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0. 18. 17:41ㆍ佛法 .SGI
「南無妙法蓮華經(남묘호렌게쿄)」
<인사말 생략>
사람의 마음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합니다. 매우 변하기 쉬운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기쁨. 슬픔. 분노. 괴로움 등등. 순간순간 생명은 변하며, 인생도 변화합니다. 사회도 시시각각 급변해 갑니다.
이런 가운데 어떻게 하면 확고한 행복의 궤도를 달릴 수 있는가. 이것이 인류가 수백,수천년이나 탐구를 계속한 인생의 근본과제입니다.
대저택에 살고 있으면서 조금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재산이 많다고 하여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지위가 있으니까, 유명한 학교를 나왔으니까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행복은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세를 한 순간에 일이 막혔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했으나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아 괴로워합니다. 또 자녀문제로 괴로워합니다. 아무리 재능(才能)이 뛰어나도, 건강하지 못하면 충분히 활용할 수 없습니다.
행복한 길을 걸으면서도 인생의 최후에 불행의 늪으로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기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숙업'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석존은 《팔만대장경》이라고 불리는 방대한 경전을 남겼으며, 그러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의 진수를 니치렌 대성인은 '南無妙法蓮華經'의 일법(一法)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여러가지 인생문제에 대해 근본 해결법을 제시하신 분이 바로 우리들이 신봉(信奉)하고 있는 日蓮(니치렌) 대성인이십니다.
즉 우리들이 본존님을 향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면, 어떤 숙업도 타개하고 자신의 내면에 절대적 행복경애를 쌓아 최고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 간디와 남묘호렌게쿄
"어떤 인간도 종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라고 말한, 비폭력 운동으로 인도의 독립을 쟁취한 마하트마 간디는 남묘호렌게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도문화국제아카데미의 이사장인 찬드라 박사는 "1930년대 중반에 마하트마 간디는 그의 도량(道場)에서의 기원에 '南無妙法蓮華經'의 제목을 넣었습니다.
간디는 '남묘호렌게쿄’가 '인간에 내재하는 우주대 힘의 구극적 당체’의 표현이며 '우주의 지고한 음률이 연주하는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을 각지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간디는 찬드라 박사의 부친인 라그 비라 박사에게 '남묘호렌게쿄’의 의미를 질문했는데, 라그 비라 박사는 니치렌 대성인에 대해 쓴 일본 불교학자의 책을 읽고, 거기서 제목의 역사적 배경과 칠문자(七文字=南無妙法蓮華經)의 한자의 뜻을 간디에게 설명해 주며 “남묘호렌게쿄는 삼라만상을 형성하고 발전 확대시켜 가는 근원적 존재입니다”라고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이케다 SGI회장과 간담한 간디의 손자 아룬씨는 "할아버지(간디)는 아슈람(道場)에 모인 사람들과 행하는 매일의 기도에 불교의 기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는 제목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까? 라는 이케다 회장의 질문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간디마저도 감탄해 마지 않았던, 이 제목을 매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일까요?
니치렌 대성인께서는「일체중생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이외의 유락(遊樂)은 없느니라」(어서 1143쪽) 라고 어서에서 명확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제목(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것을 말함)을 부르면 자기 자신의 생명이 부처의 생명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부처로 되기 때문입니다.
'유(遊)'란 인생을 자재(自在)로 살아가는 것, '낙(樂)'이란 인생을 마음으로부터 즐기는 것입니다. 강한 생명력과 풍부한 지혜가 있으면 마치 파도가 있으므로 '파도타기'를 즐길 수 있듯이 험한 산이 있으므로 '등산'을즐길 수 있듯이 모든 인생의 고난도 즐기면서 극복해 갈 수 있습니다.
그 생명력과 지혜의 원천이 묘법이므로,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이외에 유락은 없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남묘호렌게쿄라고 제목을 부르면, 자기 자신이 생기 발랄하게 인간혁명하며, 그 생명으로 부처의 강하고 풍부하고 상쾌한 생명을 자기도 맛보고 다른 사람조차도 구해 가는 힘이 무한하게 솟아나옵니다. 그것이 부처의 생명입니다.
일반 불교에서는 부처를 단지 기원하고 의지하고 부탁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은 부처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나타내는 법리이며, 그것이 바로 남묘호렌게쿄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유명해지면 행복한가. 재산이 많으면 행복한가. 지위가 높으면 행복한가'.
절대로 그렇게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저택에 살면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고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 대부분이 불행해 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허영심에 사로잡혀서 안심을 전혀 할 수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행 ·불행을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자기 자신'입니다. 이 자기 자신의 경애를 바꾸지 않고서 참된 행복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정신의 스케일을 바꾸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경애를 바꾸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며, 그렇게 되기 위한 비결이 '제목을 부르는' 것입니다.
♧ 법화경의 인생관 중생소유락(衆生所遊樂)
우리들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독송하는 법화경의 자아게에는 중생소유락(衆生所遊樂)>이라는 글월이 있습니다.
본래 이 세상은 '중생(사람)이 유락하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즐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지, 괴로워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법화경 에서 가르치는 인생관의 근본입니다.
괴로움이 없는 곳에 가서 유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유락한다 -- 놀고 즐긴다. 일도 즐겁다. 가정의 생활도 즐겁다. 광선유포를 위해 학회활동하며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도 즐겁다.
이러니저러니, 싫은 일이 있어도 오히려 이것이 맛을 돋구는 양념이 되어 인생 전체가 재미있게 됩니다. 좋지 않은 일도 재밌게, 즐겁게 생각해 버리는 불계의 대생명력이 나타나므로, 이 세상은 즐기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락이라고 하여 아무 괴로움도 없이 놀기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불법에서 가르치는 참된 '유락'이란 아무런 괴로움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맑은 날씨만이 계속 되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오는 날도, 눈이 내리는 날도, 폭풍우가 부는 날에도 당당히 눈하나 까닥 않는 대전당과 같은 강한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런 어려움도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미동도 하지 않고 사자왕과 같이 싸우며 승리해 가는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일체를 즐기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창가학회 제2대 도다 회장은 "뽀빠이는 약해서 지고만 있을 뿐이었는데, 시금치를 먹으면 금방 강해진다. 뽀빠이에게 있어서 시금치는 신앙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문제없다'라고 하는 확신이 있었다. 시금치를 믿는 사람도 강해지는데 세계제일의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함으로 어떻게 하는가"라고 지도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확신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묘법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두고 그 마음을 근본으로 해서 '나는 묘법을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곤란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 문제없다. 전부 극복해 보이겠다'라고 하는 - 그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결코 패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러한 강한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이 바로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께서는「고(苦)는 고(苦)라고 깨닫고 낙(樂)은 낙(樂)이라고 열어서 고락(苦樂) 함께 아울러 생각하여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계시라. 이 어찌 자수법락(自受法樂)이 아니겠느뇨.」(어서 1143쪽) 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괴로울 때도 제목, 즐거울 때도 제목입니다. 제목을 부를 수 있는 자체가 행복입니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모두 인생입니다. 인생이라고하는 드라마의 더할 나위 없는 한 토막입니다. 괴로움이 없이 즐거움은 맛볼 수 없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의 맛을 알지 못하면 인생의 깊이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 불법에서는 '번뇌즉보리'라고 하여 어떠한 괴로움도 반드시 최고의 행복으로 바꾸어 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생에는 슬픈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의 강이 깊으면 깊을수록, 괴로움의 산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극복한 기쁨은 깊고 행복은 큽니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은 '변독위약(變毒爲藥)'의 법입니다. '독'마저도 '약'으로 바꾸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습니다.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본존님에 대한 강한 기원과 깊은 신심이 있으면 모든 것을 공덕(功德)으로 바꾸어 변독위약(變毒爲藥)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고난이나 불행이라고 생각되는 일에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인생을 유락하며 끝까지 살아 가는 것입니다.
'고를 고라고 깨닫고'란 살아 있는 이상, 괴로움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각오하고 괴로움을 내려다 보세요(강하고 높은 경애로 내려다보면서 살아가세요)라는 뜻입니다. 불계의 지혜의 빛으로 확실히 비추어 가는 것입니다. 겁을 내서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불계의 지혜를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합니다. 여실지견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사물의 본질을 간파하는 것은 '부처의 지혜'입니다. 여실지견의 힘으로 번뇌는 즉 보리이며 전부 행복의 양식이 됩니다.
'낙은 낙으로 열고'란, 아 감사하다, 너무 기쁘다, 기쁨이 있으면, 그것을 계기로 해서 생명자체를 더욱더 나타내 가며 안락한 생명을 맛보는 것입니다.
기쁨을 기쁨으로 발견할 수 있는 사람,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마음'에 의해 가속도로 인생의 '안락, 즐거움'을 늘려 가는 것입니다. 환희, 감사, 보은할 수 있는 마음은 전부 '부처의 마음'입니다.
바다 위에서 파도가 소용돌이 쳐도 대해의 밑(바닥)은 변동이 없이 아주 잔잔합니다. 인생에는 고락의 파도도 있습니다. 그런 파도에 좌우되지 않는, 깊고 커다란 자기 자신을 만듭니다. 이것이 '자수 법락'인 것입니다.
고든 낙이든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고 부처의 생명에서 출발해 가는 것입니다. '고락과 함께'하는 것이 열쇠이며 극의입니다.
인생을 건강하게 장수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불법의 세계입니다. 묘법(妙法)은 생명의 대양약이기 때문입니다. 「남묘호렌게쿄는 사자후와 같으니, 어떠한 병인들 장해를 할 손가」(어서 1124쪽)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변의 우인들을 통해 새벗환영회에 오셔서 최고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위대한 묘법을 만났습니다. 공덕을 받는 길을 생명 속에 만들었습니다. 그 흐름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 학회활동은 자신도 타인도 모두 행복해 지는 길!
그러면 지금부터 어떻게 제목을 부르며 신심(학회활동)해 가야 할까요?
대성인은 어서에서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이제 日蓮이 부르는 바의 제목(題目)은 전대(前代)와는 달리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쳐 南無妙法蓮華經이며」(어서 1022쪽) 라고 말씀하시며, 말법(지금 현재)에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은, 자신도 타인도 행복해 지기 위해 제목을 부르며 활동해 가는 자행화타의 실천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정법 시대 천년을 대표하는 용수보살도, 상법 시대의 천년을 대표하는 천태 대사도 남묘호렌게쿄의 창제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자신이 법의 이익을 받기 위해 수행한 것으로 '자행으로만 끝나는 창제'였습니다.
널리 남을 위해 제목을 설하는 일은 없었기에 '타인을 구하는 화타에 이르는 창제'는 아니었으며, 묘법의 위대한 힘을 나타내지도 못하였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행화타에 걸친 창제로, 자신도 타인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진수입니다.
불법에서는 남을 보살펴 준 만큼 즉 '남에게 살아가는 힘을 끄집어 내 준 만큼 자신에게도 살아가는 힘이 증가한다. 남의 생명을 확대해 준 만큼 자기 생명도 확대된다'라고 설합니다. 이타(利他)와 자리(自利)의 일치입니다. 자타불이의 행복인 것입니다.
자신도 행복해지고 남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어느 의미에서 자신의 행복은 뒤로 미루는 한이 있어도 민중의 행복을 위하여 진력해 가는 보살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지향하는 학회정신입니다.
이에 대해, 니치렌 대성인은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십니다. 「끝까지 마음을 하나로 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나도 부르고 남에게도 권한다. 실로 그것만이 인간계에 태어난 금세의 추억이 된다」(어서 467쪽, 통해)
묘법을 가르쳐 주어 타인과 사회를 행복으로 이끄는 광선유포의 행동 � 이것만이 금세의 인생에서 최고 무상의 추억으로 됩니다.
애인과 공원을 산책한다. 그때는 '행복하다'고 느껴도 결혼하고 나서 '속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을 많이 모았다. 그러나 도둑을 맞거나 순식간에 잃어버려 지옥과 같은 고통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님도 언젠가는 돌아가십니다. 자신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이것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습니다. 세세생생 삼세에 걸쳐 무너지지 않는, 최고 무상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
이것을 밝히려고 인류 역사상 수천 수만의 철학자가 도전했습니다. 수많은 종교가 생겼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묘법(妙法)' 밖에 답은 없습니다.
이 묘법을 설해 밝힌 사람이 석존이고, 우주의 근본법으로 명시해 주신 분이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입니다.
도다선생님은 자신만을 위해 기원하고 광선유포에 활동하지 않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감추어 두고 혼자서 슬그머니 먹으려는 것과 같은 신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절복을 꾸준히 해 온 사람은 복운의 토대가 콘크리트와 같이 단단해집니다. 강해집니다. 홍교의 수행을 피한 사람은 아무리 훌륭하게 되어도 도금(鍍金)한 것처럼 유사시에는 떨어지고 맙니다.
사람을 구제함으로써 자신도 구제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리학상으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치유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나 괴로움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힘'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일어설 수 있는가. 아무리 자신의 괴로움을 꿰뚫어보아도 더욱더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괌에서 일어난 비행기 사고때도, 대구 지하철 사고때도 자기 자신도 피해를 입고, 가족이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도, 같이 사고를 당한 사람을 격려하고 보살펴 준 에피소드는 많이 있습니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때의 피해자가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달려와 자원봉사를 한 것은 이러한 연유입니다.
똑같은 괴로움을 맛보고 있는 사람의 곁으로 가서 그 사람을 도와줌으로써 자신도 '살아가는 힘'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동이 자신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최고의 묘법을 가지고 자신과 같은 고통에 괴로워 하는 사람들에게 묘법을 알려나가는 학회활동은 최고의 대선의 행동이며 자신도 타인도 행복해 지는 지름길 입니다.
광선유포(법을 넓혀나가는 것)를 하는 학회 활동은 행동한 만큼 자신이 이득입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을 위함이며 사회를 위한 활동입니다. 이만큼 위대한 행동은 없습니다. <마무리 인사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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