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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SGI 회장 지도선집(指導選集)-법련 7월호

혜광리 2014. 7. 2. 20:52

 

 

 

 

 

 

 

이케다 SGI 회장 지도선집(指導選集)

 

행복과

평화를

창조하는

지혜

 

1부 행복을 위한 지침

 

3장 생명변혁의 실천

 

이장을 읽기 전에

니치렌 대성인불법(日蓮大聖人佛法)'생명변혁(命變革)의 원리'를 밝힌 지난 장()에 이어, 이번 장에서는 생명변혁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실천인 근행에 관해 말합니다.

근행은 어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제목을 부르는 창제와 더불어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 2와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16을 독송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은 불교(佛敎)의 지혜와 자비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전(經典)입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이 법화경 문저(文底)에 담긴 중요한 법을 남묘호겐게쿄로 나타내고 신심과 수행의 대상으로 어본존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케다(池田) SGI 회장은 대성인이 설한 '()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리(法理)를 바탕으로 남묘호렌게쿄는 생명과 우주를 꿰뚫는 근본법이고 근행은 자신의 생명과 우주가 어본존을 통해 교류하는 의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라고 창제할 때 우리생명이 대우주의 '묘법(妙法)의 리듬'과 합치하여 한없는 지혜와 자비 그리고 용기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이 어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근행에는 모든 불도수행의 의의(意義)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설령 법문을 깊이 이해하지 못해도,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수행을 하지 않아도 근행실천을 근본적인 삶의 자세로 하면 자신의 경애를 한 없이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대성인불법은 민중에게 열린, 민중을 위한 불법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인생을 변혁하려면 근행에 힘써야 할 뿐 아니라 용기 있는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3-1) 근행은 우주와 교류하는 의식

 

이 절()에서는 "이 몸속에 고루 천지(天地)를 모방(模倣)함을 아느니라."(어서 567), 자신의 생명과 우주의 상호관계를 설한 불전(佛典)의 기술(記述)에 입각해 생명과 우주를 꿰뚫는 근본법이 남묘호렌게쿄라고 제시합니다. 그리고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실천을 통해 자신의 생명에 한 없는 묘법의 힘이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청춘대화>에서

(19993월 발간)

 

 근행창제는 자신과 대우주가 교류하는 의식입니다. 어본존을 근본으로 하여 자기라는 '소우주'속에 '대우주'의 생명력을 생생하게 퍼 올리는 작업이 근행입니다.

자신은 살아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우주도 거대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생명 즉 우주요 우주 즉 생명입니다. 우리인간도 대우주와 똑같이 하나의 생명이며 '작은 우주'입니다.

어떤 학자는 "인간의 몸은 별과 똑같은 것으로 되어있다."고 하여 인간을 '별의자식'이라고 불렀습니다. '소우주'입니다. 물질만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와 파괴의 작용' '생과 사의 리듬'도 우리 몸을 꿰뚫고 있습니다. 또 중력의 법칙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 그밖에 모든 법칙도 하나의 소우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주위를 3655시간 48분 만에 일주합니다.

엄연한 질서가 있습니다.

인체의 세포도 60조라고 하는데, 날마다 질서 정연하고 바르게 운행해야 건강한 생명상태입니다. 불가사의하고 절묘한 움직임입니다. 지구는 태양주위를 돕니다. 조금이라도 궤도에서 벗어나면 큰일 납니다. 아니, 지축(地軸)이 조금만 기울어져도 생물은 모두 멸종위기를 맞겠지요. 그만큼 미묘하고도 엄연한 대우주 즉 생명의 '법칙'이 있습니다. 소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實在)하는 법을 탐구한 것'이 과학이고 그 성과를 응용해서 만든 것이 다양한 기계(機械)입니다. 예를 들어 배는 보이지 않는 '부력'의 법칙을 응용해서 만들었고, 비행기는 '양력'의 법칙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전파의 법칙이겠지요. 그것들은 우주의 부분적인 법칙입니다.

그것과 달리 불법은 물심(物心)의 모든법의 근본인 '생명의 대법(大法)'을 탐구하고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묘법입니다. 묘법은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실재합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이 묘법의 힘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어본존을 도현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도다 선생님은 "황송하게도 어본존은 행복제조기에 비유할 수 있다."고 알기 쉽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본존에게 근행창제를 하면 소우주인 자신이 훌륭하게 대우주와 조화를 이룹니다. 숭고한 의식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보물창고'를 여는 작업입니다. 자기생명의 대지에 생명력이 솟구치는 샘을 파는 작업입니다. 콸콸 솟아오르면서 마르지 않는 지혜와 자비 그리고 용기의 원천을 파는 작업입니다.

'우주' 그 본체는 남묘호렌게쿄입니다. '우리 생명'도 남묘호렌게쿄가 현현(顯現)한 것입니다. 그러고 어본존도 남묘호렌게쿄의 당체입니다. 세 가지 모두 남묘호렌게쿄이며 본디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면 어본존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명과 우주가 정확히 톱니바퀴를 맞추어 행복한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춘하추동 365, 대우주의 리듬에 합치하여 어떠한 괴로움도 이겨 낼 수 있는 '생명력''지혜' 그리고 '복운'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불계'라는 생명력의 엔진을 폭발시키면서 장벽을 타개하여 앞으로 앞으로 희망의 방향, 정의의 방향을 향해 씩씩하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3-2) 민중에게 열린 수행

 

일반적으로 불교는 실천이 어려운 여러 수행법을 설합니다. 그에 비해 니치렌대성인은 모든 수행의 의의가 창제에 집약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절에서는 대성인의 어서를 바탕으로 형식에 얽매인 수행이 아닌 신심근본의 창제가 바로 성불의 직도(直道)라고 강조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이탈리아 대표자회의 스피치에서

(199272, 이탈리아)

치렌대성인 문하 중에 도키조닌이라는 신도(信徒)가 있었습니다.

대성인이 도키조닌에게 보낸 편지 중에 말법의 올바른 수행에 대해 말씀하신 <사신오품초>가 있습니다. 대성인은 그 편지에서 말법의 수행은 "()의 일자(-)를 간요(肝要)로 삼으셨느니라."(어서 339)"신의 일자를 구극(究極)으로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대성인 불법의 핵심은 형식'이 아닙니다. '마음'입니다. '신심'이 근본입니다. 그러고 대성인은 어본존을 믿고 '창제'하는 수행에 모든 수행이 포함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로서 알기 쉽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이라는 이자(二字)에 육십육지방(六十六地方)의 인축재(人畜財)를 섭진(攝盡)하여 하나도 남김이 없으니"(어서 341)"일본이라는 두 문자에 일본 육십육개지방의 사람, 동물, 재보의 일체가 다 포함되어 있어 하나도 남김이 없다."

마찬가지로 '남묘호렌게쿄'라는 제목에 법화경의 일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창제행이 그대로 성불의 직도가 됩니다.

형식에 사로잡힌 그밖의 수행은 지엽(枝葉)의 수행이며 오히려 신심을 방해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제목의 깊은 뜻을 몰라도 제목의 공덕을 그대로 몸에 나타낼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마치 "소아(小兒)가 젖을 빠는데 그 맛을 몰라도 자연히 몸을 이익(利益)케 하며"(어서 341)"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데 그맛(성분)을 몰라도 자연히 그 몸에 이익을 얻는(성장하는)것과 같은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법문을 이해하지 못해도 의심하지 않고 제목을 부르면 자연히 제목의 위대한 힘을 몸에 갖출 수 있습니다. 대성인 불법은 '민중'에게 열린 '민중을 위한 불법'입니다.

"묘호렌게쿄의 오자(五字)는 경문(經文)이 아니고 그 의()가 아니며 오직 일부(一部)의 의일 뿐이라."(어서 342) "묘호렌게쿄의 오자는 단순한 경문이 아니다. 그 의의도 아니다. 다만 법화경 전체의 마음이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제목은 법화경의 마음이며, 근본적으로는 대성인의 혼()입니다. 따라서 그 의미를 몰라도 어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르면 대성인의 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에 남묘호렌게쿄라는 대성인의 생명을 용현시킬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3-3) 창제는 인생을 승리하는 힘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창제에 힘써야 할까요. 이 절에서는 소설 <·인간혁명>에서 주인공 야마모토 신이치가 이제 막 신심을 시작한 페루동지에게 말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반드시 이긴다고 마음을 정하고 사자가 으르렁 거리듯이‥‥‥", 구체적으로 조언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소설 <·인간혁명> 11'개간'에서

(200210월 발간)

원한 행복을 구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의 승리를 거두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한평생 묘법과 함께, 광포와 함께, 학회와 함께 살고 목숨을 건 진지한 승부로 끝까지 싸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인생의 승리자가 되어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은 그것을 위한 요체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조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제목입니다. 건강도, 용기도, 지혜도, 환희도, 향상심도 또는 자신을 다루는 일도 생명력 여하로 결정되어 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력을 무한하게 용현하는 원천이 바로 창제입니다. 그러므로 창제를 근본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막힘이 없습니다.

여하튼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제목을 끝까지 불러야 합니다. 제목은 우주근본의 힘입니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백마가 천공을 달리듯, 경쾌하고 상쾌하게 창제소리를 울려야 합니다.

부처와 대면하는 것이므로 엄숙한 마음을 잊으면 안 되겠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어본존에게 부딪치면 됩니다. 어본존은 대자비의 부처님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고민하는 것, 희망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원하면 됩니다.

힘들 때, 슬플 때, 괴로울 때는 아이가 어머니 팔에 온몸으로 매달리듯이 '본존님!'이라고 부르며 순수하게 부딪치면 됩니다.

어본존은 무엇이든 들어주십니다. 마음속을 다 털어놓듯이, 대화하듯이 계속 제목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옥 같은 괴로움도 거짓말처럼, 이슬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만약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면 진심으로 사죄하고 고쳐야 합니다. 똑 같은 실수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결의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또 승부를 낼 때에는 반드시 이긴다고 마음을 정하고 사자가 으르렁 거리듯이, 아수라가 사납게 날뛰듯이, 대우주를 곧 흔들기라도 할 듯이 끝까지 기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의 밤에는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깊은 감사의 제목을 올려야 합니다.

어서에는 "조조(朝朝)부처와 함께 일어나며 석석(夕夕)부처와 함께 눕고‥‥‥‥(어서 737)하고 씌어있습니다. 제목을 끝까지 부른 사람은 언제나 어본존과 함께 있습니다. 그것도 현세(現世)뿐 아니라 사후(死後)에도 어본존과 제천제불이 지켜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 오저로부터 안도할 수 있고,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유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꿋꿋이 살아가면 됩니다.

제목은 고뇌를 환희로 바꿉니다. 더욱이 환희를 대환희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무슨 일이 있어도 오로지 제목을 끝까지 불러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3-4) 법희경의 핵심은 방편품 수량품에

 

근행을 할 때는 법화경 방편품과 수량품을 독송합니다. 이 절에서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모두 부처라는 법리를 밝힌 방편품과 영원한 생명의 철리(哲理)를 설한수량품의 의의를 말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세계평화기념근행회 스피치에서

(200298, 도쿄)

아침저녁으로

방편품과

수량품

우주의 곡()

맞춰 즐겨라

 

찍이 나는 이렇게 읊은 적이 있습니다. 불법의 최고봉인 법화경중 그 진수인 방편품과 수량품을 독송하고 불법의 구극인 대법이자 우주의 근본법칙인 남묘호렌게쿄를 낭랑하게 봉창하는 일이 얼마나 굉장한 행복과 평화의 창조인지 모릅니다.

법화경은 '일체중생의 성불'을 위해 설해진 경전입니다. 문저로 배독하면 법화경은 '말법만년 진미래제'에 걸쳐 '일염부제(전 세계)' 일체중생의 성불을 여는 근원의 일법(一法)인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설명한, 말하자면 '설명서'로서 심원(深遠)한 의의가 있습니다.

그 핵심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설한 '방편품'과 구원실성(久遠實成)을 설한 '수량품'에 담겨있습니다.

'방편품'에서는 남묘호렌게쿄의 지혜가 심심무량(甚深無量)하다고 찬탄하며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라는 법리를 분명히 밝힙니다.

특히 '제법실상, 십여시(十如是)'부분은 끝없이 변화하는 모든 생명(제법)이 하나도 빠짐없이 남묘호렌게쿄의 모습(실상)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십계(十界)의 의정(衣正)의 당체(當體)가 모두 일법도 남김 없이묘호렌게쿄의 상()이라고"(어서 135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디 어떠한 중생도 모두 묘법의 당체입니다. 즉 제목을 부르고 광선유포(廣宣流布)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 반드시 부처의 생명이 됩니다.

어딘가 먼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특별한 자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있는 그곳에서 그 모습 그대로 대우주와 자신의 생명을 역동적으로 교류시키면서 본디 자신의 '실상' 즉 남묘호렌게쿄의 당체로서 그 모습을 빛냅니다. 그것이 근행입니다. 신심의 세계입니다.

거기에는 묘법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자비가 한없이 용현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량품의 '수량(壽量)'은 부처의 수명, 공덕을 전량(詮量)한다는 뜻입니다. 문저로 배독하면 '남묘호렌게쿄여래(南無妙法蓮華經如來)'의 구원부터 영원에 이르는 수명과 공덕의 양을 자세히 재고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영원한 생명'이 밝혀지고, 그것이 일체중생의 진실한 생명의 모습이라고 설합니다. 그리고 이 대법을 넓혀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일이 '지용보살'의 사명이라고 제시합니다.

특히 수량품의 '자아게'는 존극하고도 영원한 '자신'의 대생명력을 칭송하여 노래한 장대한 '()'입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자아게의 처음에 나오는 "자아득불래(自我得佛來)" (법화경 489)'()'와 마지막의 "속성취불신(速成就佛身)"(법화경 493)'()'을 합쳐 "시종(始終) 자신(自身)이고"(어서759)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자아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 '자신', 부처의 '생명'을 찬탄한 것이며 그것은 그대로 우리 자신의 삼세영원에 걸친 자유자재의 경애를 칭송하여 노래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내 생명의 본디 모습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생사란 무엇인가.'등과 같은 모든 사상, 철학, 종교의 근저(根底)를 이루는 궁극적인 생명의 명제에 정면으로 답한 것이 자아게입니다.

여기에 전 인류와 전 생명을 영겁토록 비추는 희망과 환희의 법리가 있습니다.

자아게에는 "아차토안온 천인상충만(我此土安穩 天人常充滿: 나의 이 땅은 안온하고 천인이 항상 가득하니)" (법화경 491)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이 현실사회는 큰 불에 타는 듯한 괴로움이 아직도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속에서도 영원한 생명철리를 내걸고 인류가 영원한 이상으로서 바라던 안온하고 평화로우며 행복한 세계를 반드시 만들자는 것이 광선유포 운동입니다. 여기에 많은 철학자와 종교인 그리고 평화학자 등이 바라던 전 인류가 행복하게 살권리를 21세기에 확립하는 길이 있습니다.

(3-5) 근행이 생명을 청정하게

이 절에서는 근행이 생명을 연마하는 근본법이라고 제시합니다. 근행을 실천하면 지각(智覺), 감각(感覺)의 기능인 육근(<>, <>, <>, <>, <>, <>)이 정화되어 생명을 청정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예술부총회 스피치에서

(1987510, 도쿄)

법이 바로 생명을 연마하는 근본입니다. <일생성불초>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비유컨대 암경(闇鏡)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일념무명 (一念無明)의 미심(迷心)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명경(明鏡)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日夜朝暮)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어서 384)

"예를 들면 흐린 거울도 닦으면 옥과 같이 빛난다. 미혹에 빠져 괴로워하는 생명은 닦지 않은 거울과 같다. 이것을 닦으면 반드시 진실한 깨달음을 얻는 지혜의 명경이 된다. 깊이 신심을 일으켜 아침에도 저녁에도 늘 게으름 피우지 말고 생명을 닦아야한다. 어떻게 닦으면 좋은가. (어본존에게) 남묘호렌게쿄라고 (자행화타에 걸친)제목을 부르는 일이 생명을 닦는 일이다."

현대는 악연(惡緣)이 끊이지 않는 사회입니다. 청정한 생명도 금세 흐려지고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연마하는 이 근본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끝까지 연마한 생명에는 지혜가 빛납니다. 그 지혜는 인생을 '승리'로 이끄는 빛이 됩니다. 법화경 법사공덕품 제19에는 묘법을 수지한 사람의 지혜를 "또 깨끗하고 밝은 거울에 온갖 색상이 보이듯이"(법화경 547)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청정하고 밝은 거울이 모든 물체의 상()을 분명히 비추듯 연마된 생명은 세상의 모든 현상을 명료하게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은<어의구전>에서 이 경문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근청정(六根淸淨)의 사람은 유리명경(琉璃明鏡)과 같이 삼천세계(三千世界)를 본다는 경문이니라.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同類)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명경에 만상(萬象)을 비추는 것과 같이 지견(知見)하느니라."(어서 763)

유리는 칠보(七寶)의 하나입니다. 육근청정은 이 법사공덕품에 설해진 정법을 실천하는 사람의 공덕입니다. 요컨대 ', , , , , '의 육근이라는 지각과 감각기능 즉 생명전체가 청정하게 빛납니다.

단련되고 연마된 이 생명의 '명경'은 우주와 사회 그리고 인간전체를 빠짐없이 비춥니다.

'명경'은 근본적으로는 어본존을 말합니다. 즉 니치렌대성인의 생명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본존을 믿는 대성인 문하의 '일심(一心)의 명경'입니다.

여기에 신심의 중대한 의의가 있습니다. 강성한 신심은 생명의 색심(色心)을 가장 청정하고 가장 힘차게 향상시키며 바꿉니다.

중요한 점은 신심으로 정화된 생명이 인간으로서 '승리'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순간까지 꿋꿋이 신심을 관철해야 합니다.

 

 

 

 

 

 

 

 

 

 

 

 

 

 

 

 

 

 

 

 

     (3-6) 변혁은 기원에서 시작된다

 

이 절은 법화경 행자(行者)의 기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 니치렌대성인의 <기도초>를 강의한 내용입니다. 대성인 불법의 기원은 올바른 실천을 촉구하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하고 동시에 단지 기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도 함께 해야 비로소 현실의 인생을 변혁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기도초> 강의에서

(19771022, 세이쿄신문 게재)

러므로 법화경의 행자가 기원하는 기도(祈禱)는 울림이 소리에 응()하는 것과 같고 그림자가 체()를 따르는 것과 같으며, 밝은 물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고 방제(方諸)가 물을 끄는 것과 같으며,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는 것과 같고 호박(琥珀)이 먼지를 취하는 것 같으며, 밝은 거울이 물색(物色)을 비추는 것과 같으니라."(어서 1347) "따라서 법화경 행자가 하는 기원은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듯,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 깨끗한 물에 달이 비치듯, 방제(거울의 일종)에 물이 맺히듯,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듯, 호박에 먼지가 붙듯, 밝은 거울이 사물의 빛깔을 비추듯 반드시 이루어진다.“

법화경 행자의 기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단정 지어 말씀하신 글월입니다.

인용하신 비유가 모두 자연의 도리와 사실적인 모습인 것에서 니치렌대성인의 강한 확신이 느껴집니다.

소리에 메아리가 치듯, 몸에 그림자가 따르듯 법화경 행자의 기원이 있는 곳에 절대 결과가 나오지 않을 리 없습니다. 기원에 응해 자기생명의 색심이 회전하기 시작하고, 그것에 호응해 의보(依報, 자신의 생명을 둘러싼 환경세계)도 움직인다는 말씀입니다.

기원은 절대 관념이 아닙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세계는 관념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물질적인 관점으로만 사물을 파악한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사물의 관계 대부분이 우연이라는 혼돈 속에 매몰되고 말 것입니다.

불법의 투철한 영지는 그 혼돈의 깊은 곳에서 생명의 법을 찾아내어 사상(事象)을 내면에서 지탱하고 움직이게 하는 힘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목숨은 실로 일념(一念)에 지나지 않으므로 부처는 일념수희(一念隨喜)의 공덕 이라고 설하셨느니라."(어서 466)하고 말씀하시 듯, 순간순간 여여(如如)로 나와 자신을 내면에서 지탱하고 본원적인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문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기원은 이 본원적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명의 미혹과 대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 해도 좋겠지요.

따라서 기원은 올바른 실천과 끈질긴 행동을 관철하기 위한 원천입니다. 기원 없는 행동만큼 약한 것은 없습니다. 기원 없이 행동해도 한때는 순조롭고 잘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번 역경에 맞닥뜨리면 고목처럼 힘없이 쓰러져 버리겠지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신의 흉중(胸中)을 제패하겠다는 마음이 없어 현실사회의 흥망성쇠 속에서 나뭇잎처럼 번롱(翻弄)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고개는 절대 일직선으로 향상하는 길을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곡선을 그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성장의 발자취를 새깁니다. 기원은 그러한 과정에서 이겨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져도 역시 좌절하지 않는 강인한 용수철 같은 작용을 합니다.

그러므로 기원하는 사람만큼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강성한 기원에 담은 자신의 일념이 신력(信力)과 행력(行力)으로 나타나고 그것에 서로 호응해 불력(佛力)과 법력(法力)이 작용합니다.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기원은 인간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한사람의 깊은 마음의 변화는 결코 한사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또한 지역의 변혁은 결코 그 지역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일파(一波)가 만파(萬波)를 불러일으키듯 반드시 다른 지역에 변혁의 파동을 일으킵니다.

저는 그러한 전전(展轉)의 원점이 되는 최초의 일격이 한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불법은 도리'라고 말하는 깊은 뜻도 여기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비유 중 '소리''' 그리고' 밝은 물' 등은 기원하는 모습이고 '울림' '그림자' '물에 비치는 달' 등은 기원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양상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러한 자연의 이법(理法)을 비유로 들었듯이 법화경 행자의 기원은 생명세계의 필연적인 법이자 도리로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기원은 오만함이나 만심과는 전연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 정좌하고 창제하는 위엄 있는 모습에는 자신의 천박한 지혜와 얼마 안 되는 경험에 집착하는 마음을 뛰어넘어 부처의 지혜로 찾아낸 생명의 법과 자연 그리고 우주근원의 리듬에 명합하자는 겸허한 자세가 맥동합니다. 비굴해지지도 않고 모든 활동을 일념에 응축해 생명을 충전하면서 무한한 비약을 기약합니다. 그것은 인간생명의 가장 건강하고 충만한 모습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생활과 인생의 모든 문제를 어본존에게 끝까지 기원하며 도전해 갑시다.

기원이 중요하며 일체가 기원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기원을 잃고 자신의 생명을 회전시키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고상한 이론을 전개해도 그것은 모두 이론과 꿈 그리고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심이라 해도, 학회정신이라 해도 모두 현실을 강성하게 깊이 기원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불법에서 말하는 기원은 단지 기원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원은 온 생명력을 다해 쏜 화살이 목표를 맞히듯 행동과 실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행동 없는 기원은 관념이고 기원 없는 행동은 공전(空轉)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기원은 위대한 책임감에서 나온다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일에 대해서, 생활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무책임한 자세나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자세로는 결코 기원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과 관계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기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냉엄한 만큼 생활 속에서 직면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강성하게 기원하며 도전하기 바란다고 거듭 말씀드리며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3-7) ‘중요한 것은 제목을 부르는 자세? 아니면 횟수?’

 

"제목은 '자세''횟수'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요."라는 이탈리아 멤버의 질문에, 신심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족하며 충실하게 가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7·3'기념 북이탈리아대표간부회 스피치에서

(199273, 이탈리아)

10

만리라(이탈리아 화폐 단위)지폐는 1만리라 지폐보다도 가치가 높습니다. 10만리라 지페가 더 좋은 것은 당연 합니다.

진지하고 확신에 찬 창제가 중요합니다. 게다가 10만리라 지페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가장 좋습니다. (웃음) '' ''도 양쪽 다 중요합니다.

또 불법에서는 감응(感應)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전화는 감도가 좋으면 작은 목소리로 "여보세요‥‥‥‥" 하고 속삭여도 들립니다. 그러나 고함치듯 "여보세요! 여보세요!"하고 말해도 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원이 통하려면 꾸밈없는 모습으로 부딪쳐야 합니다.

어서에는 "대저 신심이라고 함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어서 1255) "무릇 신심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하고 씌어 있습니다. 지금 모습 그대로의 자신이면 됩니다.

대성인은 계속해서 "아내가 남편을 아끼듯이,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목숨을 버리듯이,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 아니하듯이, 자식이 어머니를 떨어지지 아니하듯이, 법화경 석가(釋迦), 다보(多寶), 시방(十方)의 제불보살(諸佛菩薩), 제천선신(諸天善神)등을 신봉(信奉)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것을 신심이라고 말하는 것이오."(어서 1255), "아내가 남편을 소중히 하듯,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치듯,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 아니하듯, 자식이 어머니에게서 떨어지지 아니하듯, 법화경과 석가불, 다보여래, 시방의 제불보살, 제천선신 등을 신봉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신심이라 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작(無作)이라고나 할까,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생각한 그대로를 기원해야 합니다.

대성인의 소원은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에 그런 대성인의 생명을 접하고 대성인의 생명에 직결하는데 행복해지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대성인의 사자(使者)로서 광선유포를 위해 일한 사람을 대성인이 지켜주지 않을 리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한 신심입니다. 창제도 '자신이 만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코 얼마만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등 형식이 아닙니다. 목표를 세우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피곤할 때라든지 졸릴 때, 마음도 공허하고 타성에 빠져 입만 움직일 뿐이라면 빨리 쉬고 생기발랄한 몸과 마음으로 창제하는 편이 가치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이 ', 상쾌하다'고 만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소원만족'의 인생이 열립니다.

 

 

 

 

 

 

 

 

 

 

 

 

 

 

 

 

 

 

 

   (3-8) '어떻게 해야 늘 의욕적으로 기원할 수 있을까?'

"SGI 회장과 함께 창제를 하니 제 꿈을 실현하고 싶은 의욕과 용기가 불끈불끈 솟아납니다. 어떻게 해야 늘 이러한 마음으로 창제하고 용기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라는 이탈리아 멤버의 질문에, 신심을 지속하면 반드시 최고로 가치로운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7·3'기념 북이탈리아대표간부회 스피치에서

(199173, 이탈리아)

령 한마디 제목이라도 전 우주에 통합니다. 더군다나 '마음''일념'을 담은 제목은 일체를 움직입니다. 일반적으로도 똑같은 '사랑합니다'라는 말이라도 마음이 담겨 있느냐, 말뿐이냐에 따라 전혀 다릅니다.(웃음)

어쨌든 '내 몸이 묘법의 당체이다.'라고 깊이 확신하고 부르는 제목, '나는 부처의 사자로서 묘법을 넓히기 위해 살아가겠다.'라고 일념을 정한 제목이 어본존에게 전해지지 않을 리 없습니다. 우주에 다다르지 않을 리 없습니다. 반드시 자유자재의 경애가 됩니다.

물론 어떤 일에서도 처음부터 '달인(達人)'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러 장벽을 뛰어넘고 또 뛰어넘어 계속 나아가야 비로소 '달인'과 같은 경애가 열립니다.

신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져서 결의가 약해질 때도 있습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 초조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계속 창제를 합니다. 소원이 이루어지든 금방 이루어지지 않든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제목을 부릅니다.

그렇게 신심을 지속한 사람은 마지막에 반드시 내게 "이것이 가장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최고의 길' '최고의 봉우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기쁨이고 사명이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소원만족의 인생'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묘법이며 신앙의 힘입니다.

'어본존은 왜 중요한가.' 그것은 어본존에 대한 '()'으로 우리흉중의 본존, 불계를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성인은 이 '어본존'은 오로지 자신의 '신심'속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묘법의 당체인 자신, 인간인 자신이 중요합니다. 그 흉중의 묘법을 나타내기 위해서 어본존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3-9) '열심히 해도 고민이 해결되지 않는데‥‥‥‥'

 

이절은 "고민을 해결하려고 열심히 근행하는데 전혀 해결되지 않습니다."라는 미래부원의 질문에 답한 내용입니다. "기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신심이라고 말한 뒤, 어본존의 공덕에는 곧바로 나타나는 '현익(顯益)'과 차츰 나타나는 '명익(冥益)'이 있고, 설령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더라도 끈질기게 기원하고 노력을 되풀이하면 반드시 자신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청춘대화>에서

(19993월 발간)

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신심입니다. 그러나 기원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루어지면 요술과 같은 신앙입니다.

'내일 복권에 당첨되었으면 좋겠다.' '내일시험에서 100점을 받고 싶다.'고 기원해도 간단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고 먼 안목으로 보면 기원한 만큼 전부 행복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눈앞의 소원이 곧바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 결과가 '가장 좋았다.'는 경우로 되어있는 법입니다.

불법은 도리요 신앙 즉 생활입니다. 신심 즉 현실입니다. 현실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데도 안이하게 소원이 이루어질 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숙업적인 것, 즉 과거에 뿌리 깊은 원인이 있는 고뇌를 바꾸려면 오랜 노력이 필요합니다.

'베인 상처가 낫는 시간''내장질환이 치유되는 시간'은 다릅니다. 또 약으로 치료하는 병이 있는가 하면 수술이 필요한 병도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신심의 정도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며 가지고 있는 숙명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기원하면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좋은 방향으로' 본격적인 희망이 분명히 열립니다.

어떤 일이라도 '당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장 이루어지면 그 사람은 타락합니다. 안이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림 그리기를 조금 좋아하는 사람이 쓱쓱 그림을 그려 곧바로 전시회를 연다고 해서 그림이 팔린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일은 안하고 놀고만 있다가 가난해진 사람에게 가난하다고 돈을 많이 주면 그 사람이 행복해 질까요.

건물도 이곳을 만지작거리고 저곳을 고치거나 하여 그때그때마다 몇 번이고 개축을 거듭하기보다 신축하는 편이 훨씬 튼튼하고 훌륭하게 만들어지고 오래갑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생명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신심입니다. 생명이 뿌리부터 강해지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복운이 확고해집니다.

어본존의 공덕에는 '현익''명익'이 있습니다. '현익'은 병이나 인간관계라든지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엄연하게 수호 받고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이익입니다.

'명익'은 나무가 서서히 자라듯이 또 바닷물이 차오르듯이 차츰 복운이 쌓여 풍부한 대경애를 구축해갑니다. 매일 보아도 변하지 않는 듯 하지만 몇 년간 긴 안목으로 보면 엄연히 행복해지고 있습니다.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명익 입니다. ''은 분명하게 눈에 보이는 것, ''은 여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목을 부르면 '현익'이 있는가 하면 '명익'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양쪽 다 반드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되어갑니다.

여하튼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기원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행복해집니다. 당장은 자신이 생각한대로 해결되지 않더라도 나중에 더 깊게 생각하면 '가장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훌륭한 '명익'입니다.

가령 '오늘 배불리 먹고 평생을 굶주리며' 살기보다 '지금 당장은 배불리 먹지 못해도 평생 유유하게 먹고살 수 있는' 인생이 훨씬 좋습니다. 니치렌대성인 불법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3-10) 근행을 못했는데

"근행을 못한 날은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미래부원의 고민에 "불법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지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조금씩이라도 도전을 지속하는 마음이 존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청춘대화>에서

(19993월 발간)

본존을 믿는 한, '' 같은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니치렌대성인은 "한 번의 제목에도 한없는 공덕이 있다."(어서 940, 취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진지하게 근행창제를 계속하면 얼마나 훌륭한 일이겠습니까. 전부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의무가 아닌 자신의 권리입니다.

어본존은 결코 기원해 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쪽에서 어본존에게 기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기원한 만큼 자신이 이득을 봅니다. 대성인은 제목을 몇 번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본인이 어떻게 자각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신심은 한평생 하는 것이니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여하튼 거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법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지 인간을 속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씩이라도 매일 하는 지속이 중요합니다. 매일 밥을 먹어야 에너지가 됩니다. 공부도 매일 해야 실력이 됩니다. '나날의 생활이 즉 인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날의 생활 즉 향상'이어야만 합니다. 그 추진력이 근행입니다.

근행이라는 행에 면려하는 것은 날마다 하는 '마음의 트레이닝'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청정하게 하고 엔진을 걸어 궤도에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 모두를 회전하게 하고 리듬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어본존 앞에'라는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조금이라도 제목을 부르자!' '매일 어본존에게 기원하자!'는 도전을 지속하는 마음이 존귀합니다.

 

 

(3-11) '경문과 제목의 의미를 모르겠는데‥‥‥‥'

 

"의미를 모르는 경문을 외우고 제목을 부른다고 어떤 가치가 있을까."라는 미국 멤버의 의문에, 설령 의미를 몰라도 근행창제는 어본존에게 통해 모든 부처와 보살에게 전해진다며. 말하자면 '부처와 보살세계의 언어'이며 근행창제를 통해 크나큰 행복과 충실 그리고 환희를 실감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미국 SGI 청년연수 스피치에서

(1990220, 미국)

문과 제목은 당연히 뜻을 아는 편이 좋습니다. , 그것은 법을 강하게 확신하기 위해서입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그 깊은 뜻을 전부 논리적으로 이해한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개가 짖고 새가 지저귑니다. 개에게는 개의, 새에게는 새의 세계의 소리가 있고 말과 신호가 있습니다.

사람은 들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지만 개는 개끼리, 새는 새끼리 틀림없이 서로 통합니다. 또 암호나 약어(略語), 외국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그 세계의 사람에게는 굉장히 잘 통합니다. 부부사이라면 "그거요, 그거!"만으로도 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웃음)

비록 사람이 의미를 모른다 해도 근행창제 하는 소리는 어본존에게 통하고, 삼세시방(三世十方)의 부처와 보살의 세계에 정확히 통합니다.

말하자면 부처와 보살세계의 언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어본존에게 근행창제 하는 소리는 모든 부처와 보살 그리고 제천선신에게 도달해 '좋구나, 좋구나,' '엑설런트(훌륭하다)!' '베리나이스!' 등이라고 기뻐하고 찬탄하며 전 우주가 우리를 복운의 광채로 에워쌉니다.

대성인은 '우리는 근행창제를 통해 날마다 앉은 그 자리에서 대우주를 여행하는 듯한 위대한 경애를 얻는다.'라는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의 제자, 단나로 되는 사람은 한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천축(天竺)의 영산(靈山)을 보고 본유(本有)의 적광토(寂光土)로 주야(晝夜)로 왕복(往復)할 것이니 기쁨은 말할 수 없도다."(어서 1343),"대성인의 출가(出家),재가(在家)의 문하가 되는 사람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법화경의 회좌(會座)가 열린 인도의 영취산(靈鷲山)에 가고, 우주에 본디부터 있는 적광토(부처의세계)에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왕복할 수 있으니 기쁨은 뭐라 말할 수 없다."

어본존을 배견하면 내 소우주의 문이 그때 그 자리에서 바로 대우주를 향해 활짝 열리고 전 우주를 내려다 보는듯한 유유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커다란 충실감과 환희 그리고 일체를 손안에 넣은 듯한 대단한 확신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주에 에워싸인 소우주가 반대로 우주를 에워쌉니다.

"남묘호렌게쿄의 창제라는 어머니가 품어주어서(중략) 실상진여의 허공을 날게 되느니라."(어서 1443)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소리가 무명의 알을 따뜻하게 품는 어머니가 되어 이윽고 부처라는 새가 되고 실상진여의 허공(불계의 대우주)으로 반드시 비상(飛翔)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은 등()과 같지만 법화경이란 소나무에 걸려 묘각(妙覺)의 산에도 오르리라. 일승의 날개를 의지하고 적광의 하늘에도 날아가리라."(어서 1430)

"그대도 자신의 몸은 등나무와 같지만, 어본존이라는 소나무를 타고 '묘각의 산'에 오를 것이다. 일승(묘법)의 날개의 힘으로 '적광(불계)의 하늘'로도 날아갈 것이다."

최고봉인 산 정상에 서면 이 세상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듯 우리는 '최고의 지혜'(묘각)의 산에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 대우주로 날아가듯 반짝이는 은하, 떨어지는 유성군,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별들을 바라보며 생명의 무한한 확대와 그 깊이를 시시각각 맛보고 음미하며 살아가는 상락(常樂)의 경애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