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일본 와카야마(和歌山) 부인부 혼마 노부코-"지면 안돼!"

2007. 11. 7. 11:17佛法 .SGI

"지면 안돼!"

-일본 와카야마(和歌山) 부인부 혼마 노부코-

저는 가족이나 지부의 여러분으로부터 「요시모토 상사(商社)의 부인부장」이라고 불리는 혼마 노부코라고 합니다. 현재 저는 보험회사의 간사이 영업과장으로 아홉 살 연하이며, 잘 생기고 착실하며 상냥한 남편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남편은 지구 간사를 맡고 있습니다. 남편은 매주 토요일이면, 제가 일요일에 쉴 수 있도록 슈퍼마켓에서 장을 가득히 봐 가지고 와서 TV의 요리 프로그램을 보고 저녁을 만들어 줍니다. 또한 제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전부 남편이 해 준 선물입니다. 남편에게 「당신이 좋아하는 여성상은?」이라고 물으면 「야마다 이스즈, 쿄마치코, 혼마 노부코」라고 저에게 신경을 쓰는지, 연상의 이름을 댑니다. 저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이렇게 자상한 남편과 결혼한지 올해로 20년째입니다.
지금의 남편에 대해서 최고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월급쟁이 남편이 네 명의 자식을 기르면서 100만엔(한국돈 → 1200만원 정도) 이상의 공양을 10년간 계속 해 온 사실입니다. 저도 올해가 7번째의 100만엔 공양이 됩니다. 지금 이렇게 행복한 저에게도 자살을 몇 번씩이나 생각했을 정도로 괴롭고 슬픈 과거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심장이 나빠서 행복한 청춘시절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스무살이 되던 해, 행복하게 해 준다고 약속하고 결혼한 저의 남편은 반년도 지나지 않아, 일도 하지 않고 매일 노름으로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빚만 남겨놓고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하고 말았습니다. 친정으로 돌아온 저는 그 때가 임신 3개월이였습니다. 그렇게 약한 몸으로 출산은 무리라고, 부모님도, 의사도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기가 생기면 남편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출산을 결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아는 분으로부터 「절대로 행복해 질 수 있다」는 확신있는 절복을 받아, 1960년 2월 12일 순수하게 입신했습니다. 근행과 창제를 면려하는 속에서 고통스럽던 심장발작도 없어지고, 얼굴이나 손발이 붓는 것도 없어지면서 임신 6개월이 되던 때 장녀를 무사히 출산했습니다. "본존님은 굉장하구나!" 여태까지 염불, 진언, 성장의 집, 크리스트교등 사람들이 좋다는 것은 뭐든지 해 온 저로서는 본존님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마음 속으로 기원했던 남편의 주소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빚에 쫓겨 가짜 이름을 쓰면서 어느 싸구려 여인숙에 숨어 있었습니다.
신심을 절대 반대하는 양친과 친척들이 모여, "이상한 신심을 하니까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지금 당장 학회를 그만 두고, 그런 남자하고는 이혼해라" "부모 말을 듣지 않으려면, 학회에 가서 먹여살려 달라고 해"라고 매일 협박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잠든 한 밤중에 달빛에 본존님을 비춰보면서 딸을 끌어안고 마루 구석에서 아침까지 제목을 올리곤 했습니다. 절복을 해 주신 분이 "무엇이든지 지도를 받으세요." 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2개월 된 딸을 등에 업고 간사이 본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지도를 해 주신 분이 시로키 지도장님이였습니다. 「남편과 헤어지는 것은 간단하지만, 당신은 아직 젊으니까 또 결혼을 하겠지요. 숙명전환을 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더 나쁜 남편을 만날거예요. 남편이 있는 곳이 지옥이라도 그 속에서 신심에 면려하여 숙명전환하는 이외에는 없습니다. 자신에게서 도망가는 것은 숙명전환이 아닙니다. 진흙탕 물이 깊으면 깊을수록 아름다운 연꽃이 피는거예요.」라고, 울고 있는 저를 따뜻하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다음날 부모님께 가메가사키에 있는 남편에게 가겠다고 말했더니, 공무원이며 곧고 완고한 성격의 아버지께서는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저에게, 「두 번 다시 이 집에 발걸음도 하지말라!」라며 의절을 했습니다. 울면서 말리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뿌리치고 본존님을 가슴에 품고, 딸을 업고, 기저귀 가방 하나를 들고, 남편이 있는 가메가사키의 하루 170엔짜리 싸구려 여인숙을 찾아갔습니다. 남편은 깜짝 놀라서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저를 떠밀어냈습니다. 남편은 꼼짝도 하지않고 경마장, 술집에 들어 앉아서 돈이 떨어지면 피를 팔곤 했습니다. 게다가 신심에는 결사 반대를 했습니다.
하루 10엔 짜리 빵 하나 살 수 없는 생활에, 젖은 나오지 않아 딸은 울 힘조차 없었고, 우리 모녀는 물만 마시며 170엔의 여인숙비가 없어, 어느 여관 처마 밑에서 지낸 일도 있었습니다. 「숙명전환에는 절복과 제목밖에 없다」라는 시로키씨의 지도가 생각나, 회관에 쌓아놓은 성교신문을 들고 천황사의 동물원 앞에 서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행복해지는 창가학회의 신문입니다」라며 한 부씩 건네주는 것이 일과가 되었습니다. 백만편의 제목을 올렸을 때 3세대를 절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공덕을 받아 가메가사키를 떠났습니다. 눈이 오고 비가 내려도 아기를 업고 성교신문을 배달하는 우리 모녀의 일이 그곳의 명물이 된 것 같습니다. 남편은 「너 같은 정신병자가 또 한사람 있나보다」라고 했습니다.
그 무렵, 취사장의 밥하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배불리 밥을 먹게 해 주시겠습니까?」 「신심을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아주머니가 밥을 지으니 얼마든지 먹이십시오. 그리고 신심하는 것은 아주머니 자유지요」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절복을 한 덕택에 우리 모녀는 지옥과 같은 가메가사키를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2년8개월 된 큰딸과 6개월 된 둘째딸을 사과 상자에 앉혀놓고, 얼굴을 시커멓게 그을려가며 하루종일 30명분의 인부 밥을 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노름만 하며, 제가 제목을 올리고 있으면 머리채를 잡아 끌어 흔들고, 몇 번이나 본존님을 불경할뻔 했습니다. 몸은 언제나 만신창이였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하루 3시간씩 제목을 올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였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시간이였습니다. 「대성인의 사도유배 생활을 생각하면 이까짓 것쯤이야」라고 감격해 흐느껴 울면서 어서 전편을 두 번 독파했습니다. ‘제법실상초’는 암기할 정도로 생명을 다해 어서를 읽었습니다. 입원했던 적이 많아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제가, 1977년 교학부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공덕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머리 속에는 절복 생각뿐이여서 30명의 인부들과 불법대화를 통해 16명이 내득신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취사생활 속에서 본존님은 받지 못했지만, 공사가 끝나서 헤어질 때, 「아줌마 일은 잊지 않겠어요.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라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반담으로서 절복성과는 항상 일등이였습니다. 해가 뜨든 해가 지든, 큰딸의 손을 잡고, 작은딸은 등에 업고 오사카 전역을 절복하면서 뛰어다녔습니다. 언제 봄이 오고 여름이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애들과 느긋하게 놀아줄 사이도 없이, 그저 행복해져야겠다는 일념뿐이였습니다. 화장도 안하고 몸치장도 할 여유가 없는 저의 모습은 20대인데도 50대로 보였다고 당시에 저를 아시는 분들은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옷은 남루해도 마음은 비단이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간부회에서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기쁨으로 저의 생명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상승 간사이의 원점이 되었던 ‘비의 문화제’에도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또 정본당 건립공양은 「빈녀의 일등(一燈)」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용하던 곤로, 하나밖에 없는 냄비, 주전자 그리고 이불까지 다 팔아서, 돌아오는 전차비 10엔만 남기고, 35,528엔 전부를 공양했습니다.
1년 후인 1967년 5월 3일, 한푼의 저축도 없었던 제가 니시요도가와의 공인시장에서 고물상을 경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존님 공덕에 보은하기 위해서 절복을 하자라고, 생활비를 줄여 성교신문 50부를 구독신청해서 시장에 있는 32점포에 매일 아침 배달했습니다. 「저 가게는 주인이 없어」 「학회원이래」...라고 놀림을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매일 3시간 이상의 제목을 올려 모든 것을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가게는 크게 번창하여 점원과 심부름하는 사람을 고용할 수 있게 되었고, 개점 7년째에는 오사카 시(市)로부터 ‘우량점포주’ 표창을 받았습니다. 언론문제가 일어났을 때에도, 「지금이야말로 절복할 때」라고 분발하여, 1975년 5월 3일 본부간부회에서 ‘홍교추진상’을 받았습니다. 입신이래 계속하여 부른 제목이 3천만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변함없이 돈을 빼내서 몇 번이고 증발해서, 결혼 15년 중 함께 산 것은 겨우 3년이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일가화락의 신심을 하겠다고 이를 악물고 세 명의 자녀를 필사적으로 키워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불쑥 돌아온 남편은 「너는 내가 싫어하는 신심을 절대로 그만두지 않는구나. 세 명의 애들은 네가 데려가라」라는 말을 내뱉고는 이혼장을 놓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의 차를 타고 가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남편의 놀음과 방탕한 생활로 생긴 빚더미뿐이었습니다 모처럼 일궈낸 가게도 남편 빚 때문에 빼앗기고, 그 쇼크로 심장발작이 재발되어 수없이 구급차 신세를 졌습니다. 「학회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면 이 참에 온 가족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그럴 때마다 당시 본산의 기타죠 부인부장으로부터 지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울면서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이야기 하는 저에게 부인부장께서는 「개인 절복은?」이라고 부드럽게 물어왔습니다. 「네..27세대입니다.」..「법화경 28품까지는 아직 한 세대 남았군요. 이번에 숙명전환하세요」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28세대의 절복..법화경 28품.. 강렬한 힘이 가슴을 쳤습니다. 「대악(大惡)이 일어나면 대선(大善)이 온다」라고 확신하고 맹렬하게 제목을 올렸습니다. 아침에는 언제나 불단 앞에서 눈을 떴습니다.
28세대 째 절복할 기회가 드디어 왔습니다. 동경에서는 학창시절부터 절복을 받았고, 오사카에 전근하면서도 절복을 받았으나 아직 입신하지 않았던 청년이, 저의 파란만장한 체험담을 듣고 자연스럽게 입신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입니다. 그 청년이 입신한지 10개월이 되던 때, 돌연 저의 집을 방문해서, 저의 어머니에게 「따님과 결혼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해온 것입니다. 저에게 프로포즈를 한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저는 부엌에서 마늘을 까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여자대학을 나와서 여자부의 총B장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둘째 딸을 달라고 온 것이라고 생각해서 「쓰네꼬 말이군요」라고 묻는 어머니에게 그 사람은 「아니오, 노부코씨 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네?」하고 놀랐습니다. 어머니도 저도 농담에도 한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지했습니다. 그는 「세 자녀를 제 아이로 입적하고 싶습니다. 지금 저의 재산은 이것뿐입니다」라며 예금통장과 증권까지 준비해 가지고 왔습니다.
남편이 거금의 빚을 지고 도망가서 가게까지 빼앗기고 몸은 약한 저, 게다가 자식까지 셋이나 딸리고, 나이는 9살이나 연상인데도, 그는 10시간의 제목을 올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야마가타현 사카다시 혼마가 분가의 외아들로, 대학도 나와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며, 게다가 초혼입니다. 신물이 나도록 남편에게 고통을 받은 저로서는 두 번 다시 결혼 할 생각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진지했습니다. 할 수 없이 둘이서 함께 간사이 지도장에게 지도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는 「이 사람의 명랑함과 강인함에 반했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혼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쭉 듣고 계시던 지도장은 저에게 『당신, 숙명전환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어요』라고 하시면서, 또 그에게는 『당신은 눈이 높군요. 이 사람은 가슴속에 훌륭한 보물을 가진 여성입니다』라고 결혼을 권유해 주었습니다.
야마가타에 있는 양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도를 받으면서 끝까지 제목을 올려, 보란 듯이 모두 해결하고, 주위의 축복을 받으면서 남편 29세, 제가 37세 때 우리는 결혼을 했습니다. 그 당시 큰딸이 중학교 3학년, 둘째딸이 중학교 1학년, 장남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부터 매일 아침 6시에 가족이 모두 모여 근행을 했습니다. 장남인 치에의 공부가 부족한 것이 저의 커다란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기쁘게도, 결혼 10일째 되는 날부터 남편은, 1학년 교과서부터 시작해서 2년7개월 동안 매일 밤, 세시간씩 공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덕택에 중학교 들어갈 때는 반에서 5등 이내의 성적이 되어 학급위원으로 활약하며, 성교신문에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돈 문제로 고생만 하던 저와 아이들에게, 남편은 한 번도 경제적인 걱정을 끼치지 않고, 세 명의 아이들과도 아무 문제없이 친아버지처럼 잘 지내주어, 저는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남편이 본존님께서 우리 모자를 구해주기 위해 보내신 제천선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님에게 걱정만 끼쳐온 저였지만, 7년간의 의절도 용서받고, 강하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저의 모습에 아버지가 입신해서 3년이 되던 해, 마키가타라는 곳에 지구거점을 만들어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의 신심이, 지금은 일가족 26명 전원이 광포의 투사가 되었습니다. 숙명의 장난에 괴로워했던 세 명의 아이들도 새 아빠를 마음 속 깊히 신뢰하고, 진짜 부자(父子) 이상으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입신 37년인 지금은 단독주택 한채와 맨션까지 가지고 있는 경애가 되었습니다.
올해 7월, 57세로 다시 지부부인부장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지금 저의 단 하나의 바램은 지부의 모든 사람이 일가화락의 신심으로 복운의 인생, 반석같은 가정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숙업이 깊은 저를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준 선생님과 학회에 감사의 마음을 가득히 가지고 매일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시모토 시(市)에 넓혀지는 뉴타운, 저의 전원(田園)지부는 간사이의 합중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사카나 나라로부터 젊은 인재가 모여서 생긴 지부입니다. 개성이 풍부하고, 젊은 미인들인 네 명의 지구담들은 서로 사이가 좋고 신심이 강해서 훌륭한 차세대 인재입니다. 명랑한 것이 유일한 장점인 저를 마음속으로 깊히 신뢰하고 지켜주고 있습니다. 7월에는 와카야마의 신문추진 운동에서 1등을 한 힘있는 지부입니다. 이번 법전(法戰)중에 많은 인재가 성장해서 16명의 반 간부가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공양도 매일 한 사람, 두 사람씩 대화해서 10만엔 이상의 공양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100만엔 이상도 14명이 결의했습니다. 공양은 「기원해서 하는 것」이라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제목도 21명이 백만편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신세기의 전진은 우리 전원지부에서」라는 슬로건으로 지부목표 달성을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끝)
출처 : 한국SGI사상권
글쓴이 : 정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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