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자체가 즐겁다" 라는 자기자신의 생명경애를 만드는 것이 불도수행이다
괴로움이라는 장작을 연료로 해서 환희와 지혜와 자비의 불길이 타올라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불을 붙이는 것이 묘법이며 신심이다. 더욱이 불계, 보살계, 범천, 제석 등의 선(善)의 생명은 창제에 의해서 그 빛남이 늘어나고, 자꾸자꾸 위광세력이 넓혀간다. 우리 소우주 속의 대일천도 대월천도 찬란하게 대광을 발산하여 생명의 어둠을 밝게 한다.
어본존을 배견하면 나의 소우주의 문은 그 자리, 그 때에 대우주로 전개되고, 전 우주를 내려다보는 그러한 유유한 대 행복감을 맛볼 수가 있다. 대충실감, 대 환희, 일체를 손바닥에 넣은 듯한 대 확신을 실감 할 수 있다. 대우주에 에워싸여져 있던 소우주가 대우주를 도리어 에워싸 간다.
묘법(妙法)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대법(大法)이며, 이것을 가진 사람은 늙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는다. 죽음에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신심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한, 생명력의 불은 영원히 계속 타오른다. 생사(生死)를 초월한 대 확신으로 살아 갈 수 있다. 생애, 희망을 불태우며 끝까지 살아간다. 그 원동력의 엔진이 신심이다.
인생 참된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어렵다. 철학적인 과제다. 어떠한 즐거움도 곧 괴로움으로 바뀔 수 있다. 즐거움의 시간은 짧고, 괴로움의 시간은 길다. 또한 세간적인 즐거움은 생명의 피상적인 즐거움이며, ‘환희(歡喜)중의 대환희(大歡喜)’(어서788쪽)인 묘법(妙法)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즐겁다’고 단언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생명경애(境涯)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위한 불도수행(佛道修行)이다.
어디를 가도 인생의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면 극복하는 수 밖에 없다. 극복 할 수밖에 없다면 즐겁게, 기세 좋게 살아가자. 끝까지 분발해가자.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힘의 원동력인 제목을 끝까지 올려가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
겁쟁이는 부처가 될 수 없다. 사자왕의 마음을 갖지 못하면 부처가 되지 못한다. 힘들면 힘들수록 용감하게 일어선다. 학회정신의 진수는 여기에 있다.
어떠한 때라도 즐거워 할 수 있는 생명경애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마음으로부터 웃으면서 ‘ 아! 즐거웠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라며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신심의 경애다. 그런 사람은 곧 태어난다. 자기가 바라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는 장소에 태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