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法 .SGI

기원으로 한탄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신심

혜광리 2011. 2. 15. 10:00

Dogwood Blossoms

 

 

< 인 간 >

말(言)과 글(書)

니치렌 대성인의 어서를 배독해 가노라면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끝맺는 편지를 자주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서장(書狀)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말은 마음을 다하지 못하니 만사는 상면시를 기약하리라.” (어서 1012쪽), “말은 글로 다 할수 없으며 글은 마음을 다 할수 없으므로 이만 그치나이다.” (어서1498쪽)고 말씀하시고 있다.
혹은 “모든 일은 지면에 다하기 어려우니 조속히 대면을 기하노라.” (어서 1264쪽)응으로 쓰시고 있다.
이러한 말씀을 배견해 볼 때 니치렌 대성인께서 서면이나 글보다 제자 단나 한 사람 한 사람과 직접 만나 지도, 격려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가를 새삼 확인할 수있다.
“서장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마음을 다하지 못한다.” “말은 글로 다 할 수 없으며 글은 마음을 다 할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그처럼 많은 편지를 쓰시면서도 대성인은 편지로는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이나 전하고 싶은 마음을 다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대면’할 때는 제자 단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 생명전체의 모양을 파악하면서 불법이념을 지도해 생명을 변혁시키는 힘으로써 작용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여기에서 우리들도 어서를 배독할 때, 대성인께서 직접 제자 단나 한 사람 한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하려는 그 마음으로 배독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 사 회 >

성불논쟁(成佛論爭)

일천제(一天提)는 성불하는가 못하는가. 이것은 대승불교의 역사에서 큰 논쟁의 표적으로 되어왔던 문제이다.
특히 오성각별(五性各別)을 설해 천제불성불(闡提不成佛) 주장하는 법상종(法相宗)과 기타의 대승불교에서 논쟁 되었다.
일천제란 범어에서는 ‘욕구의 마음이 강해서 불도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신불구족이라해서 마침내 성불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 자리의 마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리의 마음을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고, 보리로 향하게 하는데에 법화경의 천제성불의 가르침의 진수가 있다.
그런데 이 존쟁 속에서 생겨 나온 생각에, 천제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조적인 보살도 성불하지 못한다는 것이 있다. 어디에서 그 같은 생각이 나타났을까. 그것은 보살들이 ‘일체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성불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홍서원(四弘誓願) 중의 ‘중생무변서원도’라는 서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탈 해야 할 중생은 끝이 없으므로 결국 보살은 언제까지나 성불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억지이론 같지만 이것도 확실히 일리(一理)는 있다. 자리(自利)잊고 타리(他里)만에 살려는 것은 아름답게 비춰지기는 하지만 만인이 실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진정한 보살행은 나머지 세가지의 서원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과 같이 자리도 포함하는 것이고, 그때 비로소 원만한 보리행으로 되어 보편성을 갖게 될 것이다.


<어구해설>

①일천제 : 일천지가라고도 한다. 본래는 인도의 쾌락주의 또는 현실주의를 가리켰다. 불법에서는 정법을 믿지 않으며 깨달음을 구도하는 마음이 없고 성불하는 기연을 갖지 않고 있는 중생을 말한다.
②법상종 : 제법의 성상을 분별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승의 학문종.
당대 현장이 인도에서 성유식론을 가져와 번역하여 법상유식의 의를 선양한 후 번창했다.
③사홍서원 : 보살이 처음 발심했을 때 일으키는 4가지 서원. 중생무변서원도, 번뇌무수서원단, 법문무진서원지, 불도무상서원서이 그것이다. 일체의 보살이 일으켜야 하는 서원이기에 총원이라고도 한다. 또한 이 서원은 광대보편이기 때문에 홍이라고 하며 마음으로 굳게 맹세하기에 서라 하고, 수생의 결과로 만족을 바라기 때문에 원이라고 한다.


< 신 심 수 행 >

한탄(恨歎)

사람이라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원하고 있던 일이 잘 돼가지 않게 되면 한탄하게 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특히 여성은, 일반적으로 땅에 발을 붙인 현실주의자다.
그런 만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일상의 현실에 붙잡혀서 한탄하는 마음으로 빠지기 쉬운 일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대성인은 괴로운 현실을 앞에 둔 부인신도에 대해 따뜻하게 포용하면서도 한탄해서는 안된다고 힘차게 격려하시고 있다.
예를 들면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도키니에게는 “어찌하여 병도 사라지고 수명이 연장되지 않을소냐 하고 강성히 믿으시어, 몸을 소중히 하고 마음속으로 아무 일도 한탄하지 말지어다.” (어서 975쪽)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무엇 때문에 한탄하면 안된다고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 어문의 전반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묘법에 대한 신이 있으면 희망이 솟아 언제까지나 한탄에 머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대성인은 어본존을 도현하시고, 현재가 어떠한 상황이건 어본존을 믿고 또 믿어 자행화타의 실천에 면려해 가면 틀림없이 불계의 생명을 용현해서 인생승리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해주셨던 것이다.
따라서 어본존을 수지한 우리들은 어떠한 사태에 있더라도 미래를 힘차게 열어갈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갈 자세가 중요하다.
한탄하는 마음을 어본존께 향한 기원의 마음으로 바꾸어간다.
이것이야말로 투철한 신심의 자세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