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하버드대강연- 이케다다이사쿠>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
生도 환희」 「死도 환희」의 生命觀
전쟁과 폭력혁명의 20세기에서
평화와 인간혁명의 21세기로
이렇게 맑고 좋은 날씨의 오늘, 미국最古(최고)(창립:1636년) 전통을
자랑하는 하버드대학에서 2년전에 이어 다시한번 초대해주신 것은 나의
無上(무상)의 영광이며 야먼 교수, 콕스 교수, 갈브레이스 명예교수를 비롯,
관계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 萬物은 流轉한다 >
그리스의 철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한다(판타 레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확실히 인간界든 모든 것은 변화, 변화의 연속이고 한순간도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견고한 금석이라 해도
장기간을 놓고 본다면 세월에 의한 마멸작용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인간 사회의 놀랄만한 변화상은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고
부르는 20세기 末을 살고 있는 우리들 누구나가 파노라마처럼 목전에서
보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불교의 눈은 이 변화의 實相을 "[제행(여러현상)"은 무상(항상
변화)"이다]라고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주관에서 말하면'성주괴공', 즉 하나의 세계가 성립하여
유전하고 다시 붕괴하여 다음의 성립에 이른다고 설합니다.
< 萬人의 과제-死 >
또 이것을 인생관에서 논한다면 '생로병사'의 四苦, 즉 태어나
살아가는 괴로움, 나이드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유전을 누구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 四苦, 특히 生이 있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는 생사, "死"의
문제야말로 옛부터 모든 종교나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석가 출가의 동기라고 하는 "사문출유"의 에피소드 혹은 철학을 '죽
음의 학습'이라 했던 플라톤의 말은 너무나도 유명하며, 니치렌 대성인도
'우선 임종의 일을 배우고 후에 타사를 배울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있
습니다. 나도 20년 전 불세출의 역사가 토인비 박사와 며칠에 걸쳐 폭넓
게 토론하였습니다.
< 영원성에의 참여로 인간은 인간답게 >
왜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 이토록 무거운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죽음에 의해 자기의 有限性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무한한「富나「권력을 손에 넣은 인간이라도 언젠가는 죽고
만다는 운명으로부터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유한성을 자각하고, 죽음의 공포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어떤 영원성에
參劃함으로써 동물적 본능인 삶의 방식을 초월한 일개의 인격으로 될
수가 있었습니다. 종교가 인류사와 오랫동안 함께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死를 망각한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근대에 이르러서는, 이
生死라고 하는 근본과제에서 눈을 떼어 죽음을 오로지 회피해야 할
범죄자와 같은 위치로 몰아세우게 된 것입니다.
근대인에게 있어 죽음이란 단순한 生의 결여·공백상태에 지나지 않고,
생이 善이라면 사는 惡, 생은 有이고 사는 無, 생 이 條理이고 사는 不條理
생이 明이고 사는 暗 등등 전부 死는 마이너스의 이미지를 부여받아 왔던
것입니다.
그 결과 현대인은 죽음으로부터 호된 보복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금세기가 브레진스키 박사의 말대로 「메가·데스(大量死)의 세기로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死를 망각한 문명」의 歸結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근년에 이르러 腦死나 존엄사, 호스피스, 이상적인 장례식 또 큐브라
로스 여사에 의한 「臨死醫學」연구 등의 높은 관심도는 누구나가 죽음의
의미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재검토를 요구받고 있는 듯 생각됩니다.
이제서야 겨우 현대문명은 커다란 착각을 깨달으려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올바른 생영관 확립이야말로 第-義 >
死는 단순한 生의 결여가 아니라 생과 나란히 하나의 전제를 구성하는
불가결한 요소인 것입니다. 그 전체란 「생명」이며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응시하며,
올바르게 위치를 부여해가는 생명관, 생사관, 문화관의 확립이야말로
21세기 최대의 과제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法性의 起滅」을 설합니다. 法性이란 현상의 오저에 있는
생명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합니다.
생사 등 일체의 事象은 그 법성이 연에 닿아 「起」즉 출현하고,「滅」
즉 소멸하면서 유전을 반복해 간다고 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死란 마치 인간이 睡眠으로 내일에의 활력을 비축하듯이
다음에 오는 生의 충전기간과 같은 것으로, 결코 기피해야 할 것은
아니며 生과 마찬가지로 혜택이고 즐겁게 여겨야 하는 것이라고 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大乘佛典의 정수인 법화경에서는 생사가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인생의 목적을 「衆生所遊樂」이라고 하여 신앙이 투철한 바에,
生도 기쁨이고 死도 기쁨이며 生도 遊樂이고 死도 遊樂이라고 설해
밝히고 있습니다. 日蓮대성인도 「歡喜 중의 大歡喜」라고 단언하고
계십니다.
「전쟁과 혁명의 세기」의 비극은 인간의 幸 不幸의 결정적 요인이
외형만의 변혁에는 없다고 하는 교훈을 명확히 남겼습니다. 따라서 다음
세기에 있어서는 이러한 생사관, 생명관의 변혁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서 대승불교가 21세기 문명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점을 제나름대로 세가지 점으로 요약해 말쓸드리고자 합니다.
大乘佛敎는 21세기 문명에 무엇을 공헌할 것인가
1. 平和창출의 源泉
2. 人間復權의 機軸
3. 萬物共生의 大地
1. 平和창출의 源泉
첫째로, 「평화 創出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부터 불교가 평화의 이미지로 채색되게 된 최대의 이유는 폭력을
배제하고, 일반적으로 대화나 언론을 칠저하게 중요시해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 "스스로 먼저 말을 건네던 사람" 석존 >
야스피스는 석존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자들의 슬픔을 「말을 自在로
쓰던 사람을 잃어버렸다」고 정확하게 평하고 있습니다.
어느 佛典에 석존을 가리켜 「기쁨으로서 사람을 접하며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밝은 안색으로 스스로가 먼저 말을 건네던 사람」이라고
썼다 하듯이 그의 생애는 일체의 도그마(독단)로부터 해방된 「열린
마음」에 의한 「열린 대화」로 관철되어 있었습니다
80세 고령에 달한 석존 최후의 여정을 엮은 불전은 전쟁의 의도를
언론에 의한 설득으로 멈추게 한 에피소드로 시작합니다
즉 이웃 나라 밧지를 정복하려고 하는 패권주의의 대국 마가다의
대신에게 직접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盛衰의 도리를 절묘하게
설하여 침략을 엄연히 방지하였습니다.
또한 이 불전의 마지막 장은 임종 무렵에 석존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법에 관한 것, 수행에 관한 것 등을 말하여 남기고 후회가 남지
않도록 두 번 세 번 대화를 권유하고 있는 감동적인 장면이
기술되었습니다.
최후 여정의 시작과 끝이 이처럼 언론의 광채를 부각시키고 「언어를
自由自在로 사용하는 사람」의 면목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 내적인 惡=한 자루의 화살을 뽑다 >
왜, 석존이 대화에 있어서 자유자재일 수가 있었던가-그것은 覺者의
광대한 경애가 모든 도그마나 偏見, 執着에서 자유로왔기 때문입니다.
석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람의 마음에 보이지 않는 한 자루의
화살이 꽃혀 있는 것을 보았다」라고 했습니다.
「한 자루의 화살」이란 한 마디로 말한다면 差異에 대한 "집착"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당시 인도는 커다란 변혁기로서 비참한 전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석존의 투철한 눈은 그 전란의 근저에 있는, 무엇보다도 부족이나 국가
등의 차이에 대한 집착을 발견했었을 것입니다.
미국 철학의 황금기를 구축한 하버드대학의 로이스 교수는 금세기
初頭에 「'개혁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면으로부터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 전체는 어떤 과정에 있어서도 좋든 싫든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논한 바 있습니다. 「민족」이든
「계급」이든 극복해야 할 악, 즉 「한 자루의 화살」은 외부라고 하기보다는
우선 자신의 내부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차별의식, 차이에 대한
집착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와 보편적 인권의 창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열린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黃金律인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의 성분이나 능력에 의해 법을 설하는
"待機說法"이라는 자유자재의 대화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격의 힘」으로 평화를 초래 >
사실 석존의 대화의 특징은 부족간에 물(水) 로 인해 일어나는 분쟁을
중재할 때도, 흉폭한 강도를 改心시킬 때도, 걸식행에 異議를 제기하는
자의 淺廬(말은 생각)를 훈계할 때도 항상 내적인 악이라고 하는 「한
자루의 화살」을 깨닫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유례 드문 인격의 힘이야말로 한 왕으로 하여금 「세존이여 우리들이
무기를 가지고서도 항복시킬 수 없는 자를 당신은 무기를 가지지
않고서도 항복시킬 수 있었다」라고 감탄하게 했던 것입니다.
차이에 대한 집착의 극복은 종교가 민족종교를 초월하여 세계종교로
비약해가는 도약대이기도 합니다.
日蓮 대성인이 박해를 가하는 일본의 최고책임자를 「조그마한 小島의
국주」라고 일축하실 때 명백히 국가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세계종교의
지평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연론」에 대한 금강의 신념 >
물론 대화라 하더라도 춘풍과 같은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불을 토하는
듯한 언론의 돌팔매질이 상대의 교만한 마음을 꺾는 경우도 있습니다.
석존이나 용수 등 그 이름만 들어도 圓滿 그 자체인 듯한 인상을 주는
불교자들도 지배자들로부터는 「일체를 부정하는 자」라고 비난받고
있었습니다.
日達 대성인도 서민에 대해서는 육친도 미치지 못할 세심한 애정을
쏟고 있었습니다만 사악한 권력과의 싸움에서는 결코 일보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몸에 무기라고는 전혀 지니지 않았으나, 언론·비폭력의
투철한 자세만큼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먼 섬에 유죄되어 있을 때의 다음과 같은 사자후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즉 改宗하면 일본의 국왕으로 삼겠다고 유혹받아도, 또한 개종하지
않으면 부모의 목을 베겠다고 협박당해도 「知者에게 我義가 타파되지
않는 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라고.
참으로 언론에 건 신념의 강고함은 금강과 같았습니다.
만약 이러한 대화의 자세가 철저하게 관철된다면 대결이 가져다 주는
것은 대립이 아닌 조화가, 편견이 아닌 공감이, 분쟁이 아닌 평화가
초래된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생각컨대 참된 대화에 있어서는
대립도 결합의 하나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야먼 교수나 설리번 교수를 만났을 때, 대화라고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서 이야기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앞서 야먼 교수께서도 소개해 주셨습니다만, 우리 창가학회는 제
2차세계대전 때 정면으로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항했습니다.
그 때문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을 비롯해 많은 동지가
투옥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의 일입니다.
취조를 한 검사나 간수에게조차 의연히 불법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마키구치 초대 회장은 73세로 옥사하셨습니다.
그 유지를 이은 도다 제 2대 회장은 「2년간에 걸친 옥중투쟁」 후에
「지구민족주의」라고 하는 이념을 내걸고 고뇌하는 민중 속으로 뛰어
들어가 座談의 파도를 넓혀갔던 것입니다.
核廢絶도 은사가 청년에게 의탁한 遣訓이었습니다. 이 역사적 연원을
원점으로 하여 우리 창가학회 인터내셔널은 현재 세계 115개국 · 지역의
민중과 연대하며 「평화」와 「문화」와 「교육」의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 미력하나마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臨席하신 여러
선생님들을 비롯해 세계 良識과의 대화를 더한층 계속할 것을 결의하고
있습니다
2. 人間復權의 機軸
둘째로 '인간복권의 기축'이라는 시점입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표현한다면 거듭 종교의 시대를 부르짖는 지금
이야말로 과연 종교를 갖는 것이 인간을 강하게 하는 것인가 약하게 하는
것인가. 善하게 하는 것인가 惡하게 하는 것인가. 현명하게 하는 것인가
어리석게 하는 것인가라는 판단을 그르쳐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 문화교류시대에 逆行하는 종교도 >
사회주의 諸國의 붕괴에 의해 마르크스의 권위가 땅에 떨어전 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종교아편說이 전혀 무의미했다고는 할 수 없
습니다.
東西洋을 불문하고 계속 부활하고 있는 많은 종교가 아편적 측면을
지워 없앴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으며, 얼마전 택사스州에서
총격사건을 일으킨 교단 등이 그 극단적인 예입니다만, 世紀末의 神눈들·.
중에는 상호의존과 문화교류의 違展에 역행하는 페해적, 독선적인 면도
많은 것 같습니다.
< 근대화- 他力으로부터 自力으로의 移行 >
그런 까닭에서도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타력과 자력 -기독교流로
말한다면 「은총」과 「自由意志」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兩者의
이상적인 밸런스를 다시 검증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럽 主導의 증세에서 근대로의 흐름을 대강 살펴보면, 어떤 일에 대한
걸정귄이 오로지 신의 의지에 맡겨져 있던 神 중심의 決定論的
세계관에서 그 결정권이 인간에게 맡겨져, 자유의지와 책임의 세계로
서서히 力點이 이행되어 간 과정입니다
말하자면 他力에서 自力으로의 主役 交代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과학기술을 중심은론 큰 성과를 쌓아올렸습니다만
동시에 그 理性만능주의가 인간이 自力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자만을 낳아, 현대문명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周知의 사실입니다.
이전의 他力의존이 인간의 책임의 과소평가라고 한다면, 근대의
自力의존은 인간의 능력의 過信이며 에고의 肥大化입니다.
< 균형잡힌 제3의 길 >
궁지에 몰린 현대문명은 자력과 타력 어느 한 쪽으로 편중하지 않는
「제 3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점에서 「自力도 정해진 자력이 아니다」 「他力도 정해진 타력이
아니다」라고 精妙하게 설하는 대승불교의 시점에는 중요한 시사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힘이 융합하여 서로
상대하며 절묘한 균형을 취해가는 것이 종용되고 있기(권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것」>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말한다면 일찍이 듀이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앙」을 주창하며 특정한 종교보다도 「종교적인 것」의 긴요성을
호소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자칫하면 독선이나 狂信에 빠지기 쉬운 데 비해서
「종교적인 것」은 「인간의 관심과 에너지를 통일」하고 「행동을 이끌고
감정을 자극하며 지성에 빛을 더한다」 또 「모든 형식의 예술, 지식, 노력,
일한 후의 휴식, 교육과 친근한 교류, 우정과 연애, 心身의 성장 등에
포함된 가치」를 개화, 창조시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듀이는 他力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것」
善한 것, 가치 있는 것을 희구해가는 인간의 능동적인 삶을 고무시키는
이른바 뒤에서 밀어주는 것과 같은 力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야말로 「"종교적인 것"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自己를 초월한 존재」와 自己는 일체 >
근대인의 自我信仰의 무참한 결말이 보여주듯이, 自力은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他力 즉 有限한 자기를 초월한 영원한 것에 대한 기원과 융합에 의해
비로소 自力도 충분히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충분한 힘이란 본래
자신 속에 있었던 것이다. -듀이도 펼시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이야말로 종교가 미래성을 지닐 수 있는가, 어떤가
하는 분수령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바입니다.
나는 佛敎者에 한하지 않고 全종교자가 역사의 톱니바퀴를 역전시키지
않기 위해서, 이 일점은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인간복권은 커녕, 다시 인간을 도그마나 종교적
권위에 예속시키려는 힘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콕스 교수가 우리들의 운동을 「휴머니즘 종교의 방향을
제시하려 하고 있다」라며 주목해 주셨던 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 善하게 살아가는 意志에 대한 격려 >
佛典에는 「一念에 億劫의 辛勞를 정한다면 본래 無作의 三身이 念念에
일어나느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는 관념이 아니라 시시각각 인생의 궤도수정을 하게 하는 것
입니다.
"억겁의 신로를 다한다"라고 했듯이 모든 과제를 一身에 받아
全意識을 자각시켜간다, 全생명력을 연소시켜 간다, 그렇게 하여
이루어야 할 것을 전력으로 이루어 간다, 거기에 「無作三身」이라는
부처의 생명이 순간순간 솟아나와 인간적 영위를 올바른 방향으로 올바른
길로 이끌어 격려해 줍니다.
법화경에 종종 드럼이나 트럼펫과 같은 악기가 등장하는 것도 그들의
울림이 살아가는 의지에 대한 격려라고 한다면 잘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처의 생명의 力用이 「君이여 강하여라, 군이여 善하여라,
현명하여라」라는 人間復權에의 메시지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3. 萬物共生의 大地
셋째로 만물공생의 대지라고 하는 시점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법화경에는 수많은 설해있습니다만, 그 중에는 광대한 대지가
똑같이 慈雨에 윤택해져 크고 작은 온갖 초목이 생생하게 싹튼다는
묘사가 있습니다.
한폭의 명화를 보는 듯 웅대하며 다이나믹한, 정말 법화경다운 생명의
약동은 직접적으로는 부처의 평등대혜의 법에 감싸여 모든 사람들이
佛道를 이루어가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및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부처의
생명을 호흡하면서 개성풍부하게 생을 謳歌하고 있는 「만물공생의 대지」
라는 이미지를 훌륭하게 상징하고 있는 듯이 생각됩니다.
<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의 相關性 >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는 「共生」을 「緣起」라고 설합니다.
「緣起」가 인연에 의해 일어남이라고 쓰듯이, 인간계이든 자연계이든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서로 緣이 되면서 現像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즉 事象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個別性이라기보다도 관계성이나
상호의존성을 근저로 하고 있습니다. 일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서로
관계하고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 있는 하나의 코스모스, 철학적으로
말하면 意味連關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대승불교 自然觀의 골격인
것입니다.
일찍이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모든 것이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나하나가 서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불교적이라고도 해야할 知見을 젊은 우인 에커만은 「예감은 하지만
실증이 없다」라고 평했습니다만, 그후 백수십년의 세월과 함께 저 괴테의,
나아가서는 불교의 연역적 발상의 선견성을 떠올리게 하는 듯합니다.
< 왜 에 대답하지 못하는 기계론적 因果 >
因果律을 예로 들면, 緣起論에서 말하는 인과율은 근대과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주관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객관적인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기계론적 인과율과는 아주 다른, 인간 자신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자연계에 걸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재해가 일어났다고 합시다. 그 재해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일까. 그 일정한 원인규명은 기계론적 인과율로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거기에는 어째서 자신이 그런 재해를 만났는가 하는 식의
물음은 결정적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실존적 물음을
내버린 곳에 성립하는 것이 기계론적 자연관입니다.
불교에서 설하는 인과을은 「무엇에 의해(緣) 老死가 있는 것인가.生에
의해(緣) 老死가 있다」라는 석존의 原初의 대답이 나타내고 있듯이,
그리한 「왜」라는 물음을 정면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색을 깊이하면서 중국 천태지의의 유명한 「一念三千」론과
같이 근대과학과도 충분히 整合性을 갖는 웅대하고도 정밀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관계상 상세하게는 말할 수 없지만 현대의 생태학, 트랜스 퍼스널
심리학, 양자역학 등은 각각의 입장에서 그러한 불교적 발상과
친근해지고 있는 듯히 생각됩니다.
< 나야말로 나의 주인 >
그런데 관계성이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고 보면 자칫 주체성이
埋役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거기에는
하나의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불전에는 「나야말로 나의 주인이다. 어제 다른 누가 주인일까. 나를 잘
억제한다면 인간은 구하기 어려운 주인을 얻게 된다」
「실로 자신을 등불로 하고 법을 등불로 할지어다. 다른 것을 등불로
삼는 일이 없을지어다. 자신에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지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다른 것에 분동되지 말고 자기에게 충실하고 주체적으로
살아라라고 강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주생명과 융함하는 大我야말로 >
단지 여기에 '나' '자신'이라고 하는 것은, 에고이즘에 얽매인 작은
자신 즉 「小我」가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한하게 因果를
다스리는 우주생명에 융합하고 있는 커다란 자신 즉 「大我」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한 「大我」야말로 융이 「자아(에고))의 깊은 속에 있는
「자신(self)」이라 부르고, 에머슨이 「모든 부분과 분자가 평등하게
맺어진 보편적인 美, 영원한 "唯一者"」라고 불렀던 차원과 강하게
공명하고, 서로 共振하면서 다가올 세기를 향해 「만물공생의 대지」를
이루어갈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魂이여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나 >
그것은 또 휘트먼의 유유한 魂의 讚歌의 일절을 상기시킵니다.
나는 언제나 돌이켜/당신에게 외친다/아 혼이여,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나
그러나 보라! /당신은 가벼이/전우주를 지배하고
시간과 결합하여/죽음에 향하여/만족의 미소를 지으며/공간의 광대한
넓이를/충만시키고/최대로 확장시킨다
라고.
대승불교에서 설하는 이 「大我」란 일체중생의 苦를 자신의 苦로
해가는 「열린 인격」의 異名이며, 항상 현실사회의 인간群을 향해
발고여락의 행동을 펼쳐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인간성의 연대에, 그야말로 소위 「근대적 자아」의
閉塞을 뚫고 나가 새로운 문명이 지향해야 할 지평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또한 「生_도 환희이며 死도 환희이다」라고 하는 生死觀은 이
다이나믹한 大我의 맥동 속에 확립되어가는 것이겠지요.
<「생명의 보탑」 빛나는 「제3의 千年」>
日蓮 대성인의 『御義口傳』에는 「(生老病死라고 하는) 四相을 가지고
우리들의 一身의 탑을 장엄하느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21세기의 인류가 한사람한사람의 「생명의 보탑」을 빛내가기를 나는
진심으로 기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열린 대화」의 장대한 交響으로 이 푸른 지구를 감싸면서
제3의 천년을 향해서, 新生의 一步를 내디뎌갈 것을 나는 원하는
바입니다.
그 광채 빛나는 인간의 평화의 세기의 여명을 응시하면서 나의
스피치를 마치겠습니다.
청취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대박수)
- 이케다다이사쿠 SGI 회장이 하버드대 강연 내용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