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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어본존님은 본래 어디에 계시는가?|

혜광리 2013. 1. 9. 11:08

 

 

 

진정한 어본존님은 본래 어디에 계시는가?

 

 

1. 진정한 어본존님은

 본래 어디에 계시는가?

 

이에 대한 답은 바로 우리들 흉즁의 육단속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어본존을 절대로 타처에서 구하지 말지어다{어서1244}이 어본존(御本尊)을 결코 타처(他處)에서 구(求)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衆生)이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흉중(胸中)의 육단(肉團)에 계시느니라. 이것을 구식심왕진여(九識心王眞如)의 도(都)라고 하느니라“

 

이 어서는 대성인께서 어본존님을 통해서 내외상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삼가 배견할수 있습니다

왜 내외상대를 이런 짧막한 구절로 꼭집어서 설명을 하여 주신 것일까?

 

중생의 전도망상된 사고력이란

문저하종의 본문의 간심의 세계 (본유의 세계/수량품문저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발생되는 데 여러 가지 층위로 나눠지게 되어 있습니다.

 

본유(당체)의 세계를 벗어날 경우 마음은 갈라지기 시작하여 수량 탈익으로 전도되고

법화경 적문으로 더욱 전도되며 권교로 와서 더욱 전도의 마음이 확대되며 외도로 가서는

전도의 외연이 확대되는 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본유의 세계의 진리는 딱하나

문자와 체가 유일하게 하나로 일체화 되어 있는 “남묘호렌게교”라는 것인데

 

            * 이 세상에 문자와 체가 하나로 늘어 붙어 있는 것은 “남묘호렌게교”라는 제목밖에 없음

              대성인께서 법화경의 문자 하나하나가 모두 금색의 부처이니라 하신 말씀은

              남묘호렌게교를 통해서 보았을 때 비로소 법화경의 문자와 체가 하나로 된다는 뜻임

              그러므로 그냥 법화경문문구구는 우주의 실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므로 문자와 실상이 늘어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 어느정도의 실상을 내포하면서 실상을 가르키는 기능을 함

 

이 남묘호렌게교는 일승법으로써 일법밖에 없는데 중생의 전도된 망상에 맞추느라고

문상수량으로 다양화되었고 점점 가르침이 많아져서 아함경인 소승교까지

팔만법장으로 대응된 것입니다.

30대 초반의 젊으신 날 가마쿠라에서 거리절복을 하시면서

벽에 남묘호렌게교를 설명하거나 또는 사개격언이

적혀진 현수막을 걸어놓으시고 지나가던

중생들에게 외친 내용이 바로 일생성불초입니다.

 

 

당신들은 전도망상되어 생사의 고삐를 끊을 수 없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제목을 부르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 본유의 세계(일승법으로 원융융합된 세계)로 들어갈수 있다고 외치신것입니다.

 

구식심왕진여의 도읍인 수량문저의 구원의 세계는 “남묘호렌게교”라는 문자와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문자를 봉창하게 되면 문자에 늘어붙어 있는 진리의 근원이 올라와서 자신과 일체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젊으신 날 가마구라의 풍광이 700여년의 시간을 뚫고 다가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문자라도 마음밖에 있다고 관하고 부르면 추법으로 되어 버린다.

외도로 되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조심하여라 라고 외치십니다.

왜 이렇게 강조하였을까요

 

대성인 께서는 삼독강성한 말법의 중생들의 심성을 살펴보시고 그들의 습성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통찰하신 것입니다.

바로 외도 보다 못한 습성의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어본존님을 바라보고 제목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자신이야 말로 부처이다라고 알고 불러야 되는 데 전도된 습성병으로 절대로 그렇지 못하고

나름대로 외도의 환상을 그리면서 제목을 부른다는 고 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물의 현상이 자신과 무관하게 생각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고

제목을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요인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제목을 부르면 법화경은 조잡한 법이되어 버린다고 하는 것들이 중생의 망상병입니다.

 

 

 

 

2. 제법실상을 통해서 본 진리의 세계

법화경을 철학적으로 압축한다면 바로 “제법실상”입니다.

어의구전 전체를 꿰뚫고 한마디로 압축하라면 “당신이야 말로 부처이다”입니다.

사리불과 같은 석가부처님의 제자들이 무량의 경의 지도를 거쳐 법화경에 와서 삼승을 열어

일승으로 그 경계를 넘어 왔을 때 처음으로 외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일체법은 불법이다”입니다.

 

 

법화경에

시법주법위(是法住法位)․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로서

이법은 법위에 있으며서도 세간속에 상주한라고 말씀 하십니다.

 

천태의 일체의 치생산업은 불법과 상위하지 않는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치생산업이란 일체의 저자거리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 불성이 깃들여져 있고

그것을 활성화시키면 가치를 창조할수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철은 제법실상의 원리를 “산은 산이로되 물은 물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산이 산답게 존재하는 진리

는 산에 있다. 물도 마찬가지고 이세상의 모든 것은 다 마찬가지이다.

이세상의 만상은 그 자체가 진리이고 불법이고 항상 정법이 깃들여 있다입니다.

죄다 법화경의 핵심사상인 “제법실상”을 다른 각도에서 풀어낸 것들입니다.

 

“제법”이란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현상까지도

그리고 그 하나 하나가 전부 최고의 경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만인불성입니다. 모두가 최고의 경지인 부처를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우 지옥계서부터 구계는 어떻게 하고 그렇게 말할수 있을까?

 

원래 본유의 세계에 진입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십계호구입니다.

불계가 바로 다른 구계를 네트워킹(호구)시켜줌으로써

반짝이는 지옥계 아귀계....등등으로 전환되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대성인 교학에서는 어본존님 속의 제바달다, 기자모신, 십나찰녀등

지옥 아귀를 나타내는 것에

본존님의 묘광에 비추어진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계호구의 모습이지요

대성인께서는 이렇게 불계를 포함하여 일체가 호구된 상태를

본유의 지옥계, 본유의 아귀계라고 명명하고 계십니다.

 

중생의 본유의 생명에는 이렇게 불계와 모든 것이

네트워킹(호구)되고 원융하여 한덩어리로 융합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성인께서는 불법은 남묘호렌게교 일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법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시고 계십니다.

 

중생의 경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반 사물의 경우는 어떤 것일까

“일체법은 불법이다”입니다. 일체의 모든 사물과 먼지는 전부 불성을

내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부 십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고

그 속에는 본유의 십계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어디있는가 저 지저분한 저자거리에도 전부 포진 되어 있고

냄새나는 노숙자에게도 있고

스트레스 쌓이는 사무실에도 있고 어느 곳이나 다 있습니다.

 

그리고 불성과의 네트워킹속에는 하나의 법칙이 존재하는 데

일생성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일심법계가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은 자신의 환경(우주대)으로 꽉차고

우주속에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깃들여져 있습니다.

 

본유의 세계에 들어갈 경우 바로 일심법계 즉 일념삼천의 메카니즘이

유연하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본유의 세계에 들어갈 경우 자신의 행동들은 행주좌와에 걸쳐서

부처의 행동과 일치 합니다. 마음먹은대로 세상을 잘 구현하시면서

살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경계속으로 들어가면 부처와 동숙(同宿)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활성화된 일념삼천의 세계 이것을 대성인님께서 한마디로 사(事)의 일념삼천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우주가 제일 처음 하나의 점이 빅뱅(대폭팔)을 일으켜서

이 거대한 우주가 탄생되었던 것처럼 일법에서 십여시가 작동되어 팔만법장을 이루는 것입니다.

            * 빅뱅론 : 원래는 칡흑같은 암흑속에서 오로지 본질적으로 존재한 것은 하나의 법 “묘호렌게교”

                          에 연이 닿아 폭팔을 이루어 우주를 형성하고 있음.

 

이처럼 이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수억만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주삼라만상은 서로 연결되어 작동 되어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것을 불법에서 천태는 숫자로 잘정리하여 일념삼천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제법실상의 진리적인 측면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냥 그것은 진리일 뿐입니다.

 

 

3. 불연(佛緣)은 내외(內外)상대의 외(外)가 아님

이제 내외상대론을 언급해야 할 차례입니다.

이렇게 법화의 제법실상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실상은 진리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속에 있으며 일체법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말법의 타악한 중생은 모든 것은 자신속에 있다는 것을 까먹습니다.

그래서 실상은 제법에 있듯이 어본존님은 우리들의 흉중의 육단에 있다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제법실상를 풀어내고 있는 십여시에서는 .....여시인 여시연 여시과....라고 하고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사이에 반드시 여시연이 있습니다. 사물이 존재하려면 현상이 존재하려면

인과가 현상으로 존재하려면 반드시 여시연이 없으면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이세상에 이론적으로는 부처아닌 자가 없고 불성이 아닌 사물현상도 없습니다.

지나가는 신심 안하는 자의 마음속에도 흉중의 육단에 어본존님이 계십니다.

이론적으로 일체법은 불법입니다.

법은 세간상에 상주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부터 지금까지 그래왔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불성이 활성화되어 성불이라는 결과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인연과보중 “연(緣)”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연(緣)이 없으면

백날 나도 부처이고 사물도 부처이다 라고 진리의 측면 즉 “인(因)”을 논하여도

과(果)로는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빅뱅이전 칡흑같은 무존재속에 남묘호렌게교라는 법만 있고

그법을 “탁”치는 외부의 연이 없었으면 우주는 탄생되지 않고

진리의 세계에 갖혀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불성을 용현하려면 올바른 불연을 만나야 불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말법에 와서 백날 법화경을 문상으로 앞뒤로 읽어도 불과를 득할 수가 없습니다.

말법에 맞는 불연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 이법화를 그 창시자로하는 법화종을 믿고 “나무묘법연화경”을 불러도

올바른 佛緣이 되지 않으므로 일생성불, 숙명전환을 할수 없습니다.

 

마찬 가지로 닛고로 부터 등을 돌리고 오노승이 개창한 일련종파의 본존님을 바라보고

줄기장창 “남묘호렌게교”를 불러도 올바른 불연이 아니므로 나의 육중의 흉단의

어본존님을 밖으로 불러 낼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외상대론을 들어 어본존님은 흉중의 육단에 계시므로

마치 아무 본존님이나 바라보고 제목을 불러도 올바른 불연이 되어 불성을 용현하고

나의 마음속의 일념삼천이라는 메카니즘을 사로써 활성화 시킬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연과보중에서 “緣”을 간과하고 진리의 측면인 “因”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하시다가 나온 결론인 것입니다.

 

이 중요한 “연(緣)”을 내외(內外)상대중 바로 외(外)로 파악하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4. 결론 : 올바른 불연을 만나야 성불할 수 있

 

불인만 있고 올바른 불연이 없어 불과를 얻어 낼수 없으면

 

내외상대, 흉중의 육단, 일체법은 모두 불법, 세간상상주, 치생산업과 불상위 본유의 십계호구등은 진리의 세계에 갖혀서 아무런 가치를 발휘할수 없이 무의미 해지는 것입

니다.

 

불법에는 연에 해당하는 선지식인 “외부에 계시는 올바른 어본존님”을

제대로 만나지 않으면 자신을 포함하여 만상에 깃들여져 있는

불성을 계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이 될수 없고 조상을 성불을 시키는 초목성불을 이루어 낼수가 없습니다.

 

올바른 어본존님이 아니고서는 나의 마음속에 분명히 계시는

육단의 어본존님도 불러낼수 없고 용현시킬수 없습니다.

올바른 어본존님이란 당연히 대성인님께서 어서 원문에서 밝히시고

계신 어본존님입니다.

                                                 - 흐름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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