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회(대화)의 중요성
좌담회 (대화) 의 중요성
명령이나 "놀면 안 된다"는 식의 호소로 사람을 움직이는 시대는 이미 아니다. 진심으로 납득하지 못하면 누구도 행동하지 않는 시대이다. 또한 반대로 자기가 납득하면 생각지도 못한 굉장한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충실한 "협의회"가 더욱 중요하며, 일대일의 대화가 더없이 중요해진다.
어떠한 일도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면 싫증도 나고 정체도 생긴다. 그러므로 중요한 회합일수록 일회 일회 신선하고 의의 있게 행동해야만 한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와 같은 일방통행도 아니다. 문자처럼 정적인 것도 아니다. 소리와 소리, 인간과 인간, 생명과 생명이 접촉하고 교류하는 그 속에서 강한 민중문화가 맥동친다. '혼(魂)이 없는 정보'가 이를테면 홍수처럼 흐르는 것이 현대사회이다. 그럴수록 육성으로 하는 '살아 있는 말'의 교류가 얼마만큼 사회를 건전하게 지탱하는가. 학회의 좌담회가 가지는 의의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다.
왜 대화를 중시하는가 하면. 대화나 언론은 인간이 인간임을 자랑하는 증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보다 단적으로 말하면 , 말의 '바다'속에서 인간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든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숨김 없는 데화이다. 우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솔직하고 성실한 대화를 계속하는 데서 신앙의 계기도 자연히 찾아온다.
정법정의(正法正義)에 갖가지 폭언과 악구가 있는 것은 어서, 경문에 비추어 필연적인 것이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엄연히 반론하고 논박하는 강함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강함만으로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납득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상대방의 주장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이해를 보여야만 대화는 더욱 깊어지고 결실이 많아진다.
상대가 누구든 일체의 감정을 넓고 크게 감싸면서 어떻게 마음을 열고 납득과 공감을 넓힐 것인가. 그것은 모두 자신의 경애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다. 상대방의 희로애락에 유유히 편승하면서 자재롭게 마음의 오저 깊숙히 노저어 들어가는 융통무애의 경애를 열어가는 이외에는 없다. 여기에 대화의 인간학의 정수가 있다.
대화는 실질적 활동으로 보여도 발 밑에 빛을 비추는 일로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로 착실한 대화운동에 평화의 길도 열리는 법이다.
세간의 일반차원에서도 '명쾌한 언론' '확신 있는 말'의 힘은 실로 크다. 예를 들어 짧은 한 마디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일변시킬 수 있다. 하물며 강한 신심의 확신으로 가득찬 '진심'과 '성실'의 대화는 태양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듯이, 사람들의 마음을 환하게 빛낸다. 반대로 어둡고 약한 이야기를 하거나 급소를 벗어난 이야기로는 상대방의 깊은 의심을 털어버릴 수 없다.
광선유포에 대한 신심의 기쁨으로 가득찬 경우는 설령 작은 인원이라도 공덕은 크다. 오히려 어려운 속에서 분발하는 곳일수록 복덕으로 가득 차는 것은 틀림없다.
도다 선생님은 누구와도 솔직히 생기 있게 대화하셨다. 서민에서 장관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화의 역사를 만드셨다. 인간만이 사회, 세계에 끝없는 '대화'는 금전이나 입장에 의하지 않고 커다란 가치를 낳는 힘이 있다. 나도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해 왔다. 이른바 유명인 약2천명에 이른다. 이것은 나의 역사이자, 광포의 역사이기도 하다.
학회원은 지금까지 법을 위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이야기에 이야기를 거듭하고 호소에 호소를 거듭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 왔다. 이 땅에서 저 땅으로 한 사람에서 만인으로 진실한 말을 전하고 끝까지 전해 왔다. 그야말로 '광선유포'라는 미문의 도정은 '대화' '언론'에 의해 열려 왔다. 앞으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대화' '언론'의 정체는 '광포'의 정체로 연결된다. '정의'는 '정의', '진실'이라고 끝까지 외쳐 가는 것이다. 침묵할 필요는 없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 강한 일념과 행동의 강한 바람에 자욱히 낀 암운조차 어느 사인가 걷히고 승리의 태양이 빛난다. 그리고 상대방의 대응이 어떻든, 또한 일시적 상황이 어떻든, 정의를 끝까지 외친다는 사실은 엄연히 역사에 남는다.
작은 단위로 하는 간담이 중요하다. 직접 눈길과 눈길을 나누면서 하는 대화, 서로 따스함이 느껴지는 거리. 일방통행이 아닌 납득의 대화. 그렇게 해야만 지친 마음을 윤택하게 하고 닫힌 마음을 열고 미혹된 일념을 확신과 희망의 일념으로 바꿀 수 있다.
현대와 같이 변동이 큰 시대에는 경직된 조직, 관료화된 종교여서는 사람들의 다양한 니즈(needs:요구)에 응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미니간담' '좌담회'가 중요해진다. 조직의 확대와 더불어 보다 많은 섬세함이 필요하다. 즉 ① 전체적인 원칙의 명시 ② 작은 모임에서 납득할 수 있는 대화, 이 양쪽이 '인간적인 전진'의 양 바퀴가 된다. 학회의 전통인 좌담회와 미니간담의 시도는 이런 의미에서도 세계 종교계의 선구이다.
대화, 간담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잘 듣는' 일이다. 이것은 평범하게 보여도 어려운 일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 제논은 "인간은 하나의 혀와 두 개의 귀를 가지고 태어났다. 따라서 이야기하는 것의 두 배만 들어라"고 말했다. 한자에서 '총(聰)'자와 '성(聖)'자 모두 '이(耳)'가 의미의 중심이다.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총명'하며, 그 구극이 '성인(聖人)'인 것이다.
'동료가 동료에게 묻듯이' 불교의 원점은 이처럼 온화하고 거리가 없는 '대화'가 기조이다. 그러한 현대의 실천이 간담이며 홍법이다.
규모가 작은 투쟁의 승리는 학회의 실천으로 말하면 '미니간담'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가치창조의 행동에 해당할 것이다. 적은 인원으로 자유롭고 활달하게 인생과 신앙을 서로 이야기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지혜를 발휘하여, 말하자면 자기의 '입'을 광포를 위한 '무기'로 삼으면서 납득과 공감의 테두리를 넓히는 것이다.
혼자서 불법을 행하고자 그 불법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공포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동지를 격려하지도 않는다. 이래서는 대성인의 말씀 그대로 실천한다고는 할 수 없다. 좌담회나 개인지도, 또한 우인과의 대화, 이러한 어성훈 그대로의 행동을 대성인이 칭찬해 주실 것은 틀림없다. 대화,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무시한 일방통행적인 자세는 명확하게 대성인의 말씀에 위배된다. 스승에게 반역하는 방법이다.
지도자에게는 항상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듣는 노력과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만 한다. 타인이 말하는 것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훌륭한 지도자는 대화의 힘을 안다. 어떻게 대화의 장, 대화의 시간을 만들 것인지를 노력한다. 반대로 '평등한 대화;를 두려워하고 피하는 지도자는 시대에 역행하고 민중을 적대시하는 독선자, 독재자가 될 것이다.
가치 있는 대화는 인간밖에 할 수 없다. 따라서 대화를 소중히 한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증거가 된다. 대화로 구축한 승리는 불멸이다. 반대로 전쟁으로 싸워 얻은 '승리'는 아무리 큰 전과라고 해도 결국 없어지고 무너질 운명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