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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華經의 智慧46-약왕보살본사품

혜광리 2011. 12. 21. 16:54

 

 

法華經의 智慧46-약왕보살본사품

목숨을 불사르리라 보은을 위해

 

 

  신앙의 목적은 무엇인가-경애를 바꾸는 것이다.

 

 

  不老不死란 -老苦 死苦가 없다는 것이다.

괴로워하지 않는다. 마음껏 즐기며 살아가자는 석존의 말처럼 괴로움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기쁨을 매일, 시시각각으로 맛보면서 살아가는 경애를 말한다. 그것이 진정한 건강이다.

 

설령 병으로 드러눕는 일이 있을지라도 목숨이 있는한 묘법을 봉창하고 묘법을 이야기해가는 것이다.

생사를 초월하여 끝까지 사명에 살아가는 신심이야말로 不老不死의 경지인 것이다.

 

 

  本化와 迹化

법화경의 부촉은 촉루품에서 끝난다. 그 뒤 6품이 추가된다. 이것을 대성인은 군습유촉이라고 말씀하신다. (어서252) 군습이란 이삭을 줍는다는 뜻이다.

 

 

  지용의 보살에게 별부촉-신력품, 모든보살에게 총부촉-촉루품

게다가 적화 타방의 보살에게 거듭다짐하여 법화경의 홍통을 의탁한다.

말하자면 쐬기박기이다.

 

 

  수량품의 문저인 南無妙法蓮華經를 신수한 후 각자의 무대에서 묘법을 실증해 보인다. 실험증명하여 유통해 가는 것이다.

 

 

  적화의 보살이란 맨 처음으로 적불(구원의 본지를 개현하지 않은 부처)에게 화도되었던 보살을 말한다.

이것에 비해 본불과 일체불이인 직제자가 본화의 보살인 것이다.

 

석존 멸후의 광선유포의 주역도 어디까지나 본화지용의 보살이다. 적화의 보살은 협사의 역할이다. 이 지용의 보살을 돕는 작용을 밝힌 것이 후영추산회의 육품이다.

 

지금도 신심은 하지 않지만 광선유포에 찬동하고, 응원하며, 현창해주시는 분들이 적화의 보살이라고 해도 좋다.

 

 

  신심을 근본으로 각자의 무대에서 훌륭하다. 과연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신심과 묘법을 증명하는데 통한다.

 

  일이나 생활은 엉망이면서 신심만 훌륭하다.-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속임수이다. 법을 낮추고 만다.

 

본화로서 자행화타에 면려하여 개척한 불계의 생명력을 적화로서의 사회면, 생활면에서 살려나간다.

살려서 활약해 가려는 노력 속에서 더한층 신심이 깊어지고 불계가 확고해진다.

이것의 되풀이 작업이다.

 

  본화→적화 →본화라는 끈기 있는 되풀이 작업에 의해 자신의 생명을 무한대로 향상시켜 광선유포를 끝없이 넓혀가는 것이다.

이것이 ‘후영추산회’ 육품의 실천적인 의의이다.

 

 

  약왕품의 줄거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약왕보살의 ‘스승에 대한 보은’ 의 이야기이다.

숙왕화보살이 석존에게 질문:약왕보살은 무엇 때문에 사바세계에서 난행고행을 하 고 있는 것입니까. 모두 궁금해 합니다.

석존의 답:과거에 일월정명덕불이라는 부처가 법화경을 설했을 때, 일체중생희견보 살이라는 보살이 있었다. 그는 법화경을 듣고 열심히 부처를 찾아 수행 하여 12,000년 후 에 현일체색신삼매(십계의 일체중생 모습을 자유자재 로 나타냄)라는 경애를 득했다.

이 경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법화경과 부처의 덕택이라는 것을 알고 스승과 법화경을 공양하자라고 보은의 맹세를 한다.

 

 

  보은의 일념이 오저에 있으면 복운은 가속도로 증가한다. 표면상으로 아무리 열심히 행동한다 해도 보은의 마음이 없으면 그 증상만이 복운을 지워간다. 경애혁명도 할 수 없다.

 

 

  또다시 스승을 섬기게 된 일체중생희견보살에게 스승은 자신의 입멸의 때가 왔다는 것을 고하고 그에게 법을 부촉한다. 또 부처의 모든 제자, 일체의 보물을 모두 그에게 맡긴다.

일체중생희견보살은 일월정명덕불의 사리를 팔만 사천의 탑 앞에서 자신의 팔꿈치를 태워공양. 그것이 72,000년동안 계속

이때 사람들은 스승이 팔꿈치를 잃게 된 것을 슬퍼하지만 보살은 “나는 양쪽팔꿈치를 잃었지만 반드시 부처의 금빛의 몸을 얻으리라.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로서 나의 팔꿈치는 원래대로 될것이니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의 말대로 팔꿈치는 원래대로 돌아온다.

 

석존은 이러한 과거를 이야기하며, 이 일체중생희견보살이 현재의 약왕보살이라고 설한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약왕품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정법을 위해 몸을 바치는 신심이다.

 

도다선생님은 이케다선생님에게 “몇 백년이 걸리더라도 광선유포는 절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혁명에는 탄압도 비난도 따르기 마련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지말라. 목숨을 건다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아멸도후, 후오백세 중에 염부제에 광선유포하여 단절해서 악마 마민 제천 용 야차 구반다 등에게 그 기회를 주지 않도록 할지어다.(묘법연화경병개결601쪽)

이렇게 마에게 틈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

 

 

  약왕보살을 상법의 주인 천태 이것이니라.(백육개초857)

 

 

  본화에 의한 광선유포의 때가 올 때까지 법화경을 지키는 것이 적화의 보살이다.

말법에 있어서는 광선유포에 면려하는 본화지용의 보살을 공경하고 수호하는 사명이 있다.

 

 

  불에도 태울 수가 없으며 물에도 떠내려가지 않느니라. 그대의 공덕은 천불이 함께 말씀하실지라도 다하지 못하느니라. 그대 지금 이미 능히 모든 마적을 타파하고 생사의 군을 파괴하였으니 여러 나머지 원적을 모두 최멸하였느니라. 선남자, 백천의 제불, 신통력으로써 함께 그대를 수호하시느니라. (묘법연화경병개결600쪽)

 

 

  절복을 하는 인간의 복덕은 고뇌의 불에 타서 무너지는 일은 없다. 불행의 거센 파도에 떠밀려 가는 일도 절대로 없다.

천명의 부처가 모두 달려들어 설해도 다 설할 수 없는 대공덕이 있다.

 

 

  불법은 승부이다. 부처와 마와의 싸움이다. 이겨야만 행복이 있다. 이겨야만이 광선유포가 있다. 부처의 다른 이름을 승자라고 한다.

 

 

  분명히 법화경에서도 적화의 보살의 대표가 양왕보살이다. 서품에서 등장하여 법사품에서는 대고중의 중심이 되어 있다. 법사품에서 적문의 유통분이 시작되어 대고중도 성문에서 보살로 바뀐다.

 

 

  약왕보살이란 무엇인가. 법화경은 모두가 기심의 의식이다. 경문을 소홀히 해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자신의 생명의 약왕보살이란 그 이름대로 심신의 병을 치유하여 생명을 건강하게 하는 역용이다.

그 본체는 묘법이며 불계이다. 불계의 대생명력이 생명의 괴로움을 치유하는 작용을 약왕이라고 이름한다.

 

  병이 낫습니까라고 질문해서는 안된다. 병이 낫는 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기 때문에 신심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형식적이 아니라 목슴을 걸고 어본존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목숨을 어본존에게 바칠 정도의 진지한 결의를 가진 제목이라면 낫지 않을 리가 없다.

 

 

 

 

  戒律(계율)은 건강법

계율은 생명을 청정하게 유지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소승교에 한하지 않는다. 즉 생명을 정화시키는 것에 의해 생명 본래의 작용을 활성화시키는 셈이다.

예를 들면 천태가 세웠던 25방편 중에 5事의 조정은 調食,調眠,調身,調息,調心(마음의 조절)

 

병이란 인간 생명이라는 場의 혼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승교에서 권대승교, 점차적으로 생명의 문란을 조정, 조화시키고 단련해서 최후에는 법화경에 의해 불로불사의 대생명력을 설한 것이다

 

불석신명이라 해도 무리하는 것이 아니다. 무리는 계속되지 않는다. 불법은 도리이다.

도리에 맞는 현명한 신심즉생활이 아니면 반가치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수면이란 일종의 작은 죽음이다. 대우주라는 생명의 바다에 심신을 잠기게 하는 작업이다.

그 휴식에 의해 생명력이 충전되어 내일의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생명력의 충전이다. 늙거나 병든 몸은 일단 우주생명의 소생의 바다로 돌아가 산뜻하고 새로운 건강한 몸으로 되는 편이 좋을 수도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신심의 상태, 숙업 등에 따라 다르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약왕보살의 신심을 관철한 사람은 반드시 다음에는 더욱 복운 넘치는 생명으로, 태어나고 싶은 곳에 자유자재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요는 죽음을 맞이 했을 때 대우주의 어디에, 무슨계로 융화되어 가느냐 하는 것이다.

불계에 융화되어가면 설사 언제 죽는다 해도 영원한 대생명을 얻은 사람이라고할 수 있다.

수량품을 몸으로 읽은 사람이라면 불로불사의 경애로 연결될 것이 틀림없다.

 

  ‘생사’라 해도 우주생명의 변화상이다. 부처의 생명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를 싫어하는 것은 부처의 생명을 싫어하는 것이다.

생의 괴로움도 신심을 강하게 하는 양식으로 한다. 사의 괴로움도 신심을 강하게 하는 양식으로 삼는다. 그것이 생사즉열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