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행·창제에 대하여
방편품·자아게 독송과 창제 의의
여기서 방편품·자아게를 독송하는 의의와 창제 의의를 확인하고자 한다.
대성인은 재세 중에 법화경 방편품·수량품을 독송하시며 근행하신 기록이 남아있다. 닛코 상인 또한 방편품과 수량품을 독송하셨다.
재가 문하들의 중심적인 수행은 창제였지만 대성인은 때에 따라 방편품과 수량품을 독송하는 근행을 권유하셨다.
단지 방편품과 수량품을 독송한다 해도 대성인 재세에는 당연히 오좌삼좌의 형식은 아니었으며, 또 어디부터 어디까지 독송해야 한다고 정한 정식 형태가 있던 것은 아니다.
어서(御書)에서는 어느 때는 문하에게 방편품의 장행(長行)과 수량품의 장행 독송을 권하고, 어느 때는 방편품의 십여시까지와 수량품의 자아게 독송을 권하는 등, 상대방과 때와 경우에 상응한 여러 가지 예를 배견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근행에는 정행(正行)과 조행(助行)이 있다.
정행은 말할 필요도 없이 창제를 말한다.
본존님에 대한 신(信)을 근간으로 기심의 불성을 나타내는 수행이 창제며, 자신의 생명을 연마해 일생성불을 달성하기 위한 근간의 수행이 된다. 또 광선유포를 실현하기 위한 수행의 근간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방편품과 수량품의 독송은 조행이다.
그 의의는 소파(所破)·차문(借文), 소파·소용(所用)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요컨대 정행인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찬탄하는 의의가 있다.
성불 근원의 법인 남묘호렌게쿄를 방편품·수량품이라는 부처 최고의 말로 찬탄하는 것이다.
본존님을 믿고 남묘호렌게쿄의 근본법을 수행하고 찬탄하며 생명을 연마하는 것이 근행의 본의(本義)다. 그리고 개인의 일생성불과 광선유포의 실현이 바로 근행의 목적이다.
그 중에서 자아게는 수량품의 요약이며, 법화경 28품의 혼이자 불법의 진수다.
대성인은 자아게에서 설하는 영원한 부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깨닫고 남묘호렌게쿄로써 나타내셨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게야말로 남묘호렌게쿄를 가장 깊게 설명하고 크게 찬탄하는 경문이다.
이렇듯 자아게에는 제목의 공덕을 보조해 나타내는 이(利)가 있기 때문에 대성인도 제천선신에 대한 공양이나 간효, 고인에 대한 회향 등을 하실 때는 “자아게소소(自我偈少少)”라고 말씀하시며, 자아게를 독송하고 창제하신 경우가 많다.
단, <십팔원만초>에는 “정행에는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말씀하시듯이, 공덕의 근본은 제목에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방편품·자아게 독송과 창제’는 대성인 불법에 따른 근행의 본의와 목적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세계 광선유포를 담당하는 창가학회로서 이 ‘방편품·자아게 독송과 창제’를 정식 근행으로 실천하기로 정했다.
근행의 간요는 신심·창제
<일생성불초>에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라고 지남하신대로 중요한 것은 근행을 하자, 창제를 하자는 ‘신심의 마음’이며 ‘지속’이다. 그 신심에 무량의 복덕이 갖춰진다.
또 공덕은 어디까지나 정행(正行)인 남묘호렌게쿄에 있으며 조행(助行)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남묘호렌게쿄는 자행화타에 걸치기 때문에 남묘호렌게쿄를 홍통하는 실천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공덕이 있다는 것을 명기하고자 한다.
() | 화광신문 : 04/10/15 608호
오래된 근행요전과 염주 처분은?
특별한 규정은 없으므로 신경쓰지 말고 소홀하게 취급하지 않도록 유의하며 자유로이 처분해도 괜찮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기의 신앙성장에 도움이 된, 추억이 담겨 있는 근행요전이나 수주를 처분하는데 저항이 느겨질때는 별도로 보관해 두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근행요전이나 염주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소각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수선해서 사용하는 것도 좋다. 또한 염주알이 모자랄 경우 잘 보관해 두었다가 보수용으로 사용해도 무방하다. (2001.10.19 464호)
() | 화광신문 : 01/10/19 464호
근행과 관련한 SGI 회장의 지도
◈ 우리들은 아침에 일어나 근행을 한다. 마지못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근행을 하는 일 자체가 위대하다. 근행은 말하자면 대우주를 바라보고 굽어보는 장엄한 의식이다. 우주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 오늘의 용기 내일의 희망 33
◈「當起遠迎當如敬佛(당기원영당여경불)」과 「於此經卷敬視如佛(어차경권경시여불)」
法師品(법사품)의 제십의 「이 경에 있어서 공경하여 보기를 부처와 여히 하여」는 법본존, 보현품 제이십팔의 「응당 일어나 멀리서 맞이해야 하기를 마땅히 부처를 공경함과 같이 할지어다」는 인본존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즉 법사품 제십의 「이 經卷(경권)」이란 삼대비법의 어본존이며 보현품 제이십팔의 「이 경전을 수지한 자」즉 법화경의 행자란 日蓮 대성인이시다. 인법체일이며 니치렌 대성인은 말법의 어본불, 어본존은 대성인의 생명이시다. 따라서 우리들이 어본존을 수지하고 매일 시중들며 조석으로 근행하는 마음가짐, 태도도 생신의 부처를 시중드는 것과 같지 않으면 안된다. 근행의 자세, 태도는 당연한 일이고 불단을 항상 청결히 함과 동시에 방이나 집 전체도 깨끗하게 정리정돈해야 하는 것이 참된 자세일 것이다. 이것은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을 받들어 섬기고 있다는 信心(신심)의 자각이 있으면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이다. - 어의구전강의 하 4권 88
◈ 묘법보다 뛰어난 병법은 없습니다. 기원으로서 이뤄지지 않는 것이 없는 신심입니다. 백마가 초원을 씩씩하게 달리는 것처럼 상쾌한 근행과 창제를 합시다. 그리고 넘치는 생명력으로 언제나 희망에 불타 광선유포 부처의 세력을 연속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셨으면 합니다. - 5.3기념 최고협의회(2005.5.3)
◈ 방심이나 타성을 배제하고 신선한 활력으로 하루 일에 임하는 것이 승리를 향한 길이다. 그 원천이 바로 아침의 낭랑한 근행창제다. 그것은 지금 있는 곳에서 용기와 지혜, 성실과 인내를 다해 '없으면 안 될 사람'이라는 신뢰를 획득하는 투쟁이다. 주저 앉으면 안 된다. - 여는글 (법련 0802)
◈ 아침 늦게 근행도 하지 못한 채 하루를 시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침으로 하루가 결정 납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승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늘을 박차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 한계의 벽을 부숴라! 225
◈ 저녁근행은 가능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 간사이 패밀리 총회(1993.5.4)
◈『이 경의 제목을 부르심에 있어서는 아실지어다. 청맹과니(맹인)가 처음으로 눈을 떠서 부모들을 보는 것 보다도 기쁘고, 강한 적에게 붙잡힌 자가 용서를 받아 처자를 만나 보는 것보다도 진귀하다고 생각하시라』(법화경 제목초 941쪽)
정말 만나기 어려운 본존님을 만나게 된 기쁨을 근행 창제의 기본 자세로 삼아야 하며,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올리는 제목이 본존님에게 통하는 것이다. "불법은 마와의 투쟁이다." "마을 이겨내는 것은 강성한 제목의 힘 밖에는 없다" "오로지 재난이 오면 강성한 신심으로 더욱 기뻐할지어다"(어서 1488)의 금언과 같이 난이 있으면 그럴수록 "좋다, 숙명전환을 해 보이겠다." 신심이란 필사적인 마음으로 자기와 싸우는 것이다. 자기를 응시하고 자신의 약점과 사투하는 그것이 신심이다. 어떠한 때라도 창제제일로 하는 신심에는 앞을 가로막는 장애는 없다. "신심이란 장애와의 싸움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본존님을 확신하고 의심없는 제목을 부르는 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안이한 방법이나 술책으로는 아니된다. "먼저 본존님께 기원하고 또 기원하는 일이 중요하다." 창제 제일로 모든 일에 몸으로 부딛쳐 맞싸워 나가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1%의 희망도 보이지 않을지라도 "반드시"를 확신하고 본존님에게 기원해 나가는 그 일념 속에 승리의 "인"이 있는 것이다. 『젖은 나무에서 불을 내고 마른 땅에서 물을 얻듯이 강성하게』라고 말씀하셨으니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기원도 이길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 진지한 기원과 실천이 있을 때, 대악은 대선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다. 결코 단념해서는 안된다. 필사적인 기원과 실천이 있으면, 처례대로 자기에는 없었던 힘이 나오게 된다. "인생이란, 성공의 연속으로 마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확고한 신심만 있다면 훌륭하게 변독위약된다.
- SGI회장 스피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