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의 지혜 - 부처란 생명!
法華經의 智慧
일본의 도다 선생은 23세에 어린 자식을 잃었다. 세 살 된 딸이었다. “차가운 시체를 껴안고 밤새도록 엎드려 울었습니다. 그 때 만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내 아내가 죽는다면..,하고 나는 울었습니다.그 아내도 죽었습니다. 만약 내 어머니가 죽는다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들어가 나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나는 몸이 떨렸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가 경전을 약간 읽게 되어 아, 잘 알았습니다.”라고 해결했으나 死의 문제는 20여년 걸렸습니다. “아이를 잃고 눈물로 지새우자 아내의 죽음도 나 자신의 죽음도 두렸웠습니다. 이것을 겨우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도다는 전시중에 일본의 ‘천조태신’이라는 신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했다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대를 만들기 위해 생명의 훌륭함, 존귀함, 무한한 가능성을 설해 밝힌 철학이 절대로 필요하다.
난해한 현대의 佛法을 소생시켜 전 민중의 것으로 했던 것이다. 핵심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그대로 니치렌 대성인 佛法의 극설로 통한다.
전시 중의 구치소라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 하루 일만 번 이상의 창제를 실행하면서 실로 긴 생명을 걸고 법화경에 육박하여, 이미 법화경을 세 번 거듭 읽고 네 번째로 읽으면서 ,法華經(법화경)의 開經(개경)인 無量義經(무량의경)의 난해한 文(문)에 대해 사색하고 있을 때 “부처란 생명이다”라고 覺知(각지) 한 것이다.
무량의경의 문에는
其身非有亦非無(기신비유역비무)
非因非緣非自他(비인비연비자타)
非方非圓非短長(비방비원비단장)
非出非沒非生滅(비출비몰비생멸)
非造非起非爲作(비조비기비위작)
非坐非臥非行住(비좌비와비행주)
非動非轉非閑靜(비동비전비한정)
非進非退非安危(비진비퇴비안위)
非是非非非得失(비시비비비득실)
非彼非此非去來(비피비차비거래)
非靑非黃非赤白(비청비황비적백)
非紅非紫種種色(비홍비자종종색)
[그 몸은 유도 아니고 또한 무도 아니며
인도 아니고 연도 아니고 자타도 아니며
방도 아니고 원도 아니고 장단도 아니며
출도 아니고 몰도 아니고 생멸도 아니며
조도 아니고 기도 아니고 위작도 아니며
좌도 아니고 와도 아니고 행주도 아니며
동도 아니고 전도 아니고 한정도 아니며
진도 아니고 퇴도 아니고 안위도 아니며
시도 아니고 비도 아니고 득실도 아니며
피도 아니고 차도 아니고 거래도 아니며
청도 아니고 황도 아니고 적백도 아니며
홍도 아니고 자도 아니고 적백도 아니며]라는 34의 非(비)가 되풀이 된다.
아니라는 것이 34번나오는데 그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몸이란 佛身(불신)을 말한다. 경문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체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아니다’라는 부정형을 거듭하는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이다.
어떠한 정의를 해도 거기서 불거져 나오는 무언가 이다. 더욱이 아무리 부정형을 거듭해도 그래도 아직 엄연히 존재하는 실재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단순히 언어의 표현을 넘어서는 것이라든가, 불가사의한 것, 空(공)이라고 하여 부처를 초월적인 것으로 추켜올린다 해도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도다 선생께서는 실감으로 파악하시고 싶었다. 체득하시고 싶었다. 공허하고 관념적인 이해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바로 몸으로 읽으려고 하신 것이다.
법화경에는 일체중생의 성불을 설한다. 그렇다면 그 부처란 어떠한 실재인가. 성불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불교 전체의 근간에 관련된 문제이다. 도다 선생께서는 이 근본문제를 깊이 사색하시고 추구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돌연 도다 선생의 뇌리에 생명이란 말이 떠올랐다. “부처란 생명이다”라고 완벽하게 읽으신 것이다.
도다 선생께서는 그때 마음속으로 외쳤다 “부처란 생명이다! 생명의 표현이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생명에 있는 것이다. 아니 밖에도 있다. 그것은 우주 생명의 한 실체이다!”
생명은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실감할 수 있는 구체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도다 선생의 오달은 불법을 모든 사람의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생명에는 다양성이 있다. 풍요로움, 활달함이 있다. 그러면서도 법칙적이고 일정한 리듬이 있다.
이 다양성의 조화를 가르친 것이 一念三千(일념삼천)이다. 그 일념삼천을 체득한 분이 부처이다.
더욱이 생명에는 개방성이 있다. 외계와 교류하며 물질과 에너지, 정보를 끊임없이 교환하는 열린 존재이다. 그러면서 자율성을 갖는 것이 생명이다. 우주 전체로 열린 개방성 그리고 조화로운 자유, 이것이 생명의 특징이다.
부처의 광대무변한 경애란 생명의 자유, 개방, 조화를 최대한으로 실현한 경애라고도 할 수 있다.
妙(묘)의 三義에는 開(열다),圓滿(원만), 蘇生(소생)의 義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생명의 특질이다. 그리고 부처의 특질이다
도다 선생은 “넓은 곳에서 大(대)자로 누워 대공을 보고 있는 듯하다. 자네들도 이런 경애가 되라.”
불법의 목적은 결국 경애를 바꾸는데 있다. 생명론이라 해도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 자체가 생명철학이다.
석존은 생로병사라는 인생의 苦(고)와 대결하여 자기 內奧(내오)의 광대한 세계를 열어갔다.
천태도 또한 법화경을 근본으로 생명을 내관하고 거기서 각지한 것을 일념삼천으로 설명했다.
니치렌 대성인은 생명 본원의 당체를 ‘南無妙法蓮華經’라고 깨달았다. 그것을 전 민중이 각지하고 행복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御本尊을 도현하시고 어의구전을 비롯한 여러 어서에서 생명철학을 설하신 것이다. 즉 생명론이야 말로 佛法의 본체였다.
더욱이 도다 선생의 생명론은 그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다. 과학적인 분석과 종합을 되풀이하여 생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나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도다 선생께서 진리에 대한 전 인격적인 격투를 하여 오저에서 퍼 올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법화경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생명론에는 지식을 줄 뿐 아니라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희망으로 현실의 행동으로 연결된다. 살아가는 힘을 솟게 하는 事의 철학이다.
이 철학을 그대로 실천으로 옮기면 거기서 무기력하고 고민하는 인생을 충실과 기쁨의 인생으로 전환하는 자기변혁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인간혁명이란 성불의 현대적 표현이다.
더욱이 선생께서는 ‘법화경은 무엇을 설하려고 했는가’ 하는 사색을 계속하시어 地涌(지용)의 보살로서 虛空會(허공회)의 의식에 참가하는 체험을 하신다.
부처라면 인격적인 면이 앞선다. 그것만으로는 어딘지 자신과 동떨어진 이미지가 따른다. 또 법이라고 하면 법칙이나 현상 등 비인격적이 된다. 그뿐이라면 따스함이 그다지 없다. 본래 부처도 법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경우에는 그 양면이 포함된다.
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생명은 존귀하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부처란 생명이다.”는 선언은 무엇보다 불법의 진수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생명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파악하면 될까
삼세의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 해도 아무도 본 사람은 없다.
자기 속에 我(아)라는 것이 있다. 죽어도 그 我(아)는 줄곧 계속된다. 이 我(아)가 생명의 실체이다.
我(아)라는 이름을 붙이나 我란 우주를 말한다. 우주의 생명과 우리들의 생명이 다른가 생각해도 다른 것은 육체와 마음이지 생명에는 변함이 없다.
도다 선생의 생명론은 우주 자체가 곧 생명 자체, 생명이란 우주와 함께 본유상주임을 논한다.
그리고 “잠들었다가 일어나고 일어났다가 잠드는 것과 같이 살다가 죽고 죽었다가 살아서 영구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마치 눈을 떴을 때 어제의 마음의 활동상태 그대로 지금 또한 그 뒤를 쫒아 활동하듯이 새로운 생명은 과거의 생명의 業因(업인)을 그대로 받아 이 세상의 果報(과보)로 하여 계속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있다고 하고 나무를 ‘대우주’라면 거기서 잎이나 꽃이 많이 나온다. 이것이 개개의 생명과 같다.
이 물(책상 위의 물잔)을 ‘대우주’라면 바람이 불어 여기에 파도가 생긴다.
일어난 파도, 그것이 우리들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바람이 없어지면 또 원래대로 되고 만다.
바다를 대우주라면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파도가 우리들의 생명이다.
“흐르고 있는 것도 아니며 멈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허공과 같다.”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무한한 대우주이기도 하며 동시에 무수한 생명체 즉 소우주이기도 한 하나의 실재 . 역동적인 변전을 계속하면서 더욱이 영원히 상주하는 거대한 생명 . 이 우주생명이라고도 할 엄연한 실재를 부처라고도 하며 묘법이라고도 한다. 모든 사람은 이 존귀한 실재의 당체이다.
법화경은 諸法實相(제법실상)이라고도 설한다. 제법이란 모든 개개의 生命事象(생명사상)이다. 그 실상 즉 진실한 상이란 우주생명 자체이다. 이 불가사의한 진리를 도다 선생께서는 “부처란 생명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을 알면 절대로 殺(살)의 마음 등이 일어날 리가 없다. 무엇인가를 파괴하는 것은 자신을 파괴하게 되기 때문이다
DNA에 관한 중요한 시점은 생명자체가 DNA를 만든 것이지 DNA가 생명을 만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우주 즉 생명이며 생명 즉 대우주이다. 생명 자체가 작가이며 더구나 작품이다.
‘부처란 생명이다’라는 것은 생명이야말로 절대이며 최고의 실재라는 선언이기도 했다.
인간의 존엄을 잃게 하는 온갖 왜곡된 것에 대한 도전의 개시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