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남묘호렌게쿄 교학적 설명을 위해

2007. 10. 19. 10:06佛法 .SGI

 

교학적 설명을 위해!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을 신앙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불도수행의 기본은 어본존을 믿고 '제목(題目)'을 스스로 부르고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목이 바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입니다.


왜 남묘호렌게쿄를 '제목’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제목이란 책 등의 제호(題號)나 표제(標題)를 말하는데, 석존이 설한 법화경의 제목이 바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법화경을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한 것은 구마라습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법화경의 제호를 '묘호렌게쿄’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이 말씀하시는 묘호렌게쿄란 단순히 경전의 제호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성인은 묘호렌게쿄를 법화경 근본의 법명으로 취하신 것입니다. 이른바 법화경이라는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모든 가르침은 묘호렌게쿄라는 근본법에서 펼쳐진 것이며, 묘호렌게쿄라는 일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묘호렌게쿄의 한 마디에 일체법이 갖추어져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남묘호렌게쿄’의 구체적인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남(나무〈南無〉)'이란 인도말로 '귀명(歸命)' '귀의(歸依)'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에 나의 생명을 바치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옛부터 신앙에 있어서 부처나 보살, 신에 생명을 바치는 예가 대부분이었으나, 니치렌 대성인은 법화경의 제목인 '묘호렌게쿄’야말로 모든 불·보살의 구극이며 일체중생의 신앙의 근본이라고 깨달으시고, 자신이 직접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시며 사람들에게도 누구든지 남묘호렌게쿄를 믿고 부르기만 하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묘호(妙法)'에서, 묘(妙)란 깨달음, 호(法)란 미혹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사물에 미혹하여 번뇌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반면 올바른 불도수행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가 바로 남묘호렌게쿄인 것입니다.


다음은 '렌게(연화〈蓮華〉)'입니다. 이것은 연꽃을 말하며, 꽃이 핀 다음에 열매를 맺는 보통 식물과 달리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피고 맺기 때문에 인과구시(因果俱時: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갖추어짐)를 나타냅니다. 봄에 씨앗을 뿌릴 때 가을에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결과를 이미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탁악세에 사는 우리 생명속에서 본래 갖추어져 있는 불계(佛界: 부처의 경지)를 용현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지막으로 '쿄(경<經>)'란 일체중생의 언어와 음성을 뜻합니다. 그 중에서 중생을 설법교화하는 것은 부처의 언어와 음성입니다. 특히 말법에는 남묘호렌게쿄를 부르고 홍통하는 사람이 부처며 부처의 일을 하는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말하자면 우주의 삼라만상이 전부 묘호(妙法)며 렌게(蓮華)이고 쿄(經)입니다. 따라서 남묘호렌게쿄란 불법의 구극의 깨달음인 우주생명의 근원 즉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에 귀명한다는 뜻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남묘호렌게쿄'에 대해 교학적으로 자세히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한장의 도표로 설명할 때


 

*범어(梵語)란 고대인도의 표준 문장어. 현대에서는 '산스크리트'라고 불리우고 있다. 범천(梵天)이 만든 어(語)라는 전설에서 범어라고 한다.


범어를 한어(漢語)로 번역할 경우에, 한자(漢字)를 '한글'과 같이 사용하여, 음(音)을 빌어 그 음을 번역한 것을 음역(音譯)이라고 한다. 의미(意味=뜻)를 번역한 것을 의역(意譯)이라고 한다.


예를들면, 범어로 '나무'를 '南無(나무)'라고 하는 것은 음역이며 '귀명(歸命)'이라고 하는 것은 의역이다. 이것은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할때 'spoon'을 '스푼'이라고 하는 것은 음역이고 '숟가락'이라고 하는 것은 의역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같은 예를 몇가지 든다면, 범어로 '보디'는 한어로 음역하여 '보리(菩提)가 되고, 의역하면 '깨달음(悟)'으로 된다.


또 '샤리붓다'를 음역하면 '사리불(舍利佛)'이 되고, 의역하면 '신자(身子)'가 된다.


니치렌 대성인도 13세기인 당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시고 대단히 중시하셨으며,  「니치렌은 산스크리트의 법화경을 대략 훑어보았다」는 어문도 남아 있다.<어서1584쪽, 취의>




2. 남묘호렌게쿄는 일본어인데, 우리말로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부르면 안되는가?


<신인간혁명 6권 젊은 독수리>

어서에 「범한(梵漢) 공시(共時)에 南無妙法蓮華經라고 하느니라」(어서 708쪽)라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국인도 南無妙法蓮華經라고 제목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장래 영어나 각국 언어로 번역하여 제목을 부를 필요는 없습니까?


"南無妙法蓮華經는 영구불변의 법이며 구극의 언어입니다. 그것을 번역하여 제목을 불러서는 안됩니다. 南無妙法蓮華經의 의미를 배우기 위해 어서를 독일에서는 독일어로, 영국에서는 영어로 번역하여 해석하는 것은 괜찮지만, 부르는 제목은 어디까지나 南無妙法蓮華經입니다. 제목은 순간에 부처에게 통하는 세계 공통어입니다.


예를 들면, 범어에서 妙法蓮華經를 '살달마(薩達磨) 분다리가(芬陀梨伽) 소다람(蘇多覽)'으로 말한다고 해서 제목을 '나무 살달마 분다리가 소다람'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소리나 리듬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음악에도 각각의 곡에는 독특한 음률이 있습니다. 베토벤의 곡을 봐도 그 곡은 베토벤이 느끼는 마음의 음률이며 민족이나 언어,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南無妙法蓮華經란 우주의 법칙이며 대우주의 근본 리듬에 합치해 가는 음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제목 소리의 울림에 생명이 감응하는 것입니다. 제목이란 그처럼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南無妙法蓮華經를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한다면 제목의 음률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제목을 각 나라 언어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법화경의 지혜6권  다라니품>

SGI회장: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번역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영어권 국가에 가서 뜻은 몰라도 '쌩큐(thank you)'라고 하면 통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삼세시방의 제불에게 그대로 통해갑니다.


대성인은 "제목을 봉창하는 소리는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닿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어서 808쪽)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리'입니다.


사이토: 그러고 보니, 메뉴인 씨<금세기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선생님과의 회담에서 제목소리에 대해 "참으로 읊조리기 쉬운 기분 좋은 음률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SGI회장: 전세계에서 가장 음에 엄격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니.(웃음)


스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NAM)'이라는 음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의 'M'이란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까, '마더(mother)'의 음(音), 어린애가 맨 처음에 외우는 '마 ─ (어머니)마 ─'라는 음에 통합니다. 이 'M'의 음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의미깊은 'R'음 <蓮>렌이 중앙에 있다"라고.


SGI회장: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것'과 '노래를 부르는 것'은 서로 깊게 통하는 점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소리를 낸다'는 자체가 인간의 몸에 좋은 영향을 준다고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이토: 아르헨티나 플로레스 대학의 케르테스 학장도 '제목의 효과의 과학적 실증'에 흥미를 갖고 있었던 듯 합니다. <99년 1월에 SGI회장 부부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명예교수칭호증정을 위해 방일>


SGI멤버의 공덕 넘치는 모습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어, "불법을 모르는, 또는 흥미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불법의 위대함, 제목의 위대함을 알려 주고 싶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3. 남묘호렌게쿄를 신체상에서의 설명

나의 몸이 妙法蓮華經 오자(五字)의 당체 - 소우주의 인체(人體)



묘법은 대우주 근원의 법이다. 그 법을 구원원초 이래, 깨달으시고 소지(所持)하신 분이 니치렌(日蓮) 대성인이시다. 인법일개 (人法一個)의 묘법이고, 어본존에도 "南無妙法蓮華經 日蓮"이라고 도현되어 있다.

이 어본존을 믿고, 니치렌(日蓮) 대성인 직결의 신행(信行)을 관철할 때, 소우주인 우리들의 생명이 대우주의 근본 리듬, 묘법의 리듬과 합치하여 우주를 자재(自在)로 유희하는 경애가 되어 간다.

대성인은「우리들의 머리는 묘(妙)이고 목은 호(妙)이며 가슴은 렌(蓮)이고 배는 게(華)이며 발은 쿄(經)니라」(어서 716쪽)라고 말씀하셨고, 이 몸이 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의 당체(當體)라고 가르치시고 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이 설하신 '妙法蓮華經'는 대우주의 법이고, 동시에 소우주인 나의 몸의 법이다. 그리고 '나무(南無)' '귀명(歸命)'의 의미로, 이 대우주와 소우주가 일체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귀(歸)'란 대우주로 돌아가 일체(一體)가 되고, '명(命)'이란 그 무한한 힘에 '근거(命)하여' 생기발랄하게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대성인은 인체(人體)에 입각하여 우리들이 소우주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총감문초에 묘락(妙樂)의 홍결을 인용하시고 있다. 어서 567쪽)

들은 적이 있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하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이 둥근 것에서 본뜬 것이며, 배가 따뜻한 것은 봄여름에, 등이 딱딱하고 차가운 것은 가을겨울에 근거한다. 몸에 천지(天地)가 있고, 사계(四季)가 있다 라고.

커다란 관절은 12개. 12개월을 나타낸다. 작은 관절은 360개. 360일을 나타낸다. 호흡은 바람이다. 조용한 바람의 때도 있고, 부부싸움을 할 때는 태풍이 된다.(폭소)

두 눈은 태양과 달. 머리카락은 별. 눈썹은 북두칠성. 피의 흐름은 강. 뇌출혈은 강의 범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살은 대지, 피부는 지면(地面), 털은 초목이나 삼림. 또 두 개의 폐 사이에 심장이 있고, 가슴의 연화(連華)를 나타낸다고도 설하시고 있다.

나의 몸이 즉 대우주이다. 그것이 생명의 근본법리이다. 그리고 묘법을 믿고 행할 때 사실상에서 대우주의 보배를, 소우주인 나의 몸 위에 자유자재로 끌어내어 사용해갈 수 있다. 거기에 '행복'이라는 결과가 생긴다. 반대로 묘법에 거역하면 우주의 리듬에 어긋나 '불행'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심이 있으면 이 세상에서 '최극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이 이상은 없다는 훌륭한 '절대적 행복'의 자기 자신으로 된다. 이것이 석존의 결론이고 니치렌(日蓮) 대성인이 가르치신 정수(精髓)이다.


'신심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어서에서도 결국은 이 대성인 직결의 올바른 '신심'을 가르치신 것이다. <제1회 태국총회 1994 년  2 월 6 일>




4. 「생사일대사혈맥초 (生死一大事血脈抄)」를 통해 배우는 묘호렌게쿄



♧ 생사일대사혈맥

「생사(生死)」란 「생과 사를 되풀이하는 생명」을 의미하며,「일대사(一大事)」란 「근본적인 중대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생사일대사」란 「생명에 있어서 근본적인 아주 중대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혈맥(血脈)」이란 스승에서 제자에게로 법이 전해지는 것을, 인간의 몸 속에서 혈액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생사일대사혈맥」이란 스승인 부처로부터 제자인 중생에게 생명의 근본 중대사가 되는 그런 법이 계승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본초에서는 그 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또한 그 법이 계승되어지는 조건은 무엇인가에 대해 교시하시며, 간결한 표현 속에서 대성인의 오저의 법문이 나타내져 갑니다.




♧ 생사일대사혈맥으로서 전해져야 할 법은 「묘호렌게쿄」

「대저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이라 함은 소위(所謂) 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그 까닭은 석가(釋迦) 다보(多寶)의 이불(二佛)이 보탑(寶塔)안에서 상행보살(上行菩薩)에게 양여(讓與)하신 이 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는 과거원원겁(過去遠遠劫)으로부터 이래(已來) 촌시(寸時)도 떨어지지 않은 혈맥(血脈)이니라」(어서1336쪽)


생사일대사혈맥으로서 전해져야만 할 「법」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법이란 「묘호렌게쿄」이외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법화경을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한 것은 구마라습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법화경의 제호를 묘호렌게쿄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이 본초에서 말씀하시는 「묘호렌게쿄」란 단순히 경전의 제호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성인은 묘호렌게쿄를 법화경의 근본의 법명으로서 취하셨던 것입니다. 이른바 법화경이라는 경전에 설해져 있는 일체의 가르침은 묘호렌게쿄라는 근본법에서 펼쳐진 것이며, 묘호렌게쿄라는 일법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묘호렌게쿄의 일구에 일체법이 갖추어져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근본법으로서의 묘호렌게쿄가 생사일대사혈맥으로서 마땅히 전해져야 하는 법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대성인은 여기서 이 묘호렌게쿄는 법화경에 있어서 석가여래와 다보여래로부터 상행보살에게 전해졌던 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법화경 보탑품 제11에서 촉루품 제22에 이르는 12품은 허공에서 거행된 의식이기 때문에 허공회 의식이라고 불립니다.


이 불가사의한 의식이 무엇을 위해 거행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상행보살을 중심으로 하는 지용의 보살에게 석존 입멸 후의 홍교를 의탁하기 위한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이 의식에서 다보여래는 영원한 진리를 밝히고, 석가여래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지혜를 밝히고 있습니다. 허공회의 의식에서는 이 두 사람의 부처가 보탑 안에서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영원한 진리란 묘호렌게쿄입니다.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지혜란 묘호렌게쿄가 자신의 생명의 본체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석가, 다보가 나란히 앉은 것은 영원한 진리와 자신의 생명이 하나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성인은 깨달음의 지혜 대신 「신(信)」을 채택하고, 영원한 진리와 하나인 자신의 생명을 「남묘호렌게쿄」라고 도현하셨습니다. 나무란 귀명이며,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불석신명의 신심을 말합니다. 그 나무하는 마음에 묘호렌게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부처의 생명을 단숨에 남묘호렌게쿄라고 밝히셨던 것입니다.


상행보살이 전하는 묘호렌게쿄란 상행 자신의 신의 마음에 나타나는 영원한 진리, 바꿔 말하면 영원한 진리가 활동하는 생명을 말하며, 그것은 바로 남묘호렌게쿄인 것입니다.


「이 묘호렌게쿄의 오자는 과거원원겁으로부터 이래 촌시도 떨어지지 않은 혈맥이니라」란, 신(信)의 마음에 영원한 진리를 현현시킨 상행보살 자신이 자각한 내용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신을 세워 보면 자신의 생명은 영원한 진리와 항상 일체이며, 결코 떨어지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상행이 석가, 다보로부터 이어받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문상의 일이며, 다시 말해 문상에 설해진 내용입니다. 그것에 대해 과거원원겁으로부터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상행이 느끼고 있는 생명의 실감입니다. 바꿔 말하면 대성인의 내증입니다. 따라서  문저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생과 사는 묘법에 갖추어진 리듬

「묘(妙)는 사(死)요 법(法)은 생(生)이라. 이 생사(生死)의 이법(二法)이 십계(十界)의 당체(當體)이며」


여기서부터는 「묘호렌게쿄」의 철학적 의의가 간략하게 밝혀집니다. 조금 어렵습니다만 여기서 교시한 것에 의해 묘호렌게쿄가 생명의 근본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묘법」에 대해, 「묘는 사요, 법은 생이라」는 말씀입니다. 묘법은 생사의 이법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생사의 이법이란 생과 사라는 두 가지의 존재방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의 생명은 생을 얻어 나타나고, 죽어서 우주에 융합되어 갑니다. 그 생사의 이법은 우주에 본래 갖추어진 「묘법」의 리듬 바로 그 자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 모든 현상이 묘법이 나타내는 생과 사의 리듬 속에 있다. 그것은 드넓은 바다에 파도가 일고, 또다시 그 파도가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말할 나위도 없이 바로 그 바다가 묘법에 해당되는 것이고, 개개의 생명이 파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럼 왜 묘가 사이고 법이 생이 되는가 하면, 법이라는 것은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생명이 뚜렷하게 모습을 나타낸 상태, 즉 생에 해당됩니다. 그것에 비해 사란 인간의 사색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상태이기 때문에 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묘라는 글자에 불가사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생사의 이법이라는 본유의 리듬(다시 말해 이 우주에 본래 갖추어진 리듬)이 있는 까닭에 인과라는 현상도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과, 갖가지 현상은 묘법이 나타내는 모습이며, 묘법이 새기는 생사의 리듬의 일면, 일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사의 이법을 갖춘 묘법이라는 크나큰 생명에서 수많은 인과, 갖가지 현상,    갖가지 생명, 여러 종류의 사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사의 이법이 십계의 당체이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사의 리듬을 새기는 묘법이 지옥에서 불계까지의 십계의 중생의 본체라는 것입니다. 십계의 차이는 나타나는 방식의 차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은 모두 생과 사의 두개의 상태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생과 사의 이법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생과 사가 묘법의 리듬인 이상, 십계의 모든 중생은 묘법이라는 위대한 생명을 본체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 모든 생명은 묘법에서 꽃핀 연화

「또 이를 당체연화(當體蓮華)라고도 하느니라. 천태(天台)가로되 '마땅히 알지어다. 의정(依正)의 인과(因果)는 모두 이는 연화(蓮華)의 법(法)이니라'고 운운(云云). 이 석(釋)에 의정(依正)이라고 말함은 생사(生死)이며 생사(生死)가 있으면 인과(因果) 또한 연화(蓮華)의 법(法)이라고 함은 분명하니라.」


다음에 「연화」에 대해 언급하시고 있습니다. 연화란 인과구시의 법을 비유한 것입니다. 보통 식물은 꽃이 핀 다음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연꽃은 꽃이 피었을 때 이미 열매가 열려 있습니다. 거기서 꽃을 원인, 열매를 결과라고 한다면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가 열려 있는 연꽃은 묘법 속에 인과가 동시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생과 사의 리듬을 새기는 묘법에 모든 인과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인과일체의 묘법을 연화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묘법은 인과구시의「연화」의 법이기 때문에 갖가지의 질서로서, 형태로서, 현상으로서, 가치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최고의 개화가 부처입니다. 연꽃이라는 식물은 불전에 자주 등장하여, 불·보살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도에서는 연꽃은 최고의 사람을 비유하는 꽃입니다. 묘법연화란 부처의 생명의 이명이며, 부처라는 최고의 인격으로서 묘법이 개화한 상태, 또 개화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땅히 알지어다, 의정(依正)의 인과(因果)는 모두 이는 연화(蓮華)의 법이니라」는 천태대사의 말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의정」이란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를 말합니다. 선악이라는 인과의 응보를 감수하는 주체인 중생을 정보라고 하고, 선악이라는 인과의 응보를 형성하는 의처를 의보라고 합니다. 좀더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정보란 생을 영위하고 있는 생명주체이고, 의보란 생을 영위하기 위한 의처가 되는 환경세계를 말합니다.


하나의 생명 주체가 있으면, 반드시 그 의처가 되는 환경이 있습니다. 불법은 생명을 환경세계와 일체가 되는 존재로써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의정불이라고 한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생명 주체가 지옥의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는 그 환경도 지옥의 세계로 된다. 또 주체가 부처의 경애에 있으면 그 사람이 사는 세계는 부처의 국토가 된다.


중생이 지옥이나 아귀의 경애에서 머물러 있는데 국토만이 불국토가 된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체와 그 환경은 반드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 불법에서 설하는 의정불이의 법리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살고 있는 중생의 생명을 도외시하고 국토만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중생의 경애를 높여가는 일이 국토 그 자체를 평화와 번영의 방향으로 바꿔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이 정법을 넓히고 확립함으로써 국가의 안온을 실현한다는 입정안국의 원리를 강조하신 이유도 이 의정불이의 법리가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이 의정의 인과, 다시 말해 환경에 일어나는 수많은 현상의 인과도, 주체인 생명에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갖가지 인과도, 또 환경과 주체 사이에 일어나는 인과까지도 포함한 요컨대 모든 인과는 인과구시의 연화의 법인 묘법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대성인은「의정이라고 말함은 생사이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보도 정보도 근본은 생사의 이법, 즉 묘법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체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생과 사의 리듬을 새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의보, 정보에 일어나는 모든 인과도 묘법에서 펼쳐지는 연화의 법인 것입니다.


요컨대 묘법이 생사의 리듬을 새기면서 수많은 현상, 수많은 인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 「묘법연화」입니다. 그리고 이 묘법연화의 율동은 우주의 근본법이며, 절대로 단절되지 않는 영원한 법입니다.


그럼 여기서 본초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경(經=쿄)에 대해 약간 설명하겠습니다. 쿄란 보통 부처의 설법내용이나 모양을 기록하여 남긴 경전을 뜻합니다만, 생명의 근본법으로서 묘호렌게쿄를 해석했을 경우의「쿄」란 묘법연화의 영원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자의 이「經(쿄)」라는 글자는 직물의 경사를 뜻하고 있기 때문에 종으로 길게 이어지는 영원성을 의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묘호렌게쿄라는 영원한 생명의 당체입니다. 그 개성있는 개화입니다. 이것을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납득한 사람이 부처이며, 완전히 납득했을 때 생명 깊은 곳에서부터 깨끗이 안심한 부처의 경애, 즉 불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사의 이법에서 눈을 돌리거나, 도망치는 것으로써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생사를 직시하고 본질을 통찰해 감으로써 부처는 구극적으로 무너지지 않는 안심을 얻은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생사일대사란 태어나서 죽어가는 우리들의 생명의 근본의 중대사,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구극의 중대사라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바로 「묘호렌게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근본법과 그 공덕인 진정한 안심을, 부처로부터 중생에게로,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전해 가는 것이「생사일대사혈맥초」입니다. 우리들은 이 부처의 일을 짊어지고 가야만 할 지용의 보살이라는 영예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5. <어의구전 강의 신인간혁명 6권 젊은 독수리 >

「어의구전에 가로되 나무란 범어이며 여기서는 귀명(歸命)이라 하느니라. 인법(人法)이 있으니 인(人)이란 석존을 받들어 귀명하고 법(法)이란 법화경을 받들어 귀명함이라」(어서 708쪽)


먼저 어의구전 첫 머리에 남묘호렌게쿄에 대해 나와 있는 것은 남묘호렌게쿄야말로 일체경의 근본이며 법화경의 간요이기 때문입니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란 범어(梵語)이다. 다시 말해, 고대 인도의 문장어(文章語)인 산스크리트의 음역(音譯)입니다. 이것을 의역하면 '귀명'이 됩니다.


귀명이란 신명(身命)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 귀명하는 대경(對境)에는 '인'과 '법'이 있습니다. '인'이란 문저(文低)의 석존이며 인본존(人本尊)인 니치렌 대성인을 말합니다.


'법'이란 말법의 법화경이며 법본존(法本尊)인 남묘호렌게쿄입니다. 다시 말해, 인법일개(人法一箇)의 어본존에게 귀명하는 것이 진실한 귀명입니다.


인간은 모두 무엇인가에 귀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가신은 주군에게 귀명했으며, 전시중에는 국가에 귀명하도록 호소했습니다. 또 현대에는 일이나 회사에 귀명하는 사람도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에 귀명하는가, 무엇에 자기를 거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의 행, 불행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대성인은 최고 무상의 본원적인 귀명이란 인법일개의 어본존에게, 다시 말해 남묘호렌게쿄에 귀명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이 귀명에 대해 다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법일개의 어본존과 남묘호렌게쿄를 넓혀 가는 것을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 정하고 일생 동안 광선유포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절대적 행복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불석신명(不惜身命)'이라든가 불법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면 무언가 비장한 각오를 한 특공대와 같은 인상을 갖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경지라는 것은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안심입명의 경지입니다. 어디까지나, 맑게 갠 하늘이 빛나는 것처럼 희망에 넘쳐 커다란 환희가 용솟음치며, 가장 충실하고 자기다운 자유로운 경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묘법에 귀명한다는 것은 조그만 자기의 욕망에 농락당하는 '소아(小我)'를 타파하여, 우주즉아(宇宙卽我)라는 우주대의 자기인 '대아(大我)'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떄, 자기 자신이 인간으로서 가장 빛날 수 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혁명입니다.


「또 귀(歸)라 함은 적문불변진여(迹門不變眞如)의 이(理)에 귀의(歸依)함이며 명(命)이란 본문수연진여(本門隨緣眞如)의 지(智)에 의거함이라. 귀명이란 남묘호렌게쿄이니라. 석(釋)에 가로되 수연불변(隨緣不變) ·일념적조(一念寂照)라고」(어서 708쪽)


여기서부터는 귀명(歸命)이라는 것을 '귀'와 '명'으로 나누어 논하시고 있는 부분입니다. 틀림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성인은 먼저 '귀'라는 것은 '적문불변진여의 이'에 귀하는 것이며 '명'이란 '본문수연진여의 지'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불변진여의 이'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실한 법리를 말합니다. 남묘호렌게쿄는 우주 본원의 절대 진리입니다. 제목을 부름으로써 이 우주 본원의 법칙에 합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변진여의 이'에 '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연진여의 지'란 연에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해 가는 사상(事象)에 대응한 진실한 부처의 지혜이며 신심 수행을 통해 용현하는 최고의 생명이고 불계의 작용을 말합니다.

'불변진여의 이'는 위대한 묘법이라는 진리입니다. 그 묘법의 법칙, 묘법의 힘을 실제로 나의 생명과 생활상에 그대로 나타낼 때, 비로소 행복이라는 가치를 만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묘법으로 무한한 생명력과 부처의 지혜를 용현시켜 모든 고난과 고뇌를 타개하여 인간혁명, 생활혁명을 해 가는 가치 창조의 모습이 '수연진여의 지'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 진리가 설해진 어서는 '불변진여의 지'입니다.


우리가 어서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은 '불변진여의 지'에 귀의하는 모습입니다. 나아가 그 어서의 가르침을 신심으로, 지혜로 체득하여 자신의 인생관과 사회관의 원천으로 해서 사회에서 활약해 나아갈 때, '수연진여의 지'를 근본으로 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 방정식은 모든 것에 통합니다. 예를들면, 마이크와 같은 음향 설비는 소리와 음을 받아 전기 신호로 바꾸어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주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불변진여의 이'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위치를 켜서 전기를 흐르게 하여 실제로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수연진여의 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변진여의 이'앞에 적문이 있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법화경 적문에 이르러 비로서 '제법실상'이 밝혀져 삼라만상 모두가 일념삼천, 묘호렌게쿄의 당체(當體)라는 것이 밝혀지고 또한 이승작불, 여인성불, 악인성불이 설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법화경 적문에는 일체중생, 전 우주가 묘법의 당체라는 절대 불변의 진리가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화경 적문에서 일체중생이 부처라는 것이 설해지고, 자신이 묘법의 당체이며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았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현실의 고뇌를 극복해 갈 수는 없습니다. 관념일 뿐입니다. 이(理)와 사(事)는 천지(天地)입니다.


그런데 법화경의 본문에 들어가면 석존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떤 원인으로 부처가 되었는가 하는 본인(本因), 본과(本果), 본국토(本國土)가 밝혀집니다.


즉 본문에서는 일념삼천의 법리를 구체적인 석존의 행동을 통해 밝힘으로써 현실에서 성불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연진여의 지'앞에 '본문'이라는 두 글자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석존의 법화경의 '적문불변진여의 이'도 '본문수연지여의 지'도 대성인의 불법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이(理)이고 적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석존이 설한 법화경에서는 본문이라 해도 현실적으로 말법의 중생을 구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말법에 출현하신 니치렌 대성인과 삼대비법의 어본존을 건물이라고 하면, 법화경 28품은 설계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집을 지을 때는 설계도가 필요하지만 마지막에 중요한 것은 설계도가 아닌 실제의 집입니다.


<관심의 본존초>에는 「석존의 인행과덕의 이법(二法)은 묘호렌게쿄의 오자에 구족하였다. 우리들이 이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그의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시느니라」(어서246쪽)고 말씀하십니다.


석존이 성불하는 인(因)이 된 수행과 그 결과로서 얻은 공덕이 묘호렌게쿄의 오자, 즉 어본존에게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어본존을 믿고 창제하면 부처가 얻은 일체의 공덕을 물려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귀명이란 남묘호렌게쿄라고 하느니라」(어서708쪽)고 진정한 의미의 절대적행복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어본존에게 귀명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시고 있습니다.


이어서 「석(釋)에 가로되, 수연불변 ·일념적조」라고 (어서 708쪽) 있습니다. '수연불변'이란 '수연진여의 지'와 '불변진여의 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일념이란 순간순간의 생명입니다.


적조의 적은 마음이 진정된 상태를 말하며 정을 뜻합니다. 조는 지혜가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말하며 동(動)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수연진여의 지'도 '불변진여의 이'도 모두 일념삼천의 본체인 묘호렌게쿄에, 인간의 일념에 구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들면, 물은 'H2O'라는 분자식으로 표시되는데 이것을 '불변진여의 이'라고 한다면 상황에 따라서 얼음, 냉수, 뜨거운 물, 수증기로 연(緣)에 의해 변화하는 것은 '수연진여의 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강의를 듣기도 하고, 전차를 타거나 식사도 하고 잘때도 있습니다. 혹은 고민하고 화를 내거나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고 있어도 모두 같은 A라는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A를 A답게 하는 통합성, 이를테면 법(法)이 있습니다. 이것이 불변진여의 이입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그의 생명활동은 '수연진여의 지'가 됩니다.


이 '불변진여의 이'와 '수연진여의 지'는 모든 것에 함께 갖추어져 있는 생명의 실상이고 그것을 '수연불변 ·일념적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묘법의 원리에 따라 영지를 빛내고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또 가로되, 남묘호렌게쿄의 나무란 범어이고 묘호렌게쿄는 한어이며, 범한(梵漢) 공시(共時)에 남묘호렌게쿄 라고 하느니라」(어서 708쪽) 입니다.


남묘호렌게쿄의 나무란 고대 인도어인 범어를 그대로 음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묘호렌게쿄는 이전에 의역된 한어입니다. 즉 인도어와 중국어가 함께 갖추어져 있는 것이 남묘호렌게쿄 입니다.


또한 어본존의 중앙에는 '南無妙法蓮華經 日蓮'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니치렌은 일본어 입니다. 더욱이 좌우에 쓰여진 십계의 중생 가운데 마주해서 오른쪽 끝의 '부동명왕과 왼쪽 끝의 애염명왕은 범자(梵字)로 쓰여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염부제에 광선유포해야 할 이 어본존은 범·한·일의 3개국 문자로 쓰여져 있습니다. 과거의 세계관으로 말하자면, 전세계라는 의미이겠지요.


나는 <어의구전>에 실린 어문을 배독했을때 남묘호렌게쿄라는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은 한 나라, 한 민족의 가르침이 아니라 동양과 전세계를 위한 종교라고 깊이 실감했습니다. 또 이 어문은 동양 광포, 세계 광포는 반드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세계에 정법을 넓히고, 모든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사색하기 바랍니다.














출처 : 목우산책
글쓴이 : 혜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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