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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華經의 智慧51-묘장엄왕 본사품

혜광리 2012. 1. 11. 10:26

 

 

法華經의 智慧51-묘장엄왕 본사품

 

  반석같은 가정혁명의 승리를

 

  학회의 영원한 지침인 ‘일가화락의신심’을 위해

미입신 가족에 대한 자애

부부,부모와 자식간의 이상적인 모습

자식에게 어떻게 신심을 전할 것인가

 

  사물에 따르면서 사물을 따르게 하는 (형제초1088)이라는 지혜는

불법심리학이고 인간학이다.

이것은 부부, 부모 자식간이라도 같다.

좋은 자식, 좋은 아내, 좋은 남편으로 되는 것이 신심의 실증이다.

신심을 하는 것으로 인해 정반대가 된다면 무엇을 위한 신앙인지 모른다

신앙으로 인해 다투어서는 어리석은 일이다.

 

  신심 하는 것을 미입신 가족이 반대하는 경우도 실은 신앙 그 자체보다는

신심을 하고 있는 가족의 행동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숙업에 문제가 있다.

 

  자신의 신심을 심화시킨다. 강하게 한다. 이것이 일체의 근본이다.

강성한 신심이란 용맹스런 모양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경애인 것이다.

 

  가족이 신심을 반대하고 있다는 사람에게 도다 선생님은

① 자식이 신심을 반대하는 경우“진심으로 자식을 귀여워 해주셔요”

② 부인이 신심을 반대하는 경우“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셔요. 수입이 적은 것입니다

 아내를 아껴주고, 때로는 옷 한 벌 정도 사줄 수 있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묘장엄왕본사품(27장) 本事(본사)란 유래라는 뜻이므로 묘장엄왕이라는 임금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이야기, 어떠한 체험을 했는가를 설하고 있다.

 

  묘장엄왕이 있었는데 부인과 아들둘이 묘장엄왕을 불법에 귀의하는 과정을 설했다.

아버지는 바라문교를 하고 있었으므로 아들은 사종의 집에 태어난 것을 한탄한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푸념은 그만하셔요. 현실을 바꾸어 가셔요 라며

왕에게 갑자기 불법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을 것이므로 신통변화를 보여주라고 말한다.

현증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묘장엄왕은 아들의 신통변화를 보고 크게 환희하여 아들의 스승을 찾아가서 입신한다.

 

  일체는 현증을 따를 것이 없으니(교행증어서1279)

 

  도리 증문 보다도 현증 이상은 없느니라(삼삼장기우사1468)

 

  신심을 강렬히 반대하는 남편을 입신시키는 부인부의 체험

남편을 원망하고 이혼만을 생각했으나 남편에게 감사할줄 아는 자신으로 되어 결국은 입신시킨다.

 

  불법은 체와 같고 세간은 그림자와 같아서 체가 구부러지면 그림자도 비뚫어지느니라

(諸經과 法華經과 難易의 事992)

 

  생활상에 나타난 그림자의 흐트러짐에 일희일우해서 남편이 이렇다. 저렇다 라고 푸념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자. 자신의 숙업이니 자신이 책임을 지고 타고 넘도록 하자. 그리고 복운을 쌓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다. 전부 내 자신의 경애인 것이다. 그때 의정불이의 원리를 확실히 확신했다.

남편은 수많은 공덕과 벌의 현상을 보여 주면서 저에게 신심을 가르쳐 주었다.

최고의 선지식이었던 것이다.

그토록 처참한 고난의 길이 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는 자신으로 되었다.

 

  간부에게 회원을 꾸짖을 자격 같은 것은 없다. 소중히 봉사해야만 한다.

최후에 행복해지면 되는 것이다. 도중에는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다. 당연하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 안심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직 죽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이다. 번뇌즉보리이다.

 

  “신심하고 있으면서...” 라든가,

“간부이변서도...”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은 말하도록 내버려두라

말한 쪽은 그 과보를 받을 것이며 , 들은 쪽은 그만큼 죄장 소멸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며 사는 것은 이전경의 삶의 방식이다.

‘나는 이렇게 나아 간다’라고 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법화경이다.

그것이 묘장엄왕의 의의인 것이다.

 

  부처를 만나는 일은 몹시 어렵다

일안의 거북이가 부목의 구멍을 만나는 것과 같다(묘법연화경 병개결657)

 

  큰 바다에 사는 거북이가 천 년에 한번 해면으로 떠오르는데 그때 자신의 고통을 풀어줄 전단의 부목을 만나는 것 그러나 그 나무에는 자기가 기어 들어갈 구멍이 뚫려 있지 않으면 안되며, 거북이는 눈이 한쪽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원근감이 없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만다. 묘법을 만나기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소야전미망인 답서1391)

 

  일생을 헛되이 보내고 만세에 후회하는 일 없을 지어다(도키전어서970)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신심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신심이다.

 

  가족은 善知識(선지식)이라는 것이 법화경 가정론의 포인트다.

자신의 신심을 연마하여 인간으로서 향상하기 위한 좋은 벗이다.

 

  부모로 되고 자식으로 됨도 반드시 숙습이니라(자꾸니찌보 어서902)

 

  여인(女人)이라 함은 사물(事物)에 따르면서 사물(事物)을 따르게 하는 몸이니라. 지아비가 즐거우면 아내도 번영(繁榮)하고 지아비가 도둑이면 아내도 도둑이 되느니라. 이것은 오로지 금생(今生)뿐만의 일이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그림자와 몸, 꽃과 열매, 뿌리와 잎과 같은 것이니라(형제초1088)

 

  결혼에 대해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행복, 자식이 있건 없건 행복. 이것이 신심이다.

행복은 자신의 흉중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

그 한 사람의 자기 자신을 변혁시켜 나가기 위한 금세이다.

주위를 선지식으로 해서 일체를 불도수행이라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혼에 대해

이케다 선생님은 이혼하고 안하고는 사적인 문제로 당연히 본인의 자유이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구축하는 삶의 자세는 불법에는 없다.

그것을 기준으로 생각해 주셔요라고 했다.

 

  행복에는 인내의 뒷받침이

중요한 것은 애정이고 자비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가장 높은 것을 향해 ,

행복을 목표로 함께 제목을 부르는 이외에는 없다

부부라 해도 원래는 남이다.

남이기 때문에 ‘참고 이해하자’라는 마음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힘들다.

한사람의 태양이 있으면

‘내가 있다면 가정은 언제라도 밝다.’ 그렇게 밝게 하겠다고 정하는 것이다.

 

  단정해서는 안된다. ‘어차피 그런 사람이다’라고

단정해버리면 그 일념이 상대방의 성장을 멈추게 한다. 자신의 성장도 멈춘다.

‘ 반드시 바뀐다.’

‘ 불계가 있으므로 언젠가는 개화한다.’

‘꼭 그렇게 만들어 보이겠다.’ 라고 정하고 끝까지 기원해 가는 것이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 등에게는 아직 죽기 전에 이 대선을 바치리라 (현불미래기509)

 

  지금 아이가 열심히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부모의 신심에 문제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이들은 긴 안목으로 봐주지 않으면 안되며, ‘문제아’라고 불리는 아이일수록 의외로 진지하게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다만 근본은 최후에는 부모의 신심으로 모두 결정된다.

특히 몇십 만 편의 체험담에서 보더라도 어머니의 신심이 참으로 중요하다.

本末究竟等(본말구경등)이다. 본은 부모의 신심 말은 자식들의 신심.

구경해서 결국은 똑같다는 것이다.

 

  ‘선지식’이란 따라야 할 사람을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올바른 법을 구하려면, 옳은 사람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잘못된 사람을 따랐을 경우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공덕은 나오지 않는다.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가 어떤가

어머니가 언제나 집에 없어서 쓸쓸하다는 아이에게는

중요한 것은 아이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가, 어떤가이다.

시간이 없는 만큼 부지런히 메모나 전화로 연락을 취한다거나,

때로는 오랫동안 함께 지내는 시간을 만든다거나 하는 궁리를 하고 지혜를 짜내야 한다. 마음이 통하는 궁리를 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보며 규칙적으로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크게 달라진다.

 

  미입신 가족에게 경의와 감사를

주위나 미입신 가족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 조그마한 일에도 마음을 쓰는 것이다.

방문할 때라든지, 전화를 걸 때 등등

 

  ‘어떻게 되겠지’는 신심 이용

‘어본존에게 제목을 부르고 있으니 어떻게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심이용이다.

기원했다면 전력을 쏟아 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진정한 신심이다.

사회에서 승리하여 실증을 보여야만 가정의 승리도 있으며 광포의 전진도 있다.

 

  어떠한 세상의 혼란에도 여러분을 법화경, 십나찰이여 ,도우십사고 젖은 나무에서 불을 내고 마른 흙에서 물을 얻으려 하듯, 강성하게 말하느니라(가책방법멸죄초1132)

 

  21세기는 정치나 경제 뿐만이 아니라 한차원 더높은 생명의 시대이며 철학의 시대로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선구가 우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