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다이사쿠 SGI 지도선집-8월호
제4장 ‘고뇌를 뚫고 환희를 향해’
이 장을 읽기 전에
신앙은 무한한 희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본디 아무런 고난과 고뇌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럼 밀려오는 파도처럼 덮쳐오는 고난과 고뇌에 어떻게 맞서면 좋을까요.
외면하고 도망칠 것인가. 모든 것을 단념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도전할 것인가. 인생의 행불행(幸不幸)은 그 자세로 결정됩니다.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은 여러 법리(法理)를 통해 어려움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성불이라는 위대한 경애를 열 기회’라고 받아들여 용기를 지니고 맞서라고 가르치십니다.
예를 들어,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법리에서는 ‘번뇌’를 끊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보리’로 열 수 있다고 설합니다.
또 ‘변독위약(變毒爲藥, 독을 바꾸어 약으로 한다)’이라는 법리에서는 고뇌(苦惱, 독<毒>)를 바꾸어 그 몸 그대로 성불(成佛)이라는 인생의 궁극적인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약<藥>)고 설합니다.
그리고 전중경수(轉重輕受, 무거운 것을 바꾸어 가볍게 받는다)라는 법리에서는 과거세(過去世), 현세(現世), 내세(來世)라는 삼세(三世)의 생명에 입각하여 과거세에 저지른 중죄(重罪)를 전환해 현세에서 가볍게 그 과보(果報)를 받는 것이므로 현세에서 숙명전환(宿命轉換)에 도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번 장에서는 이러한 법리를 바탕으로 하면서 괴로움이나 고민이 클수록 강한 신앙의 힘으로 커다란 행복, 커다란 환희로 전환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4-1) 인생이라는 ‘승리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자신
어려움을 이겨내고 인생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절(節)에서는 인생이라는 ‘승리 드라마’의 각본을 쓰고 연기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불법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리’를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인생철학에 관해 말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미국 대표자회의 스피치에서
(1993년 3월 9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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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승리 드라마’를 쓰는 ‘각본가’입니다. 그리고 ‘주인공’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극작가답게 몇 번이나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온 세상은 무대이고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모두 배우에 불과하다.”(《뜻대로 하세요》)
불법(佛法)은 인생 드라마의 ‘각본’을 쓰는 사람도 ‘연기’하는 사람도 자신이라고 가르칩니다. 다른 누군가가 각본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쓰고 자신이 명배우로서 연기합니다. 이것이 ‘일념삼천’의 법리에 담긴 매우 적극적인 인생철학입니다.
자신이 작가이자 주인공입니다.
멋진 드라마를 연기하려면 눈앞에 또렷하고 선명하게 떠오를 때까지 ‘각본’을 머리에 철저히 입력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속으로 리허설(연습)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승리 드라마’의 목표(입시나 회사 성적 등)를 종이에 써서 마음에 배어들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도 있겠지요.
어느 남자아이는 어릴 때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가 짧아졌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어떠한 일도 절대 “너는 할 수 없어.”라든가 “너에게는 무리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 다른 아이와 똑같이 하게 하고 운동도 시켰습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면 네가 하기도 전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주의나 관념론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능력(잠자고 있는 힘)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학창시절에 우수한 풋볼 선수가 되고 사회에서도 성공했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막심 고리키가 “재능은 자신을 믿는 일이다. 자신의 힘을 믿는 일이다.”(《밑바닥에서》) 하고 말했는데 참으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영국의 소설가 월터 스콧(1771년~1832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겁이 많은 인간은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다’ ‘할 수 없다’는 일념은 모든 것을 정말로 ‘불가능’하게 합니다. 부모가 늘 자식에게 “너는 가망 없는 아이다.” 하고 말하면 아이도 그렇게 믿어 버려 정말로 ‘가망 없는 아이’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대성인은 화엄경(華嚴經, 대승불교의 경전)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솜씨 좋은 화사(畵師)가 종종(種種)의 오음(五陰)을 만들 듯이 일체세간중(一切世間中)에 법(法)으로서 만들지 않음이 없도다.”(어서 564쪽) 즉 “뛰어난 화가가 자유자재로 여러 가지 모습을 그리듯이 ‘마음’은 세상의 온갖 현상을 만들어낸다.”
“마음 외(外)에 다른 법(法)이 없고”(어서 564쪽) 즉 “마음 밖에 다른 법은 없다.(모든 현상은 마음의 산물이다.)”
대성인의 편지를 배독하면 늘 상대에게 적합한 ‘예’를 인용하고 ‘문증’을 들어 어떻게든 ‘마음’을 바꾸고 ‘일념’을 강하게 하여 ‘확신’과 ‘자신감’을 갖게 하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늘 태양처럼 ‘희망’과 ‘격려’를 보내십니다.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겠지요.
‘순조롭게 승리한 사람은 조건이 좋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대체로 ‘만약 나에게 그것이 있었다면’ ‘만약 내게 이러한 문제가 없었다면’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푸념입니다.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실업가가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늘 ‘문제가 많아서’라고 한탄하는데, 실은 내가 아는 곳에 ‘사람이 1만 명이나 있는데도 어느 누구도 문제를 안고 있지도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는 곳’이 있다네. 소개해 줄까?”
친구가 “꼭 부탁하네.” 하고 대답하자 실업가가 친구를 데려간 곳은 묘지였습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반드시 ‘괴로움’이 있고 ‘과제’가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 ‘과제’를 ‘어떻게’ 이겨내는가. 그 도전으로 인생은 더 풍요로워집니다.
불법에서는 ‘번뇌즉보리’를 설합니다. ‘괴로움’이 큰 만큼 창제의 힘으로 더욱 더 큰 ‘행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석존시대에 한 여성이 사랑하는 자식을 병으로 잃었습니다. 슬픈 나머지 정신을 잃고 죽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 거리를 헤맸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 아이에게 약을 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여성을 가엾이 여겨 석존에게 데려가자 석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알겠다. 좋은 약을 주겠다. 마을에 가서 흰겨자씨를 얻어 오너라. 단, 반드시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에서 얻어 와야 한다.”
여성은 온 마을을 한 집 한 집 돌며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은 한 집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성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자신의 슬픔만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깨닫기 위해 석존의 문하가 되어 마침내 성자로 칭송받았습니다.
석존은 이렇게 방편을 사용해 자신만의 슬픔에 사로잡힌 여성의 마음을 풀어 주고 해방시켜 삼세의 생명관을 바탕으로 한 더욱 커다란 지혜에 눈 뜨게 했습니다.
어쨌든 ‘경애’를 열어야 합니다. 인간은 늘 자신의 일만 생각하면 점점 ‘작은 마음’ ‘작은 자아’로 굳어지고 맙니다.
‘법을 위해, 사람을 위해, 사회를 위해’ 라는 열린 커다란 목적을 향해 행동하면 ‘일심(一心)의 묘용(妙用)’으로 ‘커다란 마음’ ‘커다란 자아’가 구축됩니다. ‘커다란 마음’은 즉 ‘큰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작은 마음’일 때 압박으로 느끼던 괴로움도 가볍게 느끼고 유유히 내려다볼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일심의 묘용’을 멋지게 상쾌하게 증명하는 인생을 살기 바랍니다.
(4-2) 번뇌의 ‘장작’으로 행복의 ‘불꽃’을
사람은 자칫 ‘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절에서는 “번뇌(煩惱)의 장작을 태워서 보리의 혜화(慧火)가 현전(現前)하니”(어의구전. 어서 710쪽)라는 ‘번뇌즉보리’의 법리를 나타낸 어서를 바탕으로 묘법을 믿는 강한 일념으로 제목을 꿋꿋이 부르면 어떠한 ‘괴로움’도 ‘행복’의 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생명과 불법을 말하다>에서
(1986년 11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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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에서는 ‘번뇌즉보리’라고 설합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번뇌는 ‘괴로움’이자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욕망입니다. 보리는 ‘행복’이고 경애가 열리는 것입니다.
보통 번뇌와 보리는 제각기입니다. 고뇌와 행복은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니치렌대성인불법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뇌라는 ‘장작’을 태워야 비로소 행복의 ‘불꽃’을 얻을 수 있다고 설합니다.
행복의 빛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목을 불러 ‘장작’을 태워야 합니다.
제목을 부르면 번뇌가 전부 행복의 에너지로 바뀝니다. 전진하기 위한 연료로 바뀝니다.
가장 괴로워한 사람이 가장 행복해집니다. 가장 고뇌한 사람이 가장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불법입니다. 그러므로 굉장한 것입니다.
고뇌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의 일도 있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이것도 고뇌입니다. ‘친구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 이것도 고뇌입니다.
나아가 더욱 크게 ‘세계의 평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새로운 세기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가.’ 이것은 위대한 고뇌입니다. 어떤 고뇌도 제목을 하면 전부 자기 생명의 가솔린으로 바뀝니다. 생명력으로 바뀝니다. 인간성으로 바뀝니다. 복운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많이 고뇌하고 제목을 마음껏 부르면서 성장하면 됩니다.
신앙은 목표라는 고뇌의 ‘산’을 만들고 ‘산’을 목표로 그 ‘산’을 오릅니다. 그렇게 산을 다 오를 때마다 큰 사람이 되는 궤도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