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4. 21:15ㆍ佛法 .SGI
불계를 나타 내려면
어떻게 하면 불계의 생명이 나타날까요?
자행화타에 걸친 창제를 했을 때 나타납니다. 우리들 범부는 누구나
자기, 아(我), 나 등이 있어서 그것이 우리들의 생활이나 행동을 명령하고
지배하고 있는 듯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자아를 중심으로 해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불법에서는 이와같은 자아를 소아(小我)라고 하며
소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한은 생활이나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의 소아와
소아가 맞부딪쳐 으르릉대며 싸움이 끊이지 않아 서로가 고뇌와 불행을
느끼게 된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이렇게해서 ‘지혜를 쓰면 모가 나고
정에 끌리면 떠내려 가며 고집을 부리면 답답하다. 아무튼 인간의
세상은 살기 어렵다’라는 현상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불법은 이 소아에 대하여 대아(大我), 진아(眞我)를 설합니다.
이 진아(제9식)는 생명 깊숙이 내재하고 있습니다만
소아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범부에게는 좀처럼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소아가 진아를 덮어 가리어 그 진아의 출현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거울 자체를 진아에 비유하면 소아는
거울에 붙은 먼지이자 그을음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먼지나 그을음을 닦아내야 됩니다.
우리들이 창제하는 것은 자아 중심적인 자기를 일단 닦아 없애고
본래 내재해 있는 진아를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뜻합니다.
일생성불초에 “비유컨대 암경도 닦으면 옥으로 보임과 같도다.
지금도 일념무명의 미심은 닦지않는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럼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느냐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어서 384)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때 창제에 의해 진아를 나타낸 본래의 자기가, 소아를 중심으로
안달하던 자기를 유유히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경애에 서게 됩니다.
이때 생명력이 충만된 것과 같은 실감을 느낍니다.
이와같이 생명력이 나타난다는 것은 소아를닦아내어 진아가 나타나는것과
마찮가지이며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숨어있던 본래의 완전한 자기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경애가 깊어지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생명력을 이해한다면 자아 중심적인 이른바 아만편집(我慢偏執)의
마음을 신심으로 닦아가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명백해졌습니다.
광선유포를 하고 있는 창가학회에서는 전국 여러 곳에서 공덕의 체험과
신심의 기쁨이 들려옵니다만 이처럼 대공덕을 받는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은
모두 아만편집의 마음 즉, 소아중심의 자기를 없애 버리고 훌륭하게
진아를 빛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범부이기 때문에 창제를 하면서도 처음에는 자기에게만 닥쳐 온 괴로움이나
곤란, 그리고 자신의 숙업을 원망하고 또 깊은 숙업을 한탄하는 자아 중심적인
마음이 튀어 나옵니다. 그러나 창제를 거듭함에 따라 차츰차츰 자기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광선유포의 사명감이나 묘법의 엄연한 실증을 나타내려는
남을 생각하려는 고차원의 목적이 싹터 마지막에는 어본존께 창제할 수
있는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만이 흘려 넘치게 됩니다. 이때 진아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원하든 공덕이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대성인께서 여러어서에 ‘깊이 신심을 일으켜’‘결단코 신심을 일으켜 이 본존님께
기원하시라’‘더욱더 강상한 심심을 가지시라’는 등, 신심에 힘쓰라고 지도하시고
있는 것도 어디까지나 범부가 소아를 없애 버리려는 노력의 근본은 어본존에 대한
신심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당연히 자기의 아만편집의 마음을 응시하여 소아 중심의 모습을 겸허하게
포착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거울을 더럽히는 먼지인지를
모르면 닦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뜻에서도 항상 자기자신을 응시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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