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切 唯心 造
일체 유심 조(一切 唯心 造)
우리의 다섯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대상의 성상(性相)이며
그것만으로는 우리에게 어떠한 감정도 일으키지 않는다.
말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아이에에게“너를 때리겠다.”고 말해도
그 아이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에게 “너는 나쁜 사람이다”라고 말해도 무표정할 것이다.
모든 사상(事象)의 성상은 감각기관을 자극할 뿐이기 때문이다.
말은 소리에 불과하여 공기의 진동일 뿐이고, 밝음과 어둠은 빛 양의 많고 적음의 차이 일 뿐이다.
냄새와 맛 또한 물질의 화학적 성상에 지나지 않다.
촉각도 피부의 촉각 수용체(受容體)에 가해지는 압력의 차이 일 뿐이다.
이렇듯 만유(萬有)의 본질은 선악(善惡)이 없고 좋고 나쁨이 없는 그냥 있는 것,
즉 진여(眞如)이다.
그러나 이 찰나적인 감각에 (** 아래 참고란을 먼저 읽어 주세요)
저장식(제8식,貯藏識,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작용하고,
여기에 생각식(제7식,마나식)의 생각, 계산, 추리가 추가되어 의식에 드러나게 되면
의식(제6식)은 저장식의 내용을 기준으로 판단하여 선(善)과 악(惡)으로 분별하게 된다.
그 결과 기분 좋은 것으로 판단되면 즐거운 감정이 생기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나타나면 괴로운 감정이 생긴다.
이런 마음의 상태에 따라 의지(意志)가 생기고 이것이 말과 행동으로 옮겨진다.
에스키모 사람들은 구더기를 최상급의 식품으로 생각한다.
그 사람들에게는 구더기의 구물거리는 모습이나, 색깔, 미끈미끈한 촉감, 냄새 등이
아주 기분 좋은 것으로 기억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입에 넣고 씹어 먹는 것이 그렇게 즐거운 것이다.
우리가 쌀밥의 하얀 색깔과 고소한 냄새와 맛에 침이 넘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렇듯 모든 외부 대상에 대한 느낌은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과거의 체험이나 기억의 영향에 의해 표출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체험의 내용은 습기(習氣)라는 에너지 형태로 저장식에 간직되어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이전 체험이나 전생(前生)에서 축적된 업(業,karma)의 내용은
현생의 삶에 중요하게 작용 할 수밖에 없다.
저장식(貯藏識)에 저장된 습기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뤄져있다면
그 사람이 표출하는 감정 역시 바람직하지 못 할 것이다.
같은 외부 현상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다.
이 차이가 바로 저장식에 간직된 습기의 차이 인 것이다.
현대 과학으로 저장식이나 습기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으나 억지로라도 짜 맞추어 본다면
저장식은 모든 기억들이 저장되어 있으나 그것을 인식 할 수 없는 상태이니
무의식계(無意識界)라고 할 수도 있고, 유전인자들 안의 정보시스템이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하다.
습기 또한 그곳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들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인류로 진화해 오면서 체험했던 모든 정보들이 저장되어 있으며
유전자 속에도 경험했던 상황에 대응 할 수 있는 능력(개체나 종족 유지에 필요한 능력)들이
유전정보로 저장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한 생(生)을 사는 동안 지니고 있는 신체적인 모든 조건들은
유전인자에 저장되어 있는 유전정보의 프로그램에 따라 생성된 것이고,
발현되는 능력 역시 유전 정보에 의한 것이 기본이 될 것이며,
그것을 바탕 삼아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이 추가 된 것이다.
따라서 각자의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으며 능력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사람마다 신체와 능력의 기본이 다르기 때문에 능력개발에서도
기본능력의 성상을 알아 거기에 맞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어야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이렇듯 삶은 과거의 체험(業)에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 karma))의 중요성은 이런 이유 때문에 강조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원래 선악(善惡)의 성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외부 대상을 저장식에
입력되어있는 정보에 따라 선이나 악으로 인식, 판단하여 화를 내기도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이런 인식작용이나 감정들은 오직 마음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인식하는 모든 성상)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지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그 대상은 존재하는 실체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느껴서 우리가 인식하는 내용은 그것의 실상(實相)이 아니라
마음이 지어낸 그림자라는 것이다(表象). 마음이 작용하는 한 실상(實相)은 볼 수가 없다.
인식 속의 만상(萬象)은 전부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이다.
마음이 만들어 낸 그림자이다.
그래서 “일체 유심 조(一切 唯心 造)”라고 한 것이다.
빛이 그림자를 만들어 내듯이 마음은 그림자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보면서 그림자인 줄도 모른다.
밝은 달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에 놀라 마구 짖어 대는 개들처럼
우리는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보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달빛이 없어지면 그림자도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없어지면 그림자(虛相)가 없어지고 본 모습(實相)이 보인다.
그림자에 가리어 보이지 않던 본래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자를 없애려 아무리 애를 써도 달빛의 방향에 물체가 있으면 그림자는 없앨 수 없다.
그림자를 만들어 내지 않으려면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물체를 없애거나 빛을 없애야 한다.
마찬가지로 허상을 없애려면 마음을 없애거나 대상을 없애야한다
그러나 마음을 없애는 일이 쉽지는 않다. 더구나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없앤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불가(佛家)의 수행이나 마음공부하는 것이 바로 이 마음(妄心, 중생심, ego)을 없애
무심(無心)을 만들어 실상(實相)을 보려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본 모습(本性)을 볼 수 있다.
그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제가 풀릴 수 있을 것이다.
마음과 대상을 없앨 수 없다면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
빛의 방향 반대쪽에 있는 물체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그와 같이 마음의 방향을 조정해 본다면 어떨까?
만유(萬有)는 그 본질이 진여(眞如)이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성상을 다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식자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범위 내에 있는 것뿐이다.
나머지 것들은 느낄 수가 없다. 인식이란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슬픔과 분노를 일게 하는 그림자를 만드는 마음이 작용하지 않게 하고,
즐거움과 행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자를 만드는 마음을 작용하게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마음작용 안에서는 행복감을 주는 그림자만 보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소리와 수많은 형상들, 빛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주의(注意,attention)가 미친 것에 국한된다.
나머지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마음의 작용인 주의(注意)란 것이 그것에 다가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마음이 닿지 않아 그림자를 만들지 않으니
인식작용을 유발시키지 않고 그냥 통과해 버린다. 그래서
수많은 소리와 빛이 우리의 귀와 눈을 통해 들어오지만
우리가 인식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우리의 주의가 미치는 것들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의가 긍정적인 쪽에만 다가가게 한다면
모든 대상들에서 긍정적인 것만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즐겁게 느껴질 것이다
물을 그릇에 담으면 그 모양은 그릇 모양대로 변한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줘도 그 내용은 듣는 사람의 마음그릇의 모양에 따라 변하고 만다.
부정적인 마음그릇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매사가 부정적으로 보이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부처님의 눈에는 모두가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모두가 돼지로 보인다.
어떤 마음의 그릇을 가질 것인가는 자기에게 달려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인식하는 모든 모습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이다.
그래서 마음만 잘 먹으면 얼마든지 자기가 원하는 더 좋은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일체(一切)가 유심 조(唯心 造) 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