념과 근본적으로 일맥상통합니다.
즉 ‘도전’과 ‘응전’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과제나 장해가 있습니다. 그 도전을 받아들여 자신이 더욱 강해진다(응전한다), 그러한 생명력이 있는 한 그 문명은 발전한다는 말입니다.
싸우는 생명력을 잃은 문명은 쇠망합니다. 박사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인용해 이 점에 관해 설명하셨습니다.(《문명의 발생》)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바로 싸워야 할 장해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내가 이 정도로 됐다는 마음으로 안락의자에 앉아서 잠이 든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망해도 좋다.”(《파우스트 비극 제1부》)
이제 싸우지 않아도 좋다, 이제 편히 쉬어도 좋다, 이제 확대하지 않아도 성장하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순간 망하고 맙니다. 요약하면 이것이 역사의 철칙이라고 토인비 박사는 논했습니다.
인생도 똑같습니다. 단체도 똑같습니다. 어떤 일이 있을수록 그 일과 싸우고 그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에 장작을 넣으면 불은 더 활활 타오른다. 바다로 들어가는 강물이 많지 않으면 대해(大海)도 없다.”(어서 1448쪽, 취의)
법화경 행자는 난이 있을 때마다 불처럼 대해처럼 강해지고 성장합니다.
그러한 생명력으로 전진한 사람이 역사의 승리자가 됩니다. 인생의 승리자가 됩니다. 요는 자신이 강해지는 일입니다. 학회를 강하게 해야 합니다.
어서에 “마음이 견고(堅固)함에 따라서 신(信)의 수호(守護) 즉 강함이라.”(어서 1220쪽) 즉 “신심하겠다는 마음의 경고함에 따라 제천선신의 수호도 강해진다.”
일차원적으로 말하면 ‘남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지켜주겠지. 누군가가 우리 편이 되어주겠지 하는 달콤한 생각은 버려라. 전부 자신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자신이 강해져야만 제천선신도 지키고 이길 수 있다.’는 문증(文證)입니다.
(9-6) 서원(誓願)의 신심에 서라
1960년 10월, 이케다 SGI 회장은 처음으로 브라질을 방문했습니다. 소설 《신∙인간혁명》에는 야마모토 신이치가 현지에서 연 좌담회에서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을 끌어안듯 격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SGI 회장은 농업이주자로서 분투하는 장년부에게 승리의 실증을 가져오는 서원의 신심에 관해 말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소설 《신∙인간혁명》 제1권 ‘개척자’에서
(1998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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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살이 넘은 한 사람의 장년부가 군인과 같은 어조로 긴장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자,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하십시오. 이곳은 군대가 아니니까. 모두 동지이며 가족이니까 댁에서 편히 쉰다는 마음으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웃음이 터졌다. 그을린 장년부의 얼굴에도 티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장년은 새롭게 시작한 채소 재배에 실패하여 빚이 늘어났는데,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질문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물었다.
“흉작이 든 원인은 무엇입니까.”
“기후 탓인 것 같습니다만∙∙∙.”
“똑같은 채소를 재배해 성공한 분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흉작입니다.”
“비료에 문제는 없습니까?”
“… 상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재배방법엔 문제가 없습니까?”
“…”
“토양과 품종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글쎄요….”
장년은 신이치의 질문에 거의 충분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 사람은 분명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열심히 한다.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에 방심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신이치는 힘찬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왜 흉작으로 끝났는지 그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참고해도 좋겠지요. 그리고 실패하지 않도록 충분히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진지하게 승부에 임하는 사람은 항상 연구하고 고민합니다. 그런 노력을 게을리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신심을 하고 있으니 자기 밭은 저절로 풍작이 들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불법은 최고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신심의 강성함은 남보다 몇 배 연구하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도전하는 에너지를 솟게 하는 원천이 진지한 창제입니다. 그 창제는 ‘서원’의 창제이어야 합니다.”
“서원 말입니까?”
장년이 물었다. 모두 처음 듣는 말이었다.
신이치는 답했다.
“‘서원’이란 스스로 맹서를 세워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기원한다고 해도 노력을 게을리하거나 그저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기원도 있습니다. 그렇게 기원하는 종교는 인간을 그릇되게 만드는 종교입니다. 니치렌불법의 기원은 본디 ‘서원’의 창제입니다. 그 서원의 근본은 광선유포입니다.
말하자면 ‘저는 브라질을 광선유포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일에서도 반드시 훌륭한 실증을 내겠습니다. 부디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결의하는 창제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디 우리의 기원입니다.
그 위에 날마다 자신이 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를 명확히 정하고 하나하나 완수하기를 기원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그 진지한 일념에서 지혜가 솟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나와 성공으로 이어집니다. 즉 ‘결의’와 ‘기원’ 그리고 ‘노력’과 ‘아이디어’를 갖춰야 비로소 인생의 승리가 있습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한 밑천 잡으려 한다거나 손쉬운 돈벌이를 기대하는 건 잘못된 마음입니다. 그것은 신심이 아닙니다. 관념입니다.
일은 생활을 지탱하는 기반입니다. 그 일에서 승리의 실증을 내지 않으면 신심즉생활의 원리를 입증할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안이한 자세는 모두 배제하고 다시 한번 새로운 결의로 심혈을 기울여 일에 몰두하십시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년의 눈에는 결의가 넘쳤다.
신이치는 농업이주자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서 성공하려면 가장 먼저 자신의 안이함과 싸워야 한다. 적(敵)은 자기 안에 있다. 인생은 역경에 처할수록 승부를 낼 때라고 정하고 끝까지 도전해야 한다. 그럴 때 어본존의 공력(功力)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역경은 또한 불법의 힘을 증명하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9-7) 지지 않는 것이 승리
‘지지 않는 것이 승리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승리다. 굴하지 않는 것이 승리다.’
이것이 SGI 회장이 말하는 ‘불법은 승부’라는 철학입니다. 여기서는 후계의 여자부 벗에게 ‘지지 않는 것이 승리’라는 ‘불굴의 투혼’으로 사는 삶을 가르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수필 인간세기의 빛’(‘여성의 세기’ 젊은 욱일)에서
(2004년 11월 13일 ‘세이쿄신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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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은 즉 생활입니다. 불법은 즉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생활에 승리하고 사회에서 승리합니다. 자신이 행복해지지 않는 신심이나 불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고민이 있습니다. 슬픔이 있습니다.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번뇌’ 즉 ‘보리’입니다. 크게 괴로워한 만큼 경애를 크게 넓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묘법의 원리입니다. 비록 지옥의 업화(業火) 같은 역경에 처해도 그곳을 반드시 행복의 적광토(寂光土)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무런 고뇌가 없는 상태가 행복은 아닙니다. 지지 않는 것, 견딜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중압감에 짓눌려 주위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힘들겠다.’는 말을 들어도 태연하면서도 유유하게 자기 사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능인(能忍: 잘 견딘다)’이라는 강하고 강한 부처의 생명력이 샘솟습니다. 가장 고생한 사람이 마지막에는 가장 큰 행복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인내라는 대지에 피는 꽃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자부 1기생인 아내의 신조 중 하나는
“오늘도 지지 마라
오늘도 용감하게
서원의 길을
승리의 길을”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지 않는 사람은 이미 승리한 사람입니다. 특히 자신이 청춘시절에 서원하고 정한 신념대로 지지 않는 일생을 끝까지 관철한 사람은 가장 강하고 위대합니다.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모든 사람을 비추는 태양이 되는 곳에 진정한 승리가 있고 독립자본(獨立自尊)의 행복이라는 깃발이 펄럭입니다.
행동하지 않은 인생에 승리의 깃발은 없습니다. 행동하지 않은 신심에 행복의 깃발은 없습니다. 이 존귀하고 의의 깊은 청춘을 그리고 인생을 지지 않고 모든 고난을 극복하면서 아침 해처럼 빛나는 승리의 영광을 가슴에 품고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참된 삶의 길입니다. 불법입니다. 신심입니다.
“난이 옴을 가지고 안락(安樂)”(어서 750쪽)이라고 말씀하신 대성인의 이 엄숙한 말씀을 결코 잊으면 안됩니다.
(9-8) 인간으로서 가장 존귀한 인생이란
불법에서 발하는 승리는 명성이나 영예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떠한 가치를 남기고 남을 위해 얼마나 애썼느냐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본부간부회, 도쿄총회 스피치에서
(1993년 3월 24일,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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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萬物)은 유전한다.” 이 말은 청춘시절에 마음에 새긴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입니다.(기원전 500년 무렵에 활약)
우주의 만물, 모든 것은 예외 없이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입니다. 어떠한 영화(榮華)를 누린 인생이라도 마지막에는 나락 끝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혹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여러 국왕, 대신, 공경(公卿), 전상인(殿上人) 등의 몸이 되어 이만한 즐거움이 없다고 생각하고, 적은 것을 얻고서 족하다고 생각하여 기뻐했노라. 이를 부처는 꿈속의 영화요, 환상의 낙이니라. 오직 법화경을 수지해 받들어 속히 부처가 될지어다 라고 설하셨느니라.”(어서 386쪽) 즉 “(우리 중생은) 어느 때는 사람으로 태어나 여러 국왕이나 대신, 공경, 전상인(귀족) 등 고위, 고관의 몸이 되어 이만한 즐거움은 없다고 생각하고 조그만 과보(果報)를 얻고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서로 기뻐한다. 그러나 부처는 이것을 꿈속의 영화이고 환상 같은 즐거움이다, 오로지 법화경을 수지하여 속히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설하셨다.”
권력자든, 장관이든, 의원이나 유명인이든 아무리 뽐내도 불법의 눈으로 보면 ‘꿈속의 영화’ ‘환상 같은 즐거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금세 사라지고 마는 물거품처럼 영화를 추구하는 인생 또 그것을 부러워하여 마음이 괴로운 인생, 이 짧은 일생 동안 그런 환상을 좇다 허비하면 너무나 허무합니다.
그럼 인간으로서 어떤 인생이 가장 존귀한가.
대성인은 ‘부처’가 되는 일이 바로 ‘영원한 행복한 인생’이자 ‘최고의 인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루하루 ‘묘법의 당체’인 자신을 빛내며 사는 인생입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성실하게 신심에 힘쓴 사람, 광선유포를 위해 진지하게 힘쓴 사람, 영원한 대법과 함께 끝까지 산 사람이 바로 참된 ‘승리자’이자 ‘승리왕’입니다.
‘광선유포는 삼세 영원히 이루어야 할 위업입니다. 광포의 길을 걸으며 끝까지 산 사람이야말로 삼세 영원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이것이 대성인의 마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회원이 바로 세계 제일의 ‘영웅’이자 인간의 ‘왕자’라고 단언합니다.
대성인은 지금까지 몇번이나 배독한 유명한 성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신(人身)은 받기 어려우니 손톱 위의 흙이요, 인신은 갖기 어려우니 풀잎 위의 이슬이로다. 백이십까지 살아서 이름을 더럽히고 죽느니보다는 살아서 일일(日日)이라도 이름을 떨치는 일이야말로 중요하니라.”(어서 1173쪽)
즉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어렵다. 마치 손톱 위의 흙과 같이 드문 일이다. 또 설사 인간으로 태어났다 해도 그 몸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태양이 뜨면 사라지고 마는 풀잎 위의 이슬과 같다 덧없다. 백이십세까지 오래 살아서 오명(汚名)을 남기고 죽느니보다 살아서 하루라도 이름을 떨치는 일이 중요하다.”
오랜 산다고 잘 산 인생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남겼는가. 어떠한 가치를 낳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했는가.
그런 의미에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광선유포를 위해 사는 인생이 최고의 인생입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사는 일은 그 자체가 가장 큰 사회 공헌입니다. 자타 함께 행복해집니다. 불법은 즉 사회 그리고 신심은 즉 생활이며 모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법화경을 위해, 광선유포를 위해 움직여 이름을 떨치세요. 한정된 일생 동안 자신은 이만큼 완수했다는 후회 없는 역사를 만드세요. 남기세요.’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왕 싸울 바에는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시시합니다. 스스로 움직이고 기분 좋게 싸워야 비로소 기쁨도 솟아납니다. 기운이 솟습니다.
생기발랄하게 도전해야 합니다. 생기발랄하게 나아가는 곳에 복운이 쌓입니다. ‘불법은 승부’ ‘불법은 싸움’입니다. 생기발랄하게 싸운 사람이 마지막에 반드시 승리합니다. ‘신심근본’ ‘제목근본’으로 꿋꿋이 사는 사람이 마지막에 반드시 승리합니다.
(9-9) 법화경보다 뛰어난 병법은 없다
묘법을 위해 꿋꿋이 사는 사람은 도중에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에는 위대한 인간혁명을 이루고 인생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습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본부간부회, 전국청년부간부회 스피치에서
2005년 9월 14일,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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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근본목적은 광선유포 확대입니다. 어서에 ‘광선유포’라고 수없이 씌어 있는 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광선유포의 대지’를 얼마나 넓힐 수 있느냐가 진정한 승부입니다. 우리는 불법의 인간주의와 생명존엄 사상을 바탕으로 어디까지나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 구축을 목표로 합니다. 그 목표를 향해 한 걸음이라도 두 걸음이라도 나아가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물론 인생은 끊임없는 투쟁이기에 여러 차원에서 ‘이기는’ 때도 ‘지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강해도 끝없이 계속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승부’입니다.
은사 도다 선생님이 유언처럼 남기신 시가 있습니다.
이기고 지는 일은 / 인간 생명의 / 상사(常事)이지만
마지막 승리는 / 부처에게 기원하노라
인생은 깁니다. 그 동안에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법화경보다 뛰어난 병법은 없다.’는 묘법을 수지했습니다. 도중에 승부가 어떻든 마지막에는 법화경을 수지한 사람이 반드시 승리합니다. 신심근본으로 꿋꿋이 산 사람이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것이 불법의 법칙입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기든 지든 거기서 다시 ‘다음 승리의 인(因)을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그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늘 ‘지금’이 출발입니다. 우리 동지와 이체동심으로 단결하여 유유히 명랑하게 ‘새로운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곳에 ‘본인묘(本因妙)’라는 불법의 실천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