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法 .SGI

연예인 성공 체험담

혜광리 2010. 9. 1. 11:19

 

 꿈과 희망을 주는 '채플린'처럼

 

[인기연예인 조혜련 씨가 1996년 3월호 '법련'에 기고한 체험담]

 

 

며칠 전 "조혜련 씨, 저도 기원하고 있어요. 더욱 열심히 하세요"라는

이케다 선생님의 메시지가 왔다는 소식에, 가슴 속에서 뭉클함과 설레임을 느꼈습니다. 

"야! 나의 인생의 스승이신 선생님께 드디어 제자로서 인정받게 되는구나. 

이젠 선생님을 뵙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욱 더 성장하고 이뻐져야지. 

선생님 빨리 오세요"라고 말입니다.

 

94년, 95년은 저에게 있어서 최고의 해였습니다.  94년은 KBS 정식 개그우먼이 되어

"부푼 가슴을 안고~ 갔잖아" 등 집중여성채널로 알려지기 시작해

최고 연예인상, 여자 코미디 신인상, 인기상을 받았으며,

95년에는 MBC에서 코미디 여자 우수상 등 4개의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불과 3년 전에는 바라던 개그우먼이 못되고 시험에 4번이나 낙방한 후,

학비가 없어 시장에서 야채장사를 하고 집이 싫어 가출도 하는 등 그 당시에는

아무런 희망도 꿈도 없었습니다.  힘들어 하는 저를 본 언니의 신심 권유에도,

"됐어! 다 싫어. 언니나 해. 난 내가 개척해 낼 수 있어. 내 방식대로 살거야"

하면서 3년을 도망다녔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괴로웠던 저는, "좋다. 지푸라기라도 잡자. 

죽자살자로 제목만 부르면 바뀐다는데 한번 해보자"라는 심정으로

그때부터 회관에서 하루 10시간씩 꼬박 한달을 도전했습니다. 

제목을 부를 때에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고 일념이 안 서서 괴로웠으며

제목이 하기 싫어서 많이 울기도 했지만, 그래도 버텼습니다. 

내 숙명이 너무도 싫었기에...

 

꼬박 10시간 제목 도전과 더불어 숙독한 이케다 선생님의 인간혁명 소설,

젊은 날의 일기는 저에게 큰 힘을 주었고 인생의 가치관을 바꾸게 했습니다

"그래, 난 지금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지만, 어려운 현실을

선생님과 같은 마음으로 극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챨리 채플린 같은 사람이 될거야"라고 결의하기에 이르렀고,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보물을 남몰래 감추고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 미칠 지경으로 가슴에 환희가 솟아 올랐습니다

이렇게 도전한 지 1년 뒤, 저 자신도 상상할 수 없었을 만큼

보란 듯이 길이 열렸고, 지금은 많은 분들에게서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근, 방송인으로서 뚜렷한 철학과 목표없이 낙오되고 자살하는 연예인들을

주위에서 보면서 내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느끼고 있고,

"인간성 풍부한 사람으로서 한사람 한사람에게 평소에 따뜻하게 대해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불법을 넓히는 길이다.  힘든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자"

라고 결의하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오는 팬레터의 답장에도

선생님의 지도 말씀을 적고, "혜련 언니도 이렇게 이렇게 힘들었을 때에

이 불법(佛法)으로 극복했단다.  너도 인생의 목표를 두고서

촛점을 맞추어 나가라"라고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신심을 시작하고서 지금까지의 6, 7년 동안 만큼 소중한 시간은 없었고,

그 원점은 내 마음 속에 이케다 선생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짝하고서는 생명이 끝나는 코미디언이 아니라,

챨리 채플린처럼 역사에 영구히 지속될 수 있는 최고의 코미디언이 되어,

그 속에서 광선유포 해 나갈 것을 결의합니다. 

 

어본존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 혜련이 잘한다. 그래. 그래."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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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4일(화) 0:45 [중앙일보] 스크랩

 

조혜련, ‘3한4일’생활 2년 만에 NHK 진행자 꿰차

 

“일본엔 개그맨만 2000명이 넘어요. 공원에서 연습하는 팀이 너무 많아

사람들이 좋아하기는커녕 시끄럽다고 원성을 사죠.

그런 경쟁 속에서 한 프로에 고정 출연한다는 것만도 뿌듯해요.”

 

개그맨 조혜련(38·사진)이 또 한번 일을 냈다. 맨몸으로 일본에 진출한 지 2년6개월 만이다.

그간 TBS 시사 버라이어티쇼 ‘선데이 재팬’과 간사이TV의 토크쇼 ‘오조마마피’로

영역을 넓히더니, 이번엔 NHK 프로그램인 ‘니혼쓰(일본통) 리스트’의 공동진행자

자리를 확보했다. 최근 파일럿 프로그램이 전파를 탔으며, 내년 초에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된다. 이미 8월에 녹화를 마치고도 ‘방송 나간 뒤에나 보자’며 조심스러워했던 그를 만났다.

 

“새로 맡은 프로그램은 외국인의 시각으로 일본 관광지를 소개하는 겁니다.

‘조사원’이 돼서 남들이 지나치기 쉬운 관광 아이템을 짚어주죠. 가령 주제가

아사쿠사 신사라면 딱 그곳만을 하는 게 아니고 주변까지 조사해 관광 코스로 만드는 거죠.

이 프로그램에 캐스팅되기 위해 오디션을 봤어요. 일본 연예인들도 여럿 면접을 봤다더라고요.”
만나자마자 새 프로그램 ‘홍보’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몇 개 프로에 출연했느냐보다 어떤 프로에 나왔느냐는 걸 생각할 시점이죠.

얼마 전 ‘헤이x3’ ‘런던 하쓰’ 등 일본 간판 오락프로에 나갔던 건 그래서 의미가 깊죠.

최근 요미우리TV의 ‘오와라이 게닌노 나케루 하나시(개그맨들의 눈물의 이야기)’에

출연한 뒤로 ‘일본 활동이 업그레이드됐구나’ 하고 느껴요. 일본 최고 코미디언 31명이 나와

3분씩 가장 감동적인 사연을 말하는데, 거기서 유일한 외국인으로 나와 1등을 했어요. ”

 

일본 얘기가 더 나오기 전에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궁금했다.

왜 국내에서도 인기가 한창일 때 새로운 도전을 생각했는지 말이다.

 

“5년 전 일본에 간 게 계기였죠. 예전과 달리 일본인들이 “한국말이다” 하며 관심을

가지는 걸 보고 꿈을 키웠어요. 영화·드라마에 비해 교류가 덜한 오락 버라이어티에서

가능성을 엿봤어요. 하루 8시간씩 일본어에만 매달렸죠. ”

 

일본으로 건너간 뒤 그가 겪었던 고생은 널리 알려져 있다. 보통 신인처럼 PD들에게

명함을 뿌리고 ‘골룸’ 같은 ‘독한’ 개인기를 선보였지만 외면당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그런데 이제는 연말에 최고 연예인만 출연한다는 ‘홍백가합전’에 섭외될 만큼 내공을 쌓았다.

 

“일본의 대표 개그맨 아카시아 산마가 진행하는 ‘오도루 산마고텐(춤추는 산마저택)’에

처음 출연했죠. 그런데 한국처럼 리액션을 크게 하고, 모르는 질문엔 ‘모른다’라고

솔직하게 답했더니 막 웃더라고요. 그때 ‘아, 내숭 없고 털털한 조혜련 캐릭터를

일본에서도 살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죠.”

 

일본 TV에 나오는 그를 보면 일본어를 모르더라도 ‘대단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다 보니 아직도 방송 중에 한국말이 튀어나갈 때가 있어요.

말이 서툴어 바로 받아치지 못해서 안타까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8개월 전부터 일본인 11명과 함께 살고 있어요.”

 

가족 얘기가 나와 내친김에 두 아이 이야기도 물었다. 일주일에 절반 이상을

떨어져 사는 엄마에 대해 불만은 없을까.

 

“처음엔 미안했지만 이젠 아이들에게 ‘엄마는 바쁘게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가르쳐요.

제 엄마도 바빠서 저를 잘 챙겨주지 못했지만 큰 뒤로는 원망해 본 적이 없거든요.

제 아이들도 그럴 거라 믿어요.”

 

가족과의 단란한 생활도 포기한 채 일주일의 사흘을 한국에서, 나흘을 일본에서

지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그의 포부는 뭘까.

 

“일본에서는 나이가 들어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개그맨이 많아요. 사카이 마사야키,

구로야나기 데쓰코 등도 다 예순이 넘었죠. 하지만 녹화가 길어져도 모두 힘들다는

불평 없이 일해요. 한국처럼 '내가 선배니까 나 먼저 찍어줘' 하는 일이 없더군요.

그런 일본 연예계를 보며 60,70이 돼도 개그맨을 천직으로 알고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

 

글=이도은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