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평생을 술로 보내셨다. 가정에 대한 무관심과 술과 함께 다가오는 폭력에 집안은 늘 그림자로 가득했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나를 인근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내 주셨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던 난 무리한 학교생활에 겹친 스트레스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병상에 눕게 됐다. 류마티스관절염에 여러 합병증이 더해 척추가 마비되고 관절은 탈골됐으며 점점 증세는 더해 결국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어머니와 함께 크고 작은 병원을 전전하며, 온갖 민간요법과 수많은 약을 모두 복용했지만 병은 갈수록 악화됐다.
병원에서는 급기야 불치라는 판정까지 내려, 병상에 누운 채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골 집으로 내려와 골방에 누워 천장만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관절이 하나 하나 녹아내리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는 날만을 기다렸다. 어머니도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해 내 손을 잡고는 ‘우리 함께 죽자꾸나’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난 불법(佛法)을 만났다.
우연히 알게 된 장년부께서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어떤 병마도 이길 수 있어요. 준하씨도 간절히 제목을 올리면 반드시 나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기에 처음엔 미친 사람 정도로 생각했지만 매일 같이 찾아와 새벽 3시까지 누워있는 나를 위해 창제를 하는 정성에 감동해 조금씩 입을 떼기 시작했다.
일주일간 꾸준히 제목을 불렀을까. 뼈가 다 녹는 듯 계속되던 통증이 불가사의하게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먹기만 하면 다 게워내던 증상도 말끔히 사라졌다.
불법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무언가 굉장한 힘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로부터 매일 힘이 있는 한 창제를 거듭했다.
3개월 동안 일념을 다해 창제를 거듭하자, 신기하게도 양쪽 엄지발가락 틈 사이로 무언가 이물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6개월이 지나자 뒤틀렸던 관절들이 조금씩 정상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드디어 제목을 부르기 시작한 지 7개월이 되는 날 일어나 앉을 수 있게 되는 엄청난 공덕을 받았다.
8개월이 되던 가을에는 목발을 집고 2년 만에 다시 하늘 아래 새로운 첫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천장만 바라보며 절망 속에서 헤맬 때 장년부가 전해 준 말이 다시금 생생히 떠올랐다. “남묘호렌게쿄는 어떤 병마도 이길 수 있어요. 준하씨도 제목을 올리면 반드시 나을 수 있어요”라고.
불법에 대한 대 확신을 가슴에 품고 1991년 서울로 이사했다.
오랜 투병생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기에 무엇이든 배우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해 합격할 수 있었고, 다시금 창제를 거듭하며 대학입시에 도전해 인하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하는 대 공덕을 받았다.
부푼 가슴을 안고 입학한 대학이었지만 몸이 불편한 내게 다가온 수많은 고난 속에서 좌절하며 방황을 거듭했다.
하지만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 신심만은 놓지 말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학업을 병행하며 남자부 활동과 창제에 힘을 더했다.
어려운 사람을 진심으로 돕는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매번 사법시험의 문을 두드렸지만 좀처럼 그 벽을 넘긴 힘들었다.
연이은 시험 실패와 경제적인 어려움속에 차비도 없어 두세 시간을 걸으며 활동해야 했지만 오직 신심과 인내만이 나를 강하게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하루 하루를 매진했다.
대학 4학년 무렵에는 한쪽 눈이 실명될뻔한 위기도 찾아왔지만 가슴속에 깊이 자리한 불법에 대한 대확신의 기원으로 단호히 도전하며 병마를 극복하는 공덕도 받았다.
대학졸업 후 취업에 성공했지만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친구 소개로 알게 된 법무사 시험에 다시금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숙명은 공부에서 마저 나를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합격점수를 충분히 넘겼음에도 답안지 체크 실수로 떨어지는가 하면, 시험 한 두 달 전이면 어김없이 터지는 큰 일은 시험에 집중할 수 없게 했다.
그럴때마다 어본존 앞에서 창제를 하며 반드시 꼭 해내겠다는 결의를 거듭하며 끝까지 도전했다.
2006년 정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본 1차 시험. 평소보다 훨씬 좋지 않은 성적에 실망했지만 커트라인에 걸려 합격할 수 있었고, 오랜 숙명의 굴레를 벗어났다는 확신으로 감사의 창제를 했다.
그리고 2008년에 2차, 3차 시험 역시 패스하며, 당당히 최종 합격하는 대 공덕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정말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에 어본존께 진심의 창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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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확신의 신심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 유준하(오른쪽)씨. "이 자리는 어머니 자리예요"라며 새로 개업한 사무실에 어머니를 초대해 이야기 꽃을 피운다.
올해 초 법무사 연수를 마치고 꿈에도 그리던 법무사 사무소도 개업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그동안 정말 고생하신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었다.
현재는 새롭게 사무소를 개업해 정신없이 바쁘지만 모든 것이 어본존의 공덕으로 척척 진행중이다. 아직은 부족하고 미미하지만 스승과 약속한 광선유포를 향해 가슴속 불타오르는 내 꿈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겠다.
신심을 만나 깊은 숙명을 깨닫게 됐고,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좀 더 겸손해 지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월월·일일 강성해지시라, 조금이라도 해이한 마음이 있다면 마가 틈탈 것이니라”(어서 1190쪽)라는 성훈을 가슴에 새겨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강성한 신심으로 극복하겠다. 남묘호렌게쿄를 통해 얻은 생명이기에 내 인생이 다하는 날까지 신심 근본으로 창제하며 꿈을 실현하는 청년부로 스승의 진정한 제자로 성장할 것을 결의한다.
유준하 금천권 독산지역 부남자부장
() | 화광신문 : 09/10/23 84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