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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華經의 智慧-여래수량품10

혜광리 2011. 9. 14. 11:32

 

法華經의 智慧-여래수량품10

 

영원한 사후의 생명

생명이란 우주생명과의 융합

 

  도다 선생님“ 우리들의 생명은 사후 대우주로 녹아든다. ”

영혼이 아니라 색심불이의 생명 그 자체가 대우주로 되돌아간다.

 

  대우주 그 자체가 하나의 대생명이다 대생명의 바다이다.

온갖 것을 키우고, 온갖 것을 태어나게하고 움직이게 하고 죽게하고

온갖 것을 다시 그 품안에 껴안고 새로운 에너지를 준다.

넘치도록 풍부한 대생명의 바다가 있다. 그 바다는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움직이고 변화하면서 생과 사의 리듬을 연주하고 있다.

우리들의 생명도 대우주라는 대해에서 태어난 물마루와 같은 것이다.

파도가 일어나면 생, 대해와 하나가 되면 사이다.

영원히 이것을 되풀이해 가는 것이다.

 

  임종할 때의 일념이 어느 곳으로 향해 있는가로 우주의 어느 계에 녹아들어가는가가 크게 좌우된다.

 

  임종을 맞이할 때 주의사항 [임종용심초]

*병자의 주위에는 술에 취한 사람을 가까이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대세의 사람들이 시끄럽게 둘러앉아 있는 일은 피하라

*병자가 집착을 보이는 듯한 재보를 곁에 두어서는 안 된다

*집착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화를 내게 해서는 안 된다.

*숨이 끊어져도 잠시 동안은 사망한 사람의 귀에 제목을 들려 주라

 

  생명체가 생에서 사로 향할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불법에서는 일개의 생명체를 심신의 움직임이 임시로 화합한 것으로 본다. -五陰假和合

생명의 물질적 측면-色陰

생명의 정신적 작용-受陰, 想陰, 行陰, 識陰

 

  생의 힘이란 이러한 색심의 움직임을 화합시키는 힘이다.

화합하고 통합하고 외계를 향하여 능동적으로 활동하게 한다.

사로 향할 때 통합력이 상실되고 임시로 화합하고 있었던 오음의 화합이 풀어지게 된다.

색심의 움직임은 잠재화 되어간다.

 

  또, 육체를 받쳐주고 있었던 오대<지수화풍공>의 통합이 상실되어 간다.

단말마라고 하는 바람이 몸 속에서 나올 때 뼈와 살이 떨어지도다.[임종용심초]

몸 속에 바람이 불어 오체를 갈기갈기 찢는 것처럼 느낀다는 임사체험도 있다

死苦라고 부른다

 

  니찌칸 상인은 “善業있으면 고뇌 많지 않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장의사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말한다. “분명 죽은 사람을 化粧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꾸며도 죽음의 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 이것만은 절대로 돈으로 사거나 지위로 얻을 수 없다. 여러 경우를 보아 왔지만 결국 그 사람이 살아 온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니치렌 대성인은 임종의 상에 사후의 상태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신다.

선인은 안색이 희어지고 몸도 가볍고 부드럽게 된다(센니치니 부인답서1316)

 

  만족감을 가지고 안심하면서 사망한 경우는 대개 혈관이 열린상태다.

그러면 혈액의 응고와 근육의 경직이 비교적 느리다.

그러기에 안색이 희고 몸이 부드럽다

 

  사후 무엇이 계속 되어가는가-業의 에너지가 계속된다.

불교에서는 영혼 등의 실체를 부정하고 無我라고 설한다.

영원히 불변하는 我는 실체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후 무엇이 계속되는가? 석존의 답은 業相續이었다.

 

  현재는 과거의 행위 <업:카르마>의 결과<과보>이며 ,

현재의 행위가 미래 생의 모습을 결정한다.

요컨대 행위<업>의 영향이 차례로 생사를 초월하여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업-身口意의 삼업이라고 하는 것처럼 색심의 행위를 말한다.

한 것, 말한 것, 생각한 것, 그것들의 영향이 사라지지 않고 모두 미래로 계속된다는 것이다.

업의 에너지가 생사를 초월하여 계속되는 것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있다. 열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변하거나 위치에너지가 전기에네지로 변환되는 일은 있어도 무에서 갑자기 에너지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며 지금 있는 에너지가 갑자기 사라지는 경우도 없다는 것이다.

 

  르네 위그씨는 명저 [형상과 힘]에서 논하고 있다.

원자의 세계에서 대우주의 생성까지 형상과 힘이라는 원리가 역동적으로 꿰뚫고 있다고 한다.

힘이란 지금의 경우 에너지의 별명이라 해도 좋다.

그 에너지가 어떤 작용에 의해 안정된 형상을 만든다.

그 형상에 담겨진 에너지가 속행하면 또 다른 형상을 취하거나 에너지 그 자체로 되돌아 간다.

 

  불법의 눈에서 보면 힘이란 공제의 측면이며, 형상이란 가제의 측면이다.

生과 死에서 업의 에너지가 임시로 일정한 ‘형상’을 취했던 것이 生이며, 그 ‘형상’을 무너뜨리고 에너지의 흐름 그 자체로서 우주의 생명류에 녹아 들어가는 것이 死라고 생각하면 된다.

 

  위그씨는 힘<에너지>이 형상으로 되기 위한 중요한 요소로서 波動을 들고 있다.

 

  業의 연속성을 맡은 아뢰야식

업에는 선업과 악업이 있으니까 각 생명체의 과거세로부터 선악의 업력(에너지)에 의해 현재의 생의 모습이 결정되어 가는 것이다.

+<선>의 에너지와 -<악>의 에너지가 균형을 맞추어 生의 형상이 결정되어 가는 것이다.

업력의 과보로서 머리가 좋게 태어나거나 아름답게 태어나기도 한다. -正報

싸움이 끊이지 않는 집에서 태어나는 것 등 -依報

 

  도다 선생님은 말한다.

“과거세에 행한 자신의 행장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 속에 전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불법의 소중함이 있다.”

“전에 했던 일은 전혀 관계없다. 나는 새롭게 태어났으니까”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왜 가난뱅이로 태어났던가, 왜 머리가 나쁘게 태어났던가, 이렇게 장사를 열심히 하는데 왜 잘되지 않을까....모두 과거세에 있는 것이다.

과거세에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타개하는가가 대성인의 불법인 것이다.

 

  대성인의 말씀에 “당신들은 박덕한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이 대어본존님을 배알하면 과거세에 아무리 나쁜 짓을 했어도 전부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한 것과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있다.

 

  생명을 지탱하는 업의 에너지 모두가 현재 표면으로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세로 한정되지는 않아도 언젠가 그 에너지는 어떤 과보를 가져온다.

 

  업의 에너지가 어떻게 사후에도 계속되는가를 설한 것이 九識論이다.

5식: <眼,耳,鼻,舌,身識> 감감기관인 오관에 따르는 식

6식: 意識(오식을 통괄함),모든 사항을 추리 판단하는 지성의 움직임,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대부분 이 육식만으로 영위되고 있다.

7식: 말나식, 육식 까지가 境에 緣해서 일어나는 마음인 것에 대하여

경에 연하지 않고 사고 감정 그 자체를 생각하고 헤아리므로 思量識이라 한다

여기까지는 죽어버리면 움직임이 정지.

8식: 아뢰아식, 무의식의 영역, 삼세에 걸쳐 계속 움직인다.

팔식의 생명류는 한 개인의 경계를 초월하여 다른 생명의 에너지와 교류하고 있다.

팔식이라는 생명 내오의 차원에서는 업의 잠재적 에너지가 가족, 민족, 인류의 잠재적 에너지와 합류하고 나아가서는 동물, 식물이라는 다른 생명과도 융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 사람의 인간혁명이 가정이나 사회의 숙명도 전환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의 생명 오저의 에너지가 악업에서 선업으로 바뀌는 것이 다른 생명의 업의 전환에 연동되어 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악의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는 시대에 악업을 선업으로의 전환은 쉽지 않다.

9식: 根本淨識, 아마라식, 구식심왕진여의 도읍, 妙法蓮華經

팔식도 포함하는 우주생명 그 자체를 촉발함으로써

일거에 선악의 업 에너지를 極善의 에너지로 바꾸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 法華經이다.

수량품의 ‘구원의 부처’는 무시무종의 근본정식을 인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근본정식을 촉발함으로써 개인의 선악의 업 에너지는 모두 가치창조로 향한다.

사후의 생명은 業의 생명류가 空의 상태에서 우주생명과 일체되는 것

공이기에 유도 무도 아니다. 우주의 이곳에 있다든가 저곳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우주생명 전체와 일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양자역학에서 빛이 파동임과 동시에 입자의 성격을 가진다.

空의 상태인 생명을 라디오의 전파로 비유

세계에는 다양한 방송국에서 보내는 여러 가지 파장의 전파가 서로 교차하고 있다.

보고 싶은 방송의 파장에 채널을 맞추면 소리가 들리고 영상이 보인다.

사에서 생으로의 변화인 것이다.

 

  인간도 태어날 때 자기 자신의 업 에너지에 적합한 색심 즉 正報와 어울리는 환경 즉 依報를 얻어 태어난다. 물론 의정불이로서 일체이다.

우리들 각자의 생명은 십계 어딘가에 해당된다.

 

  도다 선생님은 그 십계의 차이를 파장의 차이로 비유하고

십계의 차이를 생명의 파장으로 했다

우주의 생명에도 십계가 있다.

그 사람의 임종의 일념이 지옥계라면 우주생명의 지옥계에 녹아든다.

천계라면 천계에 녹아든다.

자신의 생명의 파장과 일치하는 파장을 가진 우주생명의 십계 어딘가에 녹아든다.

우주생명에 갖추어진 ‘십계’라 해도 우주의 어딘가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지옥계라도 천계라도 불계라도 우주전체이다.

거기에 녹아드는 각계의 생명도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고 있다.

그러기에 연만 있으면 우주의 어느 곳에 있어도 곧바로 감응할 수 있다.

그리고 우주 가운데서 가장 적합한 색심과 환경을 선택하여 일개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

 

  우주전체에 퍼져있다고 해도 생명으로 보면 넓은 것이 아니며

개자씨와 같은 생명체 속에 있어도 그것이 좁은 것이 아니다.

실체적으로 퍼져 있었던 것이 무한한 공간을 넘어서 모여든다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명복하고 있는 것이지 분산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어디에 있어도 먼 것이 아니라 일순간에 현현하는 것이다.

 

  사후의 생명도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느낀다.

느끼는 주체는 선악의 업에 물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류 그 자체이다.

시시각각에 변화해 마지않는 그 생명류 이외에 자기라는 것은 없다.

그 흐름은 언제나 다른 생명류와 緣起의 관계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기에 無我인 것이다. 고정적인 실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라는 생명류는 엄연하게 존재한다.

자기 자신의 생명류를 생명의 我 로 표현해도 좋다. 말하자면 空, 無我라는 실상을 파악한 다음에 말이지요

 

  생의 특징은 능동성에 있지만 사의 생명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이다.

사의 생명은 자신의 생명 실감을 스스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생의 생명은 기저부가 지옥계, 인계, 천계 등으로 바뀔 수가 있지만

사의 생명은 기저부의 생명감 이외에는 없어지고 만다.

지옥계의 기저부를 가진 생명은 죽음과 함께 우주의 지옥계와 일체가 되고

고뇌 일색으로 물들여 지는 것이다.

천계나 인계의 기저부를 가진 생명은 死苦를 타고 넘은 다음에는 생명의 我가 평온함을 되찾아 충실한 만족감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결국 불계를 기저부로 한 생명은 순식간에 대우주의 불계와 일체가 되고, 그 황금의 대환희로 감싸여 갈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 우주가 불국토 라고 실감하면서 아차토안온 천인상충만 중생소유락 제천격천고의 경애를 즐기면서 스스로의 서원대로 구원의 부처와 일체된 활동을 생사불이로 해간다.

 

  사후의 생명을 바꿀 수 있는가

이쪽에서 부르는 제목은 우주생명에 명복하고 있는 생명에도 도달한다.

 

  도다 선생님은 “제목의 힘은 위대하다. 괴로운 업을 느끼는 생명을 마치 화원에서 놀 수 있고 편안한 꿈과 같은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제목의 음성이 전 우주로 도달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자의 제목이 사후의 생명에도 통한다.

그러나 사후의 생명에서 살아있는 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도다 선생님은 죽은 자의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에 대해

“살아 있는 사람도 십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대우주에 녹아들고 있는 사후의 생명 파장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것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생각한다.”

요컨대 이쪽의 생명력이 약하기 때문에 저쪽의 생명의 파장을 받아

자신이 바로 라디오나 TV의 기계처럼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이 보거나 듣거나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히려 이쪽이 강한 신심으로 생명력을 내서 이쪽의 불계의 생명의 파장을 보내어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죽은 선조을 사령 등이라고 속여 왔다. 그와 같은 속임수에 걸려들어서는 안된다.

 

  전 우주가 생사의 이법이라는 리듬을 영원히 연주하고 있다.

생명의 대해라는 무한한 조류는 용솟음치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하면서 일순간도 정체하지 않고 생과 사의 드라마를 되풀이하며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 원동력을 수량품에서는 여래의 ‘神通之力’이라고 설했다.

生住異滅의 森羅三千의 당체 모두가 神通之力의 體이니라. (어서 753)

태어나서 생명활동을 영위하고 쇠하고 소멸해 가는 우주만상의 당체는 (수량품의 구원의 여래의)신통한 힘의 본체이다.

이 신통지력-근원의 대생명을 나의 몸에 열어 나가시오라는 것이 수량품의 간요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통지력이라고 하고 우주 생명이라 해도 광선유포로 전심전력을 다해 행동하는 가운데서만 감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一心欲見佛 不自惜身命

도다 선생님은 난과 정면으로 맞서서 싸우시다 감옥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으셨다.

생도 사도 초월한 사명감에 서서 광선유포를 위해서 목숨도 버리고자 맹세한 그 신심에 의해 생사의 실상을 각지하셨던 것이다.

삼세 끝까지 광선유포를 향해 끝까지 싸워간다.

그 신심이 바로 생사의 대해를 영원하고도 유유하게 건너는 大船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