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성불초
일생성불초. 383쪽~ 384쪽
대저 無始(무시)의 生死(생사)를 멈추고 이번에
결정코 無上菩提(무상보리)를 증득하려고 생각한다면
모름지기 衆生本有(중생본유)의 妙理(묘리)를 觀(관)할지어다.
중생본유의 묘리란 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妙法蓮華經라고 奉唱(봉창)한다면
중생본유의 묘리를 관하는 것으로 되느니라.
文理(문리)가 眞正(진정)한 經王(경왕)이므로
文字卽實相(문자즉실상)이고 實相卽妙法(실상즉묘법)이니라.
오직 究極(구극)은 一心法界(일심법계)의 趣旨(취의)를
설해 나타냄을 묘법이라고 이름하는 故(고)로
이 經(경)을 諸佛(제불)의 智慧(지혜)라고 하느니라.
일심 법계의 취지란 十界三千(십계삼천)의 依正色心(의정색심),
非情草木(비정초목), 虛空刹土(허공찰토) 어느 것도 제외하지 않고,
먼지도 남김없이 일념의 마음에다 포함하고, 이 一念(일념)의 마음이
法界(법계)에 편만함을 가리켜서 萬法(만법)이라고 하느니라.
이 理(리)를 覺知(각지)함을 一心法界(일심법계)라고도 말하는 것이니라.
但(단) 妙法蓮華經라고 부르며 수지한다해도,
만약 己心(기심)의 밖에 法(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묘법이 아니라 추법이니라. 추법은 今經(금경)이 아니로다.
금경이 아니면 방편이며 權門(권문)이니라.
방편 권문의 敎(교)란다면 成佛(성불)의 直道(직도)가 아니고,
성불의 직도가 아니면 多生曠劫(다생광겁)의 修行(수행)을 거쳐도
성불되는 것이 아니므로 一生成佛(일생성불)을 이루기 어려우니라.
그러므로 妙法라고 부르고 蓮華라고 읽을 때에는
나의 一念(일념)을 가리켜서 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한다고
깊이 信心(신심)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통틀어서 一代八萬(일대팔만)의 聖敎(성교),
三世十方(삼세시방)의 諸佛菩薩(제불보살)도
나의 마음 밖에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말지어다.
그러므로 불교를 배운다고 할지라도
心性(심성)을 觀(관)하지 않는다면
결코 生死(생사)를 出離(출리)할 수 없느니라.
만약 心外(심외)에 道(도)를 求(구)하여
萬行萬善(만행만선)을 수행함은
비유컨대 貧窮(빈궁)한 사람이 日夜(일야)로 이웃의
財寶(재보)를 셀지라도 半錢(반전)의 得分(득분)도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천태의 釋中(석중)에는 만약 마음을 관하지 않는다면
重罪(중죄)는 滅(멸)하지 않는다 하고, 만약 마음을 관하지 않는다면
無量(무량)의 苦行(고행)으로 된다고 判定(판정)했느니라.
故(고)로 이와같은 사람을 佛法(불법)을 배우고
外道(외도)로 된다고 창피를 주었느니라.
이로써 지관(止觀)에는 雖學佛敎(수학불교)
還同外見(환동외견)이라 解釋(해석)했느니라.
* 비록 불교를 배웠으나 오히려 외도의 견해와 같다는 뜻*
그러므로 부처의 이름을 부르고 經卷(경권)을 읽고 꽃을 뿌리고
향을 피우는 것까지도, 모두 나의 일념에 갖추게 되는
功德善根(공덕선근)이라고 信心(신심)을 取(취)해야 할지니라.
이에 의해서 정명경 중에는 諸佛(제불)의 해탈을 중생의 心行
(심행)에 求(구)하면 衆生卽菩提(중생즉보리)이며
生死卽涅槃(생사즉열반)이라고 밝혔느니라.
또 중생의 마음이 더러워지면 土(토)도 더러워지고,
마음이 깨끗하면 土(토)도 淸淨(청정)하다고 해서
淨土(정토)라 하고 穢土(예토)라 함도 土(토)에 둘의 차이가 없으며,
오직 우리들의 마음의 善惡(선악)에 依(의)한다고 쓰여있다.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같으니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비유컨대 暗鏡(암경)도 닦으면 玉(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只今(지금)도 一念無明(일념무명)의 迷心(미심)은 닦지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法性眞如(법성진여)의 明鏡(명경)이 되느니라.
깊이 信心(신심)을 일으켜 日夜朝暮(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하면 오직 南無妙法蓮華經라고
奉唱(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대저 妙(묘)란 무슨 뜻이뇨? 오직 나의 일념의 마음이
不可思議(불가사의)함을 妙(묘)라고 하며, 불가사의란
마음도 미치지 못하고, 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즉 일어나는 바의 일념의 마음을 찾아보면,
있다고 말하려 하면 色(색)도 質(질)도 없고, 또한 없다고 말하려 하면
깆가지로 마음이 일어나니, 有(유)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無(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느니라. 有無(유무)의 두 말도 미치지 못하고,
有無(유무)의 두 마음도 미치지 못하며, 有無(유무)가 아니면서도 또한
有無(유무)에 두루 미치어 中道一實(중도일실)의 妙體(묘체)로서
불가사의함을 妙(묘)라고 이름하고,
이 묘한 마음을 이름하여 法(법)이라고도 하느니라.
이 法門(법문)의 불가사의를 나타냄에 譬喩(비유)를 事法(사법)으로
表現(표현)하여 蓮華라 이름함이라. 一心(일심)을 妙(묘)라고 안다면
또한 轉換(전환)해서 餘心(여심)도 妙法(묘법)이라고
아는 바를 妙經(묘경)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즉 善惡(선악)에 따라서
일어나고 일어나는 바의 念心(염심)의 當體(당체)를 가리켜서
이는 묘법의 體(체)라고 說(설)해
말씀하신 經王(경왕)이므로 成佛(성불)의 直道(직도)라고 하느니라.
이 뜻을 깊이 믿고 妙法蓮華經라고 부르면
一生成佛(일생성불)은 결코 의심할 바 없느니라.
그러므로 經文(경문)에는 "나의 滅度(멸도)의 後(후)에 있어서 응당히
이 경을 수지할지어다. 이 사람은 불도에 있어서 決定(결정)코
疑心(의심)할 바 없느니라."고 설했느니라. 결코 의심을 하지 말지어다.
황공하오. 一生成佛(일생성불)의 信心(신심)
南無妙法蓮華經 南無妙法蓮華經.
日蓮 花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