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련 2023년 10월호 수량품 제16 상

2023. 10. 23. 21:56佛法 .SGI

세계를 비추는 태양의 불법 

 

여래수량품 제16상 

 

하종<下種> 모든 사람의 행복을 여는 부처의 성업.


〈어의구전〉 요문편⑪ 여래수량품 제16상.

 “아, 나는 법화경의 심원함과 위대함에 경탄했노라.
참으로 인류를 구할 수 있는 길은 법화경이 아닌가.”
연일 계속된 폭염이 한풀 꺾이고 상쾌한 가을비가 대지를 적시는 1948년 9월 13일, 도다 조세이 <戶田城聖>선생님의 법화경 강의를 들은 나는 끝없이 용솟음 치는 감격을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로지 모든 중생을 성불시키겠다며 고난과 맞서 싸워 대악세<大惡世>에 대서광<大曙光>을 밝히신 니치렌<日蓮>대성인의 대자비에 감루한다.”
그리고 자신의 복운과 커다란 사명을 확신하며 스스로 분기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이야말로 인류의 스승이니라.”
“젊은이는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영원히 앞으로.
젊은이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영법구주<令法久住>를 위해.”
이후 춘추<春秋>75년. 사제불이<師弟不二>의 정신으로 꿋꿋이 걸은 광포의 길은, 준령과 격류도 뛰어넘어 전 세계 이곳저곳에서 지용<地涌>의 동지가 뛰어나 오는 대도<大道>가 됐습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직한 것은, 우러러보는 거목같은 청년들이 세차게 나오고 있는 점입니다.

우인에게 불법을 전하려면.

은사가 청년에게 의탁하신 유훈 ‘원수폭금지선언’ 으로부터 45성상<星霜>이 되는 2002년 9월 8일, 나는 50개국·지역에서 모인 청년들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근행회에 참석했습니다.
근행회에서 질문회도 열었습니다. 호주의 화양자매는 같은 세대의 우인에게 어떻게 불법<佛法>의 훌륭함을 전하면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나는 그 멤버와 우인의 행복을 기원하며, 성실하고 명랑하게 또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을 확신 있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 미래에 대한 무한한 희망에 꿋꿋이 살아가는 가치 있는 생활의 실증을 말하면 됩니다. 결론을 말하면, 자신의 확신과 체험을 당당하게 끝까지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상대방의 생명에 행복과 희망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그 씨앗은 언젠가 반드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꽃을 피웁니다. 그때까지 계속 기원하고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
니치렌불법<日蓮佛法>에서 설하는 홍교의 방궤<方軌, 바른 법칙이나 모범>는 ‘하종<下種>입니다. 거듭 기원하고 나누는 진심 어린 대화는 생명의 깊은 차원에서 상대방에게 통합니다. 반드시 하종불법이라는 행복의 불연<佛緣>이 맺어집니다.
드디어 법화경 “본문<本門>의 간심<肝心> <어서 1016> 인 여래수량품 제16의〈어의구전〉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하종불법 이야말로 말법<末法>의 간요<肝要>라는 점을 배우겠습니다.

영원히 투쟁하는 가장 숭고한 인간.

여래수량품의 ‘여래<如來>는 부처의 십호<十號>중 첫번째 존칭입니다. ‘진여<眞如>진실에서 왔다.’는 뜻으로, 진여에만 머물지 않고 중생 앞에 나타나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가르침을 설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존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한 대로 일생을 어디까지나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계속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부처의 투쟁은 금세<今世>뿐만 아니라 구원 이래 진미래제<盡未來際>까지 영원하다고 보여주는 것이 수량품에 씌어 있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입니다. 게다가 결론부터 말하면 구원의 부처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구원의 생명에 눈뜨고 민중을 구제하는 대법을 설하며, 영원히 끝까지 투쟁하는 가장 숭고한 인간입니다. 이 ‘인간을 위한 종교’의 극리<極理>를 밝힌 구절이 〈어의구전〉의 ‘남묘호렌게쿄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제16지사 <第十六之事> ’입니다.
제호<題號>에는 이전의 각 품<品>과는 다르게, 이름에 제목의 일곱 글자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품의 제목은 니치렌 자신에 해당하는 대사<大事> ” <어서 752쪽> 라고 밝히고, 다음 어문에서 그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어의구전〉 수량품의 일절.


여래<如來>란 석존, 총해서는 시방삼세<十方三世>의 제불<諸佛>이며 별<別>해서는 본지무작<本地無作>의 삼신<三身>이니라.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同類>의 의<意>는 총해서는 여래란 일체중생이요, 별해서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檀那>로다. 그러므로 무작<無作>의 삼신이란 말법<末法>의 법화경의 행자<行者>이고, 무작의 삼신의 보호<寶號>를 남묘호렌게쿄라고 하느니라.
<어서전집 752쪽 5행~7행>


현대어역.


〈수량품 이십칠개<二十七箇>의 대사 제1 남묘호렌게쿄 여래수량품 제16지사〉 여래수량품의 ‘여래’란 석존, 총해서는 삼세시방의 제불이고 별해서는 본지의 무작삼신<無作三身>이다. 지금 니치렌과 그 제자들의 뜻은 총해서는 ‘여래’란 일체 중생이고, 별해서는 니치렌의 제자단나이다. 그러므로 무작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 행자이다. 무작삼신의 보호를 ‘남묘호렌게쿄’라고 한다.

남묘호렌게쿄는 부처의 보호.

이 〈어의구전〉 바로 앞에는 《법화문구》의 문장이 인용돼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래란 삼세시방의 부처들의 공통된 이름이고, ‘본지<本地>의 삼불<三佛>의 다른 이름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그것을 대성인은 ‘여래란 총해서는 일체중생이고, 별해서는 대성인의 제자단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은 부처의 가장 존귀한 이름을 ‘남묘호렌게쿄’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수량품의 간심인 남묘호렌게쿄야말로 시방삼세의 제불의 어머니시니라.” <어서 1212쪽>라고 하신 것처럼, 석존을 비롯해 모든 제불은 남묘호렌게쿄로 성불 했기 때문입니다. 어본불<御本佛> 니치렌 대성인은 말법 진미래제의 일체중생을 위해 ‘근원의 일법<一法>을 밝히신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여래는 석존이나 제불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근원의 일법’인 남묘호렌게쿄를 부르고 수지하며 홍통하는 사람도 존극한 여래의 생명이 지닌 빛을 발합니다. “총해서”, 바꿔 말해 가능성을 본다면 일체중생은 본디 여래입니다.
그리고 “별해서”, 현실에서 불종<佛種>인 남묘호렌게쿄를 부르고 실천해 넘쳐 흐르는 불계<佛界>의 생명을 자기 흉중에 체현하는 중생, 다시 말해 묘법을 수지한 대성인의 문하야말로 진정한 부처의 당체<當體>입니다.
더욱이 대성인은 “무작의 삼신”이란 “말법의 법화경의 행자”이고, “무작의 삼신의 보호”를 “남묘호렌게쿄”라고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작’이란 아무 작위<作爲>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범부에게 열린 불신<佛身>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래’라고 해도, 묘법을 수지한 인간 자신입니다. 본원의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구원의 생명을 나타내는 중생이야말로 진정한 여래입니다. 이것이 어의구전에 나와 있는 불타관<佛陀觀>이고 석존관<釋尊觀>이며 성불관<成佛觀>입니다.
우주와 생명을 꿰뚫는 근원법인 남묘호렌게쿄를 넓히고 자타 함께 흉중의 불계를 용현하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행동이야말로 민중구제를 바라는 부처가 행한 존귀한 실천입니다. 부처와 같은 서원<誓願>에, 서는 인간을 탄생시키는 것. 다시 말해 일체중생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투쟁하는 민중’ ‘투쟁하는 범부가 출현하는 데에 비로소 니치렌불법의 본의<本義>가 있지 않을까요.
“수지하는 법이 제일이라면 수지한 사람도 따라서 제일이 되느니라.” <어서 466 쪽> 입니다. 가장 존귀한 묘법을 수지하고 모든 사람의 불성 <佛性> 을 여는 대화와 격려를 끝까지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비로소 가장 존귀한 생명이 빛납니다.
묘법은 어떠한 차이도 초월해 포용하는 ‘평등대혜의 법’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생명존엄의 빛이, 인류조화의 선율이, 항구평화의 물결이 넓혀집니다. 이렇게 부단히 투쟁하는 것이 광선유포 대운동입니다.

즉신성불의 모습이 바로 ‘신통한 힘’

수량품 경문에는 제일 처음에 석존이 깨달은 “여래의 비밀·신통한 힘” <법화경 477쪽> 이 씌어 있습니다.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의 의<意>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 개각<開覺>하는 것을 여래비밀신통지력이 라고 하는 것이라. 성불하는 이외에 신통과 비밀이란 없느니라.” <어서 753쪽>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신성불, 다시 말해 이 몸 그대로 부처의 경애를 열어 나타내는 것이 “여래 비밀 신통지력”입니다. 부처의 신통이고, 비밀의 법이란 범부를 성불하게 하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여러 경전에서는 부처를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춘 웅장 하고 화려한 색상장엄<色相莊嚴>의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또 금세뿐만 아니라 장원한 수행을 거쳐 성불한다고 씌어 있습니다.그것이 법화경에 이르러서는 범부의 모습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 성불할 수 있다고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석존불법의 관점에서 보는 말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우리 말법의 범부<凡夫>에게는 석존이 설한 근인근과의 이법을 타파하고, 구원의 불신<佛身>을 개각<開覺>할 법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필요에 따라 실제생활에서 과거세부터 이어진 인과를 타파하고, 구원의 생명으로 돌아가 좋은 운명으로 전환할 수 있는 법을 확립하신 분이 니치렌 대성인이십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신성불의 비법은 남묘호렌게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비법을 얻는 방법은 “신<信>의 일자<一字>이니라.” <어서 753쪽>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묘법에 대한 강한 믿음이야말로 불계를 생생하게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일체중생이 부처라는 선언.

이어서 석존이 자신의 본지를 밝혀 법화경 전체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발적현본<發迹顯本>으로 들어갑니다.
경문의 “아실성불이래<我實成佛已來> 무량무변<無量無邊> ” <법화경 478쪽> 이란 석존이 구원이라는 옛날에 성도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데, 대성인은 “당품<當品>의 뜻” <어서 753쪽> 으로서 ‘아<我> ’란 “법계<法界>의 중생” <어서 753쪽> 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기에서도 석존이 스스로 구원에 성불했다고 밝혔을 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이 부처’라고 선언한 데에 비로소 수량품의 진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수량품의 본주 <本主> ”라는 관점에서 성불의 길을 여는 대법 <大法> 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논하셨습니다.


〈어의구전〉 수량품의 일절.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수량품의 본주<本主>이니라. 통틀어서 적화<迹化>의 보살은 이 품<品>에 손을 대어 취급할 수없는 자이니라. 그는 적표본리<迹表本裏>, 이는 본면적리<本面迹裏>.그렇다 하더라도 더욱이 당품<當品>은 말법의 요법<要法>이 아니로다.
그 까닭은 이 품은 재세<在世>의 탈익<脫益>이요, 제목의 오자<五字>만이 당금<當今>의 하종이니라. 그러므로 재세는 탈익, 멸후<滅後>는 하종이며 따라서 하종을 가지고 말법의 근본으로 하느니라 운운.
<어서전집 753쪽 10행~14행>


현대어역.


〈제3 아실성불이래<我實成佛已來> 무량무변등지사<無量無邊等之事>〉지금 니치렌과 그 제자들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자는 수량품의 본주이다.
총해서 적화의 보살은 이 수량품에 손을 대어 취급하면 안 된다. 그는 적문을 표면으로, 본문을 이면으로 여긴다. 본화의 보살은 본문을 표면으로, 적문을 이면 으로 여긴다. 그렇다고 해도 당품<수량품>은 말법의 요법이 아닌 그 이유는 이 품은 재세 탈익의 가르침이고, 제목의 다섯 글자만이 미래와 현재의 하종익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세는 탈익, 멸후는 하종이다. 그러므로 하종의 가르침을 가지고 말법의 근본으로 여긴다.


하종불법의 가르침이야말로 말법의 요법.


법화경 경문상에는 “수량품의 본주”, 다시 말해 수량품의 가르침을 설하는 주체는 만인성불<萬人成佛>의 가르침을 설하는 석존입니다.
그러나 〈어의구전〉에서 제목을 부르는 “니치렌 등의 동류”가 “수량품의 본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말법인 지금 이때, 요법은 수량품의 간요인 남묘호렌게쿄의 하종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설하는 주체에 관해 말하면, 구원실성이라는 본지를 밝히기 전에 적불에게 교화된 적화의 보살은 적문의 가르침을 표면으로, 본문의 가르침을 이면으로 여기는 ‘적표본리 <迹表本裏>의 관점입니다. 그들은 본문의 가르침을 담당할 존재가 아닙니다.
한편 구원실성이라는 본지를 밝힌 석존에게 교화된 구원의 제자야말로 본화 지용<本化地涌>의 보살입니다. 이 보살들은 본문의 가르침을 표면으로, 적문의 가르침을 이면으로 여기는 ‘본면적리<本面迹裏>의 관점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간심인 수량품에서 명백히 중심이 되는 것은 석존이 입멸한 뒤의 홍통을 담당할 지용보살<地涌菩薩>입니다.
대성인은 여기에서 석존이 입멸한 뒤에 본화의 보살이 넓히는 ‘제목의 오자’ 가 바로 하종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요컨대 수량품은 어디까지나 말법에서 하종의 가르침을 홍교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본화지용의 보살이 ‘수량품의 본주’
.
다음으로 ‘탈익’과 ‘하종익<下種益>이 씌어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가 중생을 성불로 인도하는 방도에 하종, 조숙<調熟> , 득탈<得脫>이라는 세가지 단계가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한 표현입니다. 석존불법은 과거세에 부처와 결연해 하종을 받고 조숙된 중생을 득탈시키는 가르침, 다시 말해 탈익의 불법입니다.
그러나 말법의 중생은 그러한 과거세의 결연이 없기에 하종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그것이 남묘호렌게쿄의 대법입니다. 지용보살은 부처를 대신해 말법에서 제목을 곧바로 하종하는 주체이자 주인공이며 “수량품의 본주”입니다. 그리고 “지용의 보살의 선구” <어서 1359쪽> 로서 불석신명<不惜身命>의 대투쟁을 관철해 묘법을 넓히신 분이 대성인입니다. 니치렌불법은 하종익의 불법입니다. 하종으로 본래 있는 불성이 발동됩니다.
더욱이 대성인이 “니치렌 등의 동류”라고 하신 대로, 문하들도 “수량품의 본주”로 여겨 묘법을 말하고 넓히는 주체자로서 숭고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선구’를 완수하신 대성인의 뒤를 이어 묘법을 하종하는 지용보살들이 이진삼진<二陣三陣>으로 잇따라 출현하지 않으면 〈어의구전〉은 완결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세계광포를 책임지는 창가학회는 대성인의 마음 그대로 민중구제의 서원에 일어선 지용의 연대로서, 원초의 사명을 완수하겠다며 탄생한 것입니다.

대화운동의 현대적 의의.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영예로운 동지들이 즐겁고 활기차게 하종의 대화를 계속 펼치고 있습니다. 묘법의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행복과 희망의 꽃들이 만발하고 지구를 감싸며 아름답게 장식하는 시대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의 하종은 인류사에 찬란히 빛나는 평화를 위한 위대한 대화운동입니다.
이 대화운동의 현대적 의의는 무엇인가.


첫째, 하종이란 ‘연을 맺게 하는 것’으로 묘법과 결연해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여는 성업<聖業>입니다.


법화경에 씌어 있는 과거의 하종은 가르침을 구도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찰나주의와 이기주의 등이 팽배한 말법에서는 심원한 가르침을 직접 구도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하종은 지용보살만이 이룰 수 있는 위대한 ‘불법결연<佛法結 緣>의 여정’입니다. 한사람 한사람과 연을 맺고 마음의 대지에 만인성불의 씨앗을 뿌린 만큼, 착실하게 생명존엄의 철리<哲理>가 사회로 넓혀집니다.


둘째, 하종이란 ‘차별하지 않는 것’으로 분단을 메우고 사람을 맺어주는 위업<偉業>입니다.


어떠한 기근의 사람들도 포용하는 하종불법은 인종과 국적, 성별 등 모든 차이를 초월합니다.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경멸하는 사상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종은 ‘지구민족이 융화하는 장대한 여정’입니다. 차별하지 않는 부처의 자비로 분단이라는 인류의 무명<無明>을 타파해야 합니다.


 셋째, 하종이란 ‘믿는 것’으로 존경하는 삶을 넓히는 대업 <大業>입니다.


상대방의 생명에 심은 씨앗이 언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의 불성을 존경해 꽃이 피기를 기원하며 기다리고 끝까지 믿습니다.
한편 현대를 뒤덮은 심각한 분단의 뿌리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하종은 영원한 ‘인간존경의 여정’입니다. 사람들의 선성<善性>을 끝까지 믿으며 씨앗을 뿌려 세상을 뒤덮은 불신과 의심을 이겨 내야 합니다.


 세계평화를 향한 풀뿌리 도전.


소설 신인간혁명의 집필을 개시한 1993년 8월 6일에 잊지 못할 대화를 나눈 인도의 라다크리슈난 박사가 집필 개시 30주년이 되는 가절을 맞이해 최대의 신뢰를 담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가학회는 지금 세계평화의 이니셔티브,주도권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192개나 되는 국가와 지역에서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사람이 가치창조의 주역이 돼, 사람들의 증오와 슬픔을 살아갈 힘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또, 지역과 사회의 책임 있는 한 사람으로서 지구 평화를 바라며 희망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치창조자’는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한편, 풀뿌리 차원에서 계속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니치렌 문하인 우리는 인간 생명의 무궁무진한 가치창조력을 이끌어내는 방도가 바로 남묘호렌게쿄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자타 함께 생명에서 위대한 부처의 힘을 용현하는 것이 자행화타 <自行化他>에 걸친 창제입니다.


행복의 꽃이 피는 지구 사회를 창출하기 위해.


어떠한 대난을 만나더라도 “그러나 아직 단념하지 않노라. 법화경은 종자 <種子>와 같고, 부처는 심는 사람과 같으며, 중생은 밭과 같으니라.” <어서 1056쪽> 라며, 하종의 대투쟁을 관철한 말법의 어본불에게 직결한 우리입니다.
부처의 대생명력과 대자비를 샘솟게 해서 존귀한 지용의 서원을 관철하고, 행복의 꽃이 피는 지구 사회를 창출하기 위해 하종의 대화를 유유히 계속하지 않겠습니까!


법련 2023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