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제에 대하여
니치렌 대성인(日蓮大聖人)이 말씀하셨다.
"입으로 묘법(妙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佛性)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梵王), 제석(帝釋)의 불성은 불리어서 우리를 지키시고, 불보살(佛菩薩)의 불성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어서 557쪽)
근행은 맑고 산뜻한 음성의 울림으로, 자신이 지닌 부처의 생명을 불러 깨워 원초에 솟아오르는 해처럼 빛내는 의식이다.
근행에서 독송(讀誦)하는 방편품(方便品)의 '제법실상(諸法實相)'도 우리 생명이 곧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모습'이라고 가르치셨다.
수량품(壽量品) 자아게(自我偈)도 '자아득불래(自我得佛來)'의 '자(自)'로 시작해 '속성취불신(速成就佛身)'의 '신(身)'으로 끝난다. '자신(自身)'의 영원한 생명찬가(生命讚歌)이다.
헤매는
어두운 사회
그 속에서
나의 새벽은
근행이로구나
근행은 니치렌 대성인의 생명인 묘호렌게쿄 진수의 힘을 자신의 색심(色心)에 뛰게 하는 원천이다. 부처의 용기와 지혜가 용현하지 않을 리 없다. '환희 중의 대환희'가 솟아오르지 않을 리 없다.
아무리 삼장사마(三障四魔)가 덤벼들어도 근행의 법좌(法座)에 나가면, 사자분신(師子奮迅)의 힘을 내어 반전공세(反戰攻勢)에 나서라는 신호의 새벽종이 된다.
범천 * 제석, 보현보살, 약왕보살, 석가불 * 다보불의 대군도 내 편으로 삼아,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대성(大城)과 같은 생명으로 반드시 승리하는 활로를 열 수 있다.
그중에서도 창가(創價)의 어머니의 기원만큼 강한 것은 없다. 저 '오사카사건'에서 무죄판결을 쟁취하기까지 84회에 이르는 공판을 바라보며, 축인근행(丑寅勤行)을 이어오신 간사이 어머니들의 필사적인 기원을 어찌 잊겠는가.
- (법련 여는 글, 2007년 1월호), '기원'은 전진승리의 힘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근행 * 창제도 자식이 어버이를 그리워하듯,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런 마음 정직한 기원과 소원이 그대로 어본존에게 통하여 감응(感應)되어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가족이라면 한마디 '굳모닝(아침인사)' '굳 이브닝(저녁인사))' 등의 인사를 주고 받는 것만으로 마음이 통합니다.
그와 같이 비록 한번의 제목이라도 거기에 담겨진 '불자(佛子)'인 우리들의 신심의 '마음'은 어본존에게 반드시 통합니다.
하물며 진지하게 창제를 거듭하고 근행을 할 때 그 공덕은 무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요이상으로 형식에 치우쳐 거북스럽게 신심 즉 생활이 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피곤해서 일찍 쉬는 편이 좋은 경우라든가,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는 방편품 * 자아게만의 근행이라도, 또는 창제만이라도 했을때, 결코 '벌(罰)을 받지 않는가'등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불도수행(佛道修行)이므로 "태만해도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要)는 조금이라도 많이, 또 깊게 어본존을 배견하고 창제해 나아가자라는 '신심'이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그 '마음'은 반드시 형체(形體)로 나타나 진실한 실천의 모습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영국광포28주년기념 대표자회의 (1989.5.24)
대성인은 "苦(고)는 苦(고)라고 깨닫고 樂(낙)은 樂(낙)이라고 열어서 苦樂(고락) 함께 아우러 생각하여 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고 계시라 이 어찌 自受法樂(자수법락)이 아니겠느뇨" (어서1143쪽)
괴로울 때도 제목, 즐거울 때도 제목입니다. 고락을 뚫고 지속하는 것입니다. '고락 함께"가 매우 깊은 뜻입니다. '고'에 직면해도 물러서면 안 됩니다.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의 '고'를 그대로 '고'라고 깨닫습니다. 그것은 단념하는 것도 도피하는 것도 아닙니다. 현실을 타협없이 직시하고, 그 현실에 창제 근본으로 용감히 도전하는 신앙자의 기본 자세가 나타나 있습니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신앙이란 끊임없는 현실변혁을 위한 신심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경애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날이 다달이 태만하지 않고 연마한다면 '무상보취 불구자득' 그대로 자연히 터득할 것은 틀림없습니다.
-일생성불초 강의-
제목의 공덕은 양(量)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찰 때까지 부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서에 이만큼 제목을 부르라고 양을 정하신 말씀은 없습니다. 기원은 ‘견고한 마음’이고 ‘신심의 후박(厚薄)이며 ‘뜻’과 ‘일념’으로 결정 됩니다.
단, 본인이 결의해서 목표량을 정하는 것은 신심의 표현입니다. 자기가 결의한 만큼 창제하며 끊임없이 깊이 결의해야 합니다. “일야조모(日夜朝暮)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어서 384쪽)라고 말씀하셨듯이 끊임없이 창제행을 지속한 사람이 반드시 승리합니다.
자신의 생명변혁을 잊고, 굳은 일념이 없는 ‘의존’이나 ‘도피, 겁쟁이의 마음’으로 현실생활의 노력이나 도전을 포기하고, ‘덩굴째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신앙은 불법(佛法)의 본의(本義)에서 어긋 납니다.
창제행은 우리 생명을 변혁하는 ‘인간혁명’의 수행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일념을 깊이 해서 제천선신을 움직이고 절대승리를 실현하는 ‘서원(誓願)의 제목’이 대성인불법의 창제행입니다.
“일제중생,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이외의 유락(遊樂)은 없느니라.”(어서 1143쪽)는 말씀대로 제목에는 매우 깊고 광대한 생명변혁의 공덕이 있습니다.
우리 창가학회 회원은 그 최고의 즐거움을 불교 역사상 가장 깊게 자각하고 만끽했습니다. 최고의 불도수행이고 환희의 원천이 되는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부르는 일이 얼마나 복덕이 넘치는가. 이보다 깊은 생명의 기쁨은 없습니다.
윤타왕과 백마, 백조의 고사는 생명력의 근본을 여는 가르침이며, 동시에 제목에는 사회에 근본적인 활력을 주는 힘이 있다는 것도 나타냈습니다.
-소야전답서(僧谷殿答書) 강의 (법련 2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