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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南無) - 신심의 이명(異名), 성불(成佛)의 열쇠

혜광리 2008. 8. 19. 11:29

 

 

 

나무(南無) - 신심의 이명(異名), 성불(成佛)의 열쇠

이번 달은 대성인께서 말법민중을 위해 입종선언을 하시고, 2대회장 도다 선생님이 생애 원업을 완수하고 돌아가신 날이 있는 의의 깊은 달이다. 약진반 4부도 이제까지 공부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마무리하는 시간으로 ‘나무(南無)’에 대해 공부한다.

 

나희망 반담   3부 회원님들의 응원 덕분에 3월 부인부 반단위 총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공부한 교학이 현장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최인재 그룹장   지난달 경(經)에 대해 공부한 남자부들도 창제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자각하고 근행 창제에 열심히 도전하고 있습니다.

한 빛 그룹장   오늘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7자 중, 마지막으로 나무(南無)에 대해 공부하고 싶습니다.

오황금 권장   니치렌 대성인은 “나무(南無)란 범어이며 여기서는 귀명(歸命)이라 하느니라”(어서 708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명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목숨을 가지고 스스로 귀함’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왕모범 반장   저도 귀명에 대해 언급한 어서를 본 기억이 납니다.

“일체의 신(神)과 부처를 공경하여 모시는 처음의 구(句)에는 나무(南無)라는 문자를 두는데, 나무라고 함은 어떠한 것이냐 하면 나무라고 하는 것은 천축의 말이외다. 한토(漢土)·일본에서는 귀명이라고 하며, 귀명이라고 함은 나의 목숨을 부처에게 바친다고 하는 것이니라”(어서 1596쪽)라고 있습니다.

나희망   결국 귀명이란 ‘자신의 전 생명을 맡기는 것, 무엇인가에 온몸을 던지는 행위’라고 볼 수 있겠군요.

오황금   맞습니다. 그런 만큼 어디에 귀명하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에 목숨을 걸고 또 어떤 이는 명예에 목숨을 걸고, 위대한 학자는 학문에 목숨을 걸고, 어리석은 불량배 인생을 걷는 사람은 주먹에 목숨을 겁니다.

무엇에 귀명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행·불행이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최고 무상의 귀명은 무엇일까요?

최인재   그것은 부처가 발견한 우주의 대법인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에 귀의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겠지요.

한 빛   그리고 민중의 행복, 세계의 참된 평화인 광선유포라는 법전에 모든 것을 바치는 모습이 진실한 귀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황금   청년부의 교학 수준이 대단하군요! 우리가 대어본존을 믿고 우주의 본원력에 귀명하면 절대적 행복경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일체의 대복운이 내 생명속에 갖추어지게 됩니다. 귀명할 수 있는 최고의 대상을 만났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모범   또 대성인은 “귀(歸)라 함은 적문 불변진여(迹門不變眞如)의 이(理)에 귀의(歸依)함이며, 명(命)이란 본문수연진여(本門隨緣眞如)의 지(智)에 의거함이라”(어서 708쪽)라고 귀명에 대해 설명하시고 있는데,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황금   말이 약간 어렵긴 해도 굉장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적문불변진여의 이’란, 법화경 전반부인 적문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법리를 통해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밝혔는데, 이 변하지 않는 우주의 진리를 적문불변진여의 이라고 합니다. 이 부처가 설한 최고의 가르침을 믿고 귀의한다는 것이 귀(歸)의 뜻입니다.

나희망   자기 자신도 묘법의 당체(當體),우주도 묘법 그 자체이므로 우리가 묘법을 부를 때 자신의 생명이 대우주의 본원의 리듬에 합치하는 모습을 말하는군요.

최인재   지금 우리가 열심히 어서를 공부하고, 법화경을 공부하는 것도 올바른 귀(歸)가 되겠군요.

오황금   맞습니다. 또 ‘본문수연진여의 지’란 연(緣)에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현실 생활상에 대우주의 근본 리듬인 불계의 생명을 용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생명력과 지혜가 원천이 되어서 고난, 고뇌를 타개하고 인간변혁, 생활변혁을 성취하는 것이 수연진여의 지에 의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를 설한 법화경 적문(迹門)의 가르침에 따라 석존이 보살행이라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행동을 실천하여 성불이라는 구체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 내용이 법화경 후반부인 본문에 담겨 있으므로, 적문에 대응하여 본문이라는 말이 앞에 붙은 것입니다.

한 빛   그러니까 어본존을 믿고 변하지 않는 진리인 법화경과 어서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불변진여의 이에 귀의하는 모습이고, 신심수행을 통해 용현한 불계의 생명을 자신의 인생관, 사회관의 원천으로 삼아 현실상에서 행복을 만드는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수연진여의 지에 의거하는 것이 되는군요.

왕모범   더욱 쉽게 말하면 어본존을 수지하여 신심을 하고, 생활상에서 신심의 실증을 보이는 것에 위의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군요.

나희망   결국 신심즉생활(信心卽生活)을 표현한 말이네요. 뜻을 알고 나니까 그렇게 어렵지 않은 내용이네요. 평소 들어온 말이 귀명이라는 글자 속에 숨어 있는지 몰랐네요.

오황금   모두 이해력이 대단하군요. 말씀하신 대로 귀명, 즉 나무(南無)라는 두 글자 속에 신심의 가장 올바른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의 지도에 “매일 자신이 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를 명확히 정하고 하나하나 성취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 진지한 일념에서 지혜가 솟고 도전하는 힘도 생깁니다. 자신의 일에서 실증을 보이지 않으면 신심즉생활의 원리를 입증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최인재   또 대성인은 계속해서 “귀(歸)란 우리들의 색법(色法)이고 명(命)이란 우리들의 심법(心法)이며 색심불이(色心不二)임을 일극(一極)이라고 하느니라”(어서 708쪽)라고 귀명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시고 있는데, 이 부분도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오황금   색(色)이란 눈에 보이는 것, 물질, 형질, 혹은 육체를 의미합니다. 심(心)이란 물질이 아닌 것, 즉 성질, 성분, 혹은 정신, 내재한 힘 등을 말합니다.

우주의 대법에 귀의하는 우리의 모습은 귀(歸)이므로 색법(色法)에 해당합니다. 또 신심을 통해 현실 생활에 대응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명(命)은 심법(心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법(佛法)에서는 이 육체와 정신이 둘이면서 둘이 아닌 일체(一體)인 것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구명하여 색심불이(色心不二)의 생명철학을 확립하였습니다. 일극(一極)이란 최고 구극의 대철리(大哲理)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한 빛   권장님의 설명을 들으니 전에 본 어서가 생각납니다. “마음은 심법, 소리는 색법, 마음에서 색을 나타냄이라 또 소리를 듣고 마음을 알게 되니 색법이 심법을 나타내느니라”(어서 469쪽)고.

그런데 오래 전부터 생명의 본질이 물질이냐 정신이냐의 논쟁, 즉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의 공방(攻防)이 철학계에서 있었지만, 완전히 승패가 갈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황금   당연히 승패가 날 수 없는 게임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설(說)도 생명의 완전한 실상을 밝히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유물론이나 유심론 모두 생명의 한 쪽 면만 설명하는 반쪽짜리 이론일 뿐입니다.

생명은 어느 것이나 물질과 그 물질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정신적인 부분을 모두 지니고 있음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나희망   최근 정신신체의학에서는 병의 원인을 단순히 육체에만 한정하지 않고 마음에서도 그 원인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웃음이 늘어나면 엔도르핀 분비가 많아지고 암에 걸리지 않을 확률도 높아진다고 하지요.

최인재   실제 임상(臨床)에서도 환자의 정신건강이 병의 회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환자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하여 음악을 들려주거나 코미디 프로를 자주 보여 준다고 합니다.

오황금   반대로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유명한 말처럼, 육체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부처는 육체와 정신이 항상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우주에 존재한다는 진리를 3천 년 전에 이미 발견하고 ‘색심불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화가 나면 우리 얼굴은 무섭게 변합니다.

그러다가 기분이 풀어지면 다시 환한 얼굴로 바뀝니다.

또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색심불이의 법칙이 우리 생명상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왕모범   그런데 몸 따로 마음 따로인 상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공부하라는 부모의 성화에 못이겨 억지로 책상에 앉아 있지만,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 그것이 머리에 맴돌아 책을 봐도 책의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옛 속담에도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황금   중요한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럴 경우에 마음과 몸의 불일치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음은 없어도 남을 속이기 위해 가짜의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이런 경우도 그렇게 보이겠지요.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여기서도 색심불이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억지로 책상에 앉은 학생의 마음은 공부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몸도 실제로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게임 생각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짜로 행동하는 사람의 경우도 남을 속이겠다는 마음을 먹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색심불이입니다.

나희망   결국 신심도 마찬가지네요. 겉으로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아도, 실제의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 겉모습은 허상(虛像)이 될 수가 있겠군요.

최인재   “마음만이 중요하니라”(어서 1192쪽)는 어서 말씀이 떠오르네요.

오황금   맞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관념의 신심이 됩니다.

진정 그런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반대의 마음이 자신의 생명속에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빛   그렇군요. 진정한 나무(南無)가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군요.

‘해볼까!’라는 좋은 마음 밑에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더 강한 마성(魔性)의 마음이 생명속에 내재하고 있는 한, 좋은 마음이 실천으로 옮겨지지는 않는군요.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들도 비슷한 예가 되겠네요.  

왕모범   좋은 행동을 막고 나쁜 행동을 일으키는, 모든 생명속에 존재하는 그 마성을 잠재우기 위해 더욱 제목을 열심히 불러야겠습니다.

오황금   신심의 마음과 몸이 일치된 색심불이의 신심이 아니면 진정한 나무(南無)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색심불이임을 일극이라고 한다”라는 어서 말씀대로 일심(一心)으로 어본존을 갈앙하고 열심히 신행학에 면려하는 신심 속에 진정한 나무의 모습이 있습니다. 일생성불과 인간변혁도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계속)



월간법련 : 06/04/01 20060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