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일상생활과 신심(배준길)

2007. 10. 18. 17:22佛法 .SGI

 

◇ 일생생활과 신심


[문] 어째서 우리들의 불도수행이 일상생활속에서 가능할까요?


[답] 그것은 오로지 대어본존의 불력.법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고행이나 명상에서 볼 수 있듯이 생활을 전폐하고 생활을 떠나 수행해야만 하는 것은 그만큼 법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며 스스로 깨닫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수행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행뿐이고 화타까지 미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법 이전의 정상 2000여년간의 불도 수행이 세상의 모든 연을 끊고 산속 깊숙한곳에서 고행등의 자행을 불도수행으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행을 중심으로한 섭수 즉 스스로의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을 한 것은 법이 낮았기 때문입니다.

이에비해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어본존의 불력과 법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일부러 일상생활을 떠나 장기간에 걸친 자행의 수행을 행할 필요가 없으며 일상생활속에서 자행화타의 이행을 수레의 양바퀴처럼 원활하게 추진해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들의 불도수행을 일상생활 속에서 행 할 수 있는것은 어본존의 불력.법력이 절대적이고 대단하다는 점에 기본을 두고 있습니다.


[문] 어본존의 불력.법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고행이나, 명상등을 하지 않아도 일상생활을 하면서 대성인의 불법을 할 수 있다는데, 대성인의 불법을 수행하는데 유의 할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답] 예. 우리들의 일념의 자세를 어디까지나 엄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본존의 불력 법력에 의해 우리들은 확실히 타종에서 행하고 있는 것처럼 고행등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에게 엄격함이 필요없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성인이 우리들 범부에게 요구하는 엄격함은 단식등으로 자신의 육체를 괴롭히는 외견적인 엄격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의 신심의 일념이라는 내면적인 엄격함이며 사신홍법 즉 몸을 던져 법을 넓힘, 신경법중이라하여 몸은 가볍고 법은 중하다 등의 말을 보더라도 어떠한 곤란이나 불신의 벽에도 지지않고 어디까지나 절복 홍교를 관철한다는 결의의 엄격함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일념을 엄하게 다스리는 추상과 같은 신심이 외견상의 엄격함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훨씬 더 엄격하다고 하겠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 일점을 소홀히 하여 어본존의 불력 법력에 응석부리는 신심에 빠졌을 때 우리들의 불도수행은 곧 수행의 의의를 잃어버리고 형식상으로는 자행화타를 행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 내용은 온몸에서 솟아나오는 환희도 없고 충실감도 없어져 버립니다. 그때는 신심즉 생활의 상태가 아니라 신심과 생활이 분리되어 긴장감이 없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과 신심을 즉(卽)으로 연결시키는 것이야말로 다름아닌 우리들의 일념의 엄격함입니다. 따라서 이 일념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일을 게을리하거나 ‘신심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되겠지’ 라는 적당하고 수동적인 자세로는 표면적으로는 신심과 생활이 일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은 신심즉생활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어본존에게 응석부리는 신심이라고 하여 이익신심이란 말도 있습니다. 어본존께 ‘공덕이나 이익을 주십시요’라고 기원만 할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진과 노력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도 불도수행으로서의 엄격한 신심의 자세를 잊어버린 안이함에 빠져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라고 한다면 자신을 단련하여 현재의 자기를 보다 높은 자기로 경애변혁 해 간다는 무엇인가 자기 향상이 그 근본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현재의 자기의 세계를 타파하고 보다 높은 열린 자기를 지향하여 정신을 단련하고 마음을 연마해 간다고 하는 ‘내면의 싸움’이 없으면 안됩니다.

또 안이한 자세와는 반대로 전술한 ‘사신홍법’‘신경법중’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여 생활을 무시하고 광신적인 홍교활동에 매진하는 일도 역시 생활즉신심의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신홍법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절복과 홍교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결의와 엄격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며 스스로가 자행화타하는 신심이 타성에 흐르고 안이하게 되어 있지 않은가를 훈계하는 보다 엄격하게 다루는 것을 가르킨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요는 불도수행으로서 우리들의 자행화타의 활동은 반드시 자기의 신심을 엄격하게 추궁하여 타성에서 각성으로, 현상에 대한 안주에서 타파로, 닫혀진 자기에서 보다 열려진 자기라는 항상 자신의 향상을 도모하는 끊임없는 정진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엄격한 자기 단련의 과정이 그대로 불도수행이 되는 것이며 오체에 묘법의 환희를 가득 채운 생활즉신심을 완수하는 유일한 조건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문] 신심즉생활이란 안이한 형태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신심의 일념의 자세로 임해야 된다고 하는데, 생활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좋은일 나쁜일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합니까?


[답] 일생생활에서 일어나는 좋고 나쁜일들은 자기의 신심을 강인하게 하는 연이 되며, 그래서 엄격한 신심의 일념의 자세로 자행화타에 걸친 실천을 전개한 결과, 자신의 온몸에서 넘쳐 나오는 환희와 지혜를 가지고 생활과 일에 적극적으로 부딪치며 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심과 생활은 신심이 생활에 환희와 약동을 불어 넣고, 생활이 신심을 보다 강하게 하는 연이 되어 간다는 약동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므로 일생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려가지 좋은일 나쁜일을 자행화타에 걸친 제목을 많이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문] ‘마음의 스승으로는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어서 1025쪽) 는 어서말씀을 우리들이 불도 수행을 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답] 인간의 마음은 외부의 연에 의해 변하며 ‘일일중에 팔억사천념’(어서471쪽) 이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변만화의 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불법의 진리, 생명의 법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 불도수행의 곤란함이 있습니다. ‘마음의 스승이 되라’- 무수한 마음을 인도하고 컨트롤하는 스승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스승이란 대성인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어본존께 제목을 봉창할 때 나의 생명의 오저에서 마음을 통과하여 현현하는 불계의 생명이야 말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음을 인도하고 컨트롤 해가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어서를 배독하면 나의 마음을 어본불의 생명에 닿게되며, 그 절대적인 확신과 사자후에 의해 소생시켜 간다고 하는 끊임없는 실천속에서 우리들 범부의 마음은 차츰 연에 분동되지 않는 부동의 경계를 획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스승으로 되어 간다는 것은 언제나 현재의 자기에게 만족하지 않고, 아직도 자기는 부족하다고 받아들여 보다높은 경애의 자신을 목표로 하는 겸허한 마음이며 구도의 불길을 꺼지지 않게하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문] 그리고 우리들이 자주 생명력에 대하여 말을 합니다만 생명력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 입니까?


[답] 조석으로 어본존과 대좌하여 낭랑한 근행 창제를 할 때 우리들의 색심 깊숙한 곳에서 불계 즉 南無妙法蓮華經의 대생명이 용현합니다- 그순간의 환희와 상쾌함은 신심하고 있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제호미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참으로 ‘南無妙法蓮華經는 환희중의 대환희이니라’(어서788쪽)라고 말씀하신 대로의 상태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확실히 자각합니다- 창제 이전의 자기와 창제후의 자기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창제후의 자기는 참으로 크고 넘칠 듯한 힘과 약동감으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이 실감이야말로 실로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생명력이라는 내용입니다.


[문] 그러면 이 생명력은 어디서 옵니까?


[답] 원래 색심 깊숙한 곳에 내재하고 있던 본래의 힘(제9식)이 나타난 것입니다. 불계의 생명입니다.


[문]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불계의 생명이 나타날까요?


자행화타에 걸친 창제를 했을 때 나타납니다. 우리들 범부는 누구나 자기, 아(我), 나 등이 있어서 그것이 우리들의 생활이나 행동을 명령하고 지배하고 있는 듯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자아를 중심으로 해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불법에서는 이와같은 자아를 소아(小我)라고 하며 소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한은 생활이나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의 소아와 소아가 맞부딪쳐 으르릉대며 싸움이 끊이지 않아 서로가 고뇌와 불행을 느끼게 된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이렇게해서 ‘지혜를 쓰면 모가 나고 정에 끌리면 떠내려 가며 고집을 부리면 답답하다. 아무튼 인간의 세상은 살기 어렵다’라는 현상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불법은 이 소아에 대하여 대아(大我), 진아(眞我)를 설합니다. 이 진아(제9식)는 생명 깊숙이 내재하고 있습니다만 소아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범부에게는 좀처럼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소아가 진아를 덮어 가리어 그 진아의 출현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거울 자체를 진아에 비유하면 소아는 거울에 붙은 먼지이자 그을음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먼지나 그을음을 닦아내야 됩니다.

우리들이 창제하는 것은 자아 중심적인 자기를 일단 닦아 없애고 본래 내재해 있는 진아를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뜻합니다. 일생성불초에 “비유컨대 암경도 닦으면 옥으로 보임과 같도다. 지금도 일념무명의 미심은 닦지않는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럼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느냐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어서 384)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때 창제에 의해 진아를 나타낸 본래의 자기가, 소아를 중심으로 안달하던 자기를 유유히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경애에 서게 됩니다. 이때 생명력이 충만된 것과 같은 실감을 느낍니다.

이와같이 생명력이 나타난다는 것은 소아를닦아내어 진아가 나타나는것과 마찮가지이며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숨어있던 본래의 완전한 자기가 된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경애가 깊어지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생명력을 이해한다면 자아 중심적인 이른바 아만편집(我慢偏執)의 마음을 신심으로 닦아가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명백해졌습니다.

광선유포를 하고 있는 창가학회에서는 전국 여러 곳에서 공덕의 체험과 신심의 기쁨이 들려옵니다만 이처럼 대공덕을 받는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은 모두 아만편집의 마음 즉, 소아중심의 자기를 없애 버리고 훌륭하게 진아를 빛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범부이기 때문에 창제를 하면서도 처음에는 자기에게만 닥쳐 온 괴로움이나 곤란, 그리고 자신의 숙업을 원망하고 또 깊은 숙업을 한탄하는 자아 중심적인 마음이 튀어 나옵니다. 그러나 창제를 거듭함에 따라 차츰차츰 자기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광선유포의 사명감이나 묘법의 엄염한 실증을 나타내려는 남을 생각하려는 고차원의 목적이 싹터 마지막에는 어본존께 창제할 수 있는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만이 흘려 넘치게 됩니다. 이때 진아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원하든 공덕이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대성인께서 여러어서에 ‘깊이 신심을 일으켜’‘결단코 신심을 일으켜 이 본존님께 기원하시라’‘더욱더 강상한 심심을 가지시라’는 등, 신심에 힘쓰라고 지도하시고 있는 것도 어디까지나 범부가 소아를 없애 버리려는 노력의 근본은 어본존에 대한 신심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당연히 자기의 아만편집의 마음을 응시하여 소아 중심의 모습을 겸허하게 포착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거울을 더럽히는 먼지인지를 모르면 닦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뜻에서도 항상 자기자신을 응시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문] 앞에서 생명력이라는 말은 자기경애의 심화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기술했습니다. 소아에서 진아를 향한 과정 그 자체가 경애의 깊이를 뜻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면 경애가 깊어진다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일까요.


[답] 소아 중심의 자기일 때는 타인의 소아와 충돌하여 타인을 거부하거나 배제하려는 마음이 움직입니다. 어본존께 창제하여 그 소아를 없애고 진아를 나타낸다는 것은  반대로 타인을 어디까지라도 받아 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생명력이란 바꿔 말하면 자기와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이나 싫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아니면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조화와 협조를 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진실한 의미의 생명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 힘은 진아로서 본래 자기속에 있다고 하는 점이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인간(人間)이란 ‘사람과 사람사이’를 표현한 말이며 혼자서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혼자면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이 원리를 잘 이해하게 된다면 자아 중심의 자기를 배제하고 인간관계 속에 존재하는 자기를 응시하는 노력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어본존께 창제한 결과 솟아 오르는 불계의 생명 즉 진아의 발현은, 높은 차원에서 소아 중심의 자기를 내려다 보고 동시에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자기가 존재하는가를 응시할 수 있는 자신이 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즉, 전체 속에서 자기가 놓여진 상태를 응시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바꿔 말하면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 해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대어본존을 수지하고 있는 우리들은 자기중심적인 입장을 초월하여 진아가 발현해 오기 때문에 참으로 고마운 일이며 이 한가지 만으로도 우리들은 어본존께 감사를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또한 매일매일 자신 내면의 진아가 빛나게 되고 나타난 진아를 근본으로 보다 크게 남을 포용하여 받아들이는 경애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기를 응시하고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 해 본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력과 겸허함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할 수 있어야만 생명력이 있는 사람이며 경애가 깊은 사람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남을 거부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생명력이 약한 사람이며 경애가 얕은 사람이 됩니다. 결국 생명력이란 자기 내면의 소아나 아집을 응시하여 이것을 극복하고 없애 나가는 힘이며, 우리들의 생명공간에 남을 포용하는 공간이 커짐을 의미합니다. 대성인의 불법을 신봉하는 우리들은 자행.화타에 걸친 제목을 부르는 것이 생명력이 강해 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경애혁명입니다.


[문] 그러면 자기완성(성불)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 살아 가는 절대적인 기반을 어본존에 대한 신(信)에 둘 수 있다고 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실. - 우리들은 여기에 몇 번이고 눈을 돌려 자기경애의 심화, 인격도야, 자기완성을 향한 길을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으면 합니다.

우리들은 보다 엄격하고 더욱 철저한 자기완성의 길을 걸어 가겠다는 구도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대어본존에게 대한 신심을 다할 때의 안심과 여유, 그리고 조석으로 하는 근행창제에 의해 범부인 자기에게 주어지는 부처의 생명의 역용(지혜)으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번뇌나 악의 부분을 인식하고 응시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더구나 이길은 일생성불이라는 목적이 결정된 과정이며 그위에 일보일보 부처의 생명의 역용을 용현 시키면서 파도타기와 비슷한 과정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나날의 근행창제로 불계의 생명을 용현시켜 오체에 넘치는 우주생명을 실감하면서 구계의 현실사회 속에 뛰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소의 모순이나 불합리를 변혁시키기 위해 다시 어본존과 대화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다 강인한 불계의 생명을 용현시킵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한층 더 풍부한 생명력과 지헤로 구계사회의 현실변혁에 매진해 가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반복작업이 결국에는 자기완성(성불)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문] 자기완성,경애심화에 일체의 초점을 맞추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답] 인간적인 매력의 차가 아닐까요. 경애심화에 노력해 가는 사람은 애써 꾸미지 않아도 인간적인 매력이 자연히 갖추어 집니다. 그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도 겸허하며, 결코 뽐내거나 오만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타인의 고뇌나 인간적인 약점을 따뜻하게 배려해 주는 마음이 담겨 있어서 자연히 신뢰하는 마음이 생겨 스스로의 마음을 크게 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중하고도 심오한 언동으로 나타나며,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모든 일을 자기변혁의 연으로 할 수 있는 유연한 자세가 됩니다. 더욱이 자신의 숙업을 응시하여 불평이나 푸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숙명전환을 목표로 끊임없이 창제를 계속하여 경애를 심화 시킬것이므로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실한 자유인입니다.

반대로 자기내면에 눈길이 가지 않고 외면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자기변혁이나 경애심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타인의 교양이나 지식, 사회적인 지위, 입장을 비교하므로 그 결과 자기보다 우수한 사람에게는 비굴하게 되거나 필요 이상으로 동경하게 되며,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에게는 오만한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접하는 사람은 마음을 굳게 닫아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변혁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며, 세간의 평가나 타인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현시대와 사회는 참으로 마음이 풍부하고 따뜻한 눈빛을 가진 사람을 갈구 하고 있습니다.


[문] 불법원리에서 본 실증론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답] 언뜻 보기에 고매하고 복잡한 이론과 사상을 내세운다 해도 사실상 확고한 증거나 증명을 남기지 못한다면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반대로 이론이나 사상의 구조가 간결 명쾌해도 현실상에 확고한 증거를 남길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법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 南無妙法蓮華經의 칠자 만을  수행하면 좁은 것 같지만 그러나 삼세제불의 사범. 시방살타의 도사. 일체중생의 개성불도의 지남이시므로 깊으니라.” (어서1116쪽)   다시말하면 南無妙法蓮華經는 불과 칠자이며 너무나도 ‘간결해서 좁은 것’ 같지만 삼세시방의 제불을 인도하는 묘법(妙法)이며 일체중생 개성불도의 근원인 법이므로 ‘매우 깊도다’ 라는 말씀입니다.

불법에 있어서 실증이란 먼저 무엇보다도 성불, 바꿔 말하면 깨달음의 생명인 불계를 체현(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냄)하는데 있습니다.

南無妙法蓮華經의 묘법이 우주생명의 근원력 그 자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묘법은 만물을 만물로서 존재케 하고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근원의 법이며 힘입니다. 그러므로 묘법의 당체인 어본존을 믿고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한다면 누구라도 그 자리에서, 자기의 생명 내부에서 우주생명의 근원력을  솟아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불계의 용현이라는 상태이며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과구시(因果具時)의 일법(一法)이라는 묘법의 절대성에 뒷받침 되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계의 중생(因)이 일단 제목을 봉창하면 그 자리에서 우주생명의 근원력인 묘법(妙法)=불계가 용현합니다.---- 이 인과의 구시성(俱詩性),동시성이야말로 대성인이의 불법이 실증론,현증론을 가장 중요시하며 사(事)의 불법일고 칭하는 근거인 것입니다. 이전경에는 인과를 이시(異時)라고 했습니다. 구계의 중생이 장기간에 걸쳐 (역겁수행) 수행한 결과 불계라는 과에 도달한다고 설합니다. 그것도 불확실한 불계를 획득하기 위해 고통스럽고 괴로운 수행(단식, 폭포수, 명상)을 무한히 거듭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도 이외의 생활이나 주변의 인간관계, 세간이나 사회에 대한 관심이 자연적으로 희박해 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하겠습니다. 그 결과 불법과 사회, 신심과 생활의 분리를 초래하여 불법이 인간적 현실에서 유리되어 갑니다.

대성인의 인과구시의 불법은 지금까지의 불법의 사고방식을 180도 전환한 혁명적인 불법이라 하겠습니다. 대성인의 불법에는 ‘성불의 성(成)이란 연다’(어서753쪽)이며 스스로의 내부에 있는 불계의 생명을 열어서 나타낸다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구라도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면 그 몸이 그대로 불계의 생명을 열어 우주생명의 역용이 신체의 구석구석에까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불계의 생명을 나날의 근행창제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얻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불계의 용현이 지금까지 불법에서는 도달해야 할 종착점이어던 것에 비하여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반대로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불계의 생명의 용현이 출발점이 된다는 것은 생생하게 약동하는 우주생명의 역용을 실감하면서 세상으로 사회로 힘차게 나아가 현실의 그 장소에서 불계의 생명의 위대함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날의 근행창제로 불계의 생명을 용현시켜 오체에 넘치는 우주생명을 실감하면서 구계의 현실사회 속에 뛰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소의 모순이나 불합리를 변혁시키기 위해 다시 어본존과 대화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다 강인한 불계의 생명을 용현시킵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한층 더 풍부한 생명력과 지헤로 구계사회의 현실변혁에 매진해 가는 것입니다. 이 불계의 용현과 구계의 사회활동 사이에 있는 상호심화 작용이야말로 대성인의 불법의 활동성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대성인께서 ‘불법이라고 함은 승부를 우선으로 하고’(어서1165쪽)라고 말씀하신것도 묘법이라는 우주생명의 근원력이 그 저항력과 싸워서 이것을 지양(止揚)(두개의 모순된 개념을 한층 높은 단계에서 조화 통일함)하면서 발현하게 된다는 근본원리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힘은 저항이 있어야만 비로소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항이나 반대가 없는 곳에 힘은 발현되지 않습니다. 자연적으로 사람은 저항을 구하며 저항과 싸움으로써 보다 더한 힘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이미 불계의 용현이 우리들의 생명속에 있는 번뇌와 오탁투성이인 구계의 생명과 싸워 이것을 지양하면서 발현해 갑니다. 불법에서 말하는 번뇌(煩惱) 즉(卽) 보리, 생사 즉 열반이란 이러한 사실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즉의 일자는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어서732)라는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즉의 일자 속에 우주생명의 근원력인 묘법이 저항력이나 대항력과 싸워 이것을 지양해 간다고 하는 다이너미즘(활동성)이 있습니다.

번뇌나 생사에 미혹되는 힘과 싸워서 각각 즉 보리, 즉 열반으로 전환해 갑니다. 그 결과로 성불을 위한 자기변혁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을 괴롭히는 번뇌나 생사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보다 강하게 묘법의 생명력을 용현시키는 일이 요청되고 우리들의 강성한 신력이 더 한층 요망됩니다.

역경이 닥치면 닥칠수록 신신의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이 즉의 원리에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불법즉사회등의 원리는 자기변혁을 이루어 낸 한사람 한사람이 주축이 되어 묘법의 파동을 이웃에, 생활에, 시회에 미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아 경우의 ‘즉’은, 묘법의 생명력을 용현시킨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인간성을 매개로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성인의 불법이 인간관계나 사회속에서 실증을 구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증명은 참으로 제3자인 타인이 인식하여 깊이 수긍하는 곳에 성립됩니다.

묘법이 아무리 위대한 우주생명의 근원력이라 해도 타인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느낄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인간은 구체적이며 육안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통해서 만이 인식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이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묘법의 위대함을 말하는 우리들의 행동이나 모습, 생활태도를 통해서입니다.

참으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법은 스스로 홍통되지 않는다. 사람이 법을 홍통하는 고로 인법이 함께 존귀하도다.” (어서856쪽)의 글원은 영원한 지침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근행창제에 의해 우리들의 생명 내부에서 용현한 불계의 역용은 먼저 우리들의 색심에 넘쳐 행동이나 동작에 생생한 약동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상쾌한 약동감이 타인의 생명에 감응하여 우리들의 내부에 가득찬 묘법의 힘에 대한 깊은 인식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증을 나타낸다는 것은 생활상에, 이웃과 사회속에서 인데 이와같은 지역사회나 직장과 같은 일거수 일투족이 타인의 눈에 항상 드러나는 인간관계의 장소는 까다로운 조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큰 저항력이나 속박으로 육박해오는 장소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곳에서 묘법의 공력을 실증하는 일은 그만큼 불계의 생명력의 발현이 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측을 불허하는 현실사회 속에서 묘법을 근저로 한 생명력과 지혜를 가지고 항상 유유하게 극복해 가자고 결의하고 발심하는 가운데 끊임없는 생명의 연속혁명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묘법의 공력을 생활과 사회에 실증하려고 하는 긴장된 일념이 더 한층의 자기혁신을 촉구하게 되고, 보다 깊어진 자기의 경애가 이번에는 생활과 사회속에서 확실한 실증으로 되돌아 옵니다---이 다이나믹한 관계를 지속해 가는 속에 생활즉신심, 불법즉사회의 실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주 석존의 출세의 본회는 사람의 행동에 있었노라.”(어서 1174쪽) 라는 말씀은 참으로 대성인의 불법에 있어서 실증론의 구극을 가르친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나날의 근행창제는 구식 즉, 불계를 용현하는 것입니다. 육식은 구식의 빛에 비추어져 리듬바른 약동감에 충만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이 구식에 뒷받침된 육식이야말로 상식 풍부하고 인간성이 충만된 행동으로 되어 나타나 반드시 주위의 인간관계에 상쾌한 훈풍을 보내게 됩니다.

우리들은 신심즉생할, 불법즉사회의 원리를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행동이나 언동으로 실증해 가는 것이 대성인의 불법에 있어서 오늘날의 불도수행이라고 굳게 각오하여 경애혁명의 대도를 착실하게 나아가야하겠습니다.

출처 : 목우산책
글쓴이 : 혜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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